제86화. 학원도시 (2)
위생 관리가 철저히 되어 있는 연구소 내부.
한 사내가 가만히 선 채로 누군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방 정리하겠습니다.”
전화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관리국에서 이곳을 의심하고 있으니 어서 흔적을 지워라.
일방적으로 끊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사내는 책상 위의 사진을 응시했다.
전요한.
현재 모든 문젯거리의 중심에 서 있는 청년이다.
“프리메이든 사도가 우리의 뒤를 밟기 시작했어. 한나 앨리슨이 친히 나섰더군.”
뒤쪽에서 걸어온 수의 차림의 여성이 나무라듯 말했다.
하지만 사내는 안색도 바꾸지 않은 채 그녀에게 대꾸했다.
“그녀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다. 사업차 한국에 방문한 상태였으니까.”
“다음 계획에 차질이 없으려면 그녀를 잘 지켜봐야 해. 사소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단 사실, 잊지 마.”
수의 차림의 여성은 책상 위에 있던 전요한의 사진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부드럽게 그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의 최종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아이는 반드시 필요해. 그러니까 손댈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
사내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앞의 모니터에 출력되어 있는 사진 자료를 응시했다.
그 사진 자료는 알려져서는 안 될 중대한 비밀을 한 가지 간직하고 있었다.
“지워버려. 혹여 발견되기라도 하면 큰일 나니까.”
“…알겠다.”
사내가 암호 코드를 입력하자 모니터에 타이머와 함께 붉은 바탕의 경고창이 떠올랐다.
이후 그는 수의 차림의 여성과 함께 연구소를 떠났고 어두워진 실내는 무거운 적막에 휩싸였다.
* * *
“오랜만에 바깥 구경하니까 어때, 시르케?”
“뭐, 나쁘지 않네요. 하지만 조금 인위적인 느낌이 듭니다.”
인파가 북적이는 거리를 함께 걸으며 시르케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평소처럼 행동하고 있는데 어딘가 공포에 질린 듯하다.
“저들은 이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일반인이거든. 그래서 위원회의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지.”
“성채도시의 농노나 다름없군요. 일상적인 자유는 있지만, 거주 이전을 함부로 못 하니까요.”
시르케는 자신의 세계관대로 상황을 이해했다.
확실히,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성채도시나 다름없다.
그것을 지키는 건 관리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이능력자들이다.
‘위원회장이 면담을 허락하다니, 의외로군.’
단둘이서만 찾아오라고 한 걸 보면 단순한 호의는 아니다.
전요한은 이번에도 무언가 꿍꿍이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고민하던 그의 시야에 디저트 가게가 들어왔다.
“여기서 잠깐 아이스크림 사먹자.”
“아이스크림? 그게 뭐죠?”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시르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여전히 이쪽 세계에 모르는 게 많았다.
“생크림에 연유를 얹어서 조금 차갑게 만든 느낌이라고나 할까. 한번 먹어 봐.”
마치 유치원 교사처럼 아이스크림이 어떤 음식인지 알려줬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가게 주인이 아빠 미소를 지었다.
“여동생인가요? 정말 귀엽게 생겼네요.”
일반인과 달리 귀가 조금 솟아 있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위장 마법으로 자신의 본모습을 어느 정도는 보정하고 있는 탓이다.
덕분에 다소의 시선이 집중되더라도 괜한 의심을 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음, 달콤하네요. 북해도의 설국에서 먹었던 빙과와 비슷해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먹은 시르케가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지 오랫동안 그 맛을 음미했다.
“이쪽 세상엔 맛있는 게 많아. 기회가 된다면 이것저것 먹어 보자고.”
“…돈을 많이 벌어야겠군요. 물욕에 너무 빠지고 싶진 않지만, 이세계 여행은 흔치 않은 기회니까요.”
시르케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좀비 사태가 발생한 지도 꽤 되었지만, 기존의 화폐는 어느 정도 가치가 유지되는 상황.
사회질서가 완전히 붕괴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정말로 아무 일 없었어? 내가 아카데미에 자리를 비웠던 동안.”
단둘이서만 있게 되자, 전요한은 그동안 궁금했던 걸 물었다.
시르케는 잠시 말이 없더니, 허공의 너머를 가리켰다.
“저쪽입니다.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있어요.”
그것은 마치 율리안 교관의 천리안과 비슷한 능력이었다.
직접적인 위해는 가해오지 않지만, 적잖이 신경 쓰인단 말에 전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새장에 가둬 두기라도 한 태도로군.”
아카데미의 교관들은 이러한 사태를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학원도시의 취지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해줄 수 있는데, 이건 안보와 질서를 빙자한 쿠데타나 다름없다.
“이곳에 살고 있는 일반인을 다 합치면 300만 명입니다. 그들을 인질로 삼고 있는 셈이니, 관리국에서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거겠죠.”
시르케는 일단 저들의 의도대로 행동해주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이 정도의 일을 벌일 정도면, 잘은 몰라도 정면 돌파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그 녀석들이 수상한 짓을 꾸미는 걸 알게 된 이상 내버려 둘 생각은 없어.”
고위층의 음모로 이곳이 혼란해지는 걸 전요한은 원치 않았다.
우선은 궁극적인 목적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지켜보니, 단순히 소국가를 형성해서 그 위에 군림하려는 속셈만이 아닌 듯하다.
“당신의 말대로, 악마와 같은 이세계의 존재들이 개입하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신중하게 조사를 진행해보죠.”
말을 마친 시르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삐리리릭―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한 통의 전화가 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누구시죠?”
-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봉쇄령이 내려졌던 지역구에서 만났던 악마였다.
녀석은 대담하게도 직접적으로 연락까지 시도하고 있다.
“아뇨, 별로 잘 지내진 못했습니다만.”
- 너무 화내진 말아주세요. 그건 그렇고, 게임을 해보지 않겠습니까?
“게임?”
- 네, 당신이 이기면 제가 잡히고, 제가 이기면 당신이 잡히게 되는 게임 말이죠.
이 녀석 봐라.
어이없는 제안에 전요한은 순간 눈을 반짝였다.
상대는 자신의 혈액이 채취되었단 사실을 모르는 상태.
이 기회에 한번 붙잡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한번 해보도록 하죠. 최후의 승리자가 서로의 인신을 구속하는 조건으로 말이에요.”
제법 똑똑한 척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악마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전요한은 눈을 번뜩였다.
* * *
학원도시의 중앙부에 위치한 순백의 상아탑.
그곳의 중간 계층엔 귀빈을 접대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치 숲속처럼 전원적인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이곳에 머무르는 건 별문제가 없으신지요?”
미리 앉아 있던 장발의 사내가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사실상의 행정권을 쥐고 있는 위원회장.
직책이 높은 탓인지 여러 명의 이능력자들이 곁을 지키는 중이었다.
“됐고, 메르키오르 재단의 이사장을 만나고 싶다.”
존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므로, 전요한은 반말로 일색했다.
위원회장은 곤란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원로원이 있는 상층부는 일부 권한자를 제외하곤 출입이 불가능해서….”
그가 말하는 원로원이란, 다름 아닌 메르키오르 재단을 의미했다.
잠자코 변명을 듣던 시르케는 재미있단 반응을 보였다.
“마치, 마탑의 구조 같군요. 각 구역별로 서열과 부여받은 권한이 나뉘죠.”
에테리아 대륙에서 마법사들의 탑은 학문과 지성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만한 위엄과 헌신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최첨단의 건축기술을 통해 빠르게 쌓아 올린, 부귀영화의 상징물일 뿐.
“저희는 인류 최후의 보루를 구축하고자 하는 나름의 사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상아탑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요람」이라고 할 수 있죠.”
위원회장은 학원도시의 존재 가치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전요한은 흥미 없다며 그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네놈들이 학원도시를 「방주」라고 생각하든, 「낙원」이라고 여기든 관심 없어. 우리를 왜 여기로 불러들인 건지나 대답해.”
원로원은 임시적인 공존 상태를 놓고 관리국과 거래를 했다.
함께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것에 협력하는 대신, 전요한 일행을 관리하겠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민감함 내용이 언급되자 위원회장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조금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언젠가 다가올 대재앙에 대비하여 사회질서를 재편하려던 것일 뿐, 도시민의 머리 위에 군림하여 사리사욕을 채울 생각은 없습니다.”
각지에서 혼란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사회체제는 바로 소도시국가의 연합이었다.
고대시대의 그리스처럼 그 맹주국의 역할을 하는 건 바로 이곳 학원도시.
관리국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구조는 세태에 맞지 않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너희들의 이상국가를 지키기 위해 우리를 부려먹겠다는 거로군?”
“부려먹는다는 건 좀 그렇고, 모셔 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이는군요.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일이 내부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어서 말입니다.”
위원회장은 이쯤에서 한 가지 회심의 제안을 했다.
학원도시에서 발생하는 골치 아픈 사건들을 해결해주면, 책임지고 원로원과의 접선을 마련하겠단 것이다.
어설픈 회유책이었지만, 전요한은 수락했다.
“그게 좋겠네. 마침 알아봐야 할 일이 있었거든.”
“네뷸러스 말인가요? 당신과 접촉했던 그 악마도 저희의 골칫거리 중 하나입니다.”
위원회장은 그야말로 모든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협박을 하거나 위해를 가하려 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지내는 동안, 여러분은 최상위 계층의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돌아가서 그 혜택을 한번 누려보시지요.”
얼마 전에 주어진 대저택도 최상위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의 하나였다.
위원회장의 아첨과 현혹을 한쪽 귀로 흘리며, 전요한과 시르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이나 잘 지키도록 해. 안 그러면 본때를 보여줄 테니까.”
만약 허튼수작을 부릴 경우엔, 곧바로 여기를 날려 버리겠다.
그렇게 선언한 후 뒤돌아서는 두 사람을 향해 위원회장은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 * *
“오늘 소고기 파티인 거 알지? 이제 와서 내빼기 없다?”
헬스장에서 다녀온 박수호가 배고픔을 호소했다.
옆에 있던 채린과 메이도 손목시계를 바라본다.
“슬슬 고깃집 가는 게 어때? 약속시간도 다 되어가잖아.”
“조금 늦게 간다고 예약이 취소되거나 하진 않겠지만, 눈치는 보일 거야.”
갑작스러운 좀비 사태로 인해 아카데미는 잠시 휴교령을 내린 상태였다.
그래서 생도들은 위원회를 도와 게이트를 공략하거나, 필드의 몬스터들을 토벌하는 식으로 실전 경험을 쌓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할당량만 채우면 되어서 크게 부담이 되는 정도는 아니다.
“위원회에서 지급받은 돈으로 술도 한턱 쏘는 게 어때요? 뭐, 저 말고는 딱히 마실 사람이 없겠지만.”
멜리사는 그새 맥주 한 병을 비웠는지 곧바로 일행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녀는 관리국의 교섭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요원이었다.
“그렇게 마셔대면 운전은 누가 해요?”
별도의 이동수단이 없던 전요한이 눈치를 줬다.
하지만 멜리사는 걱정하지 말라며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최상위 계층은 가구마다 전용 수행기사가 있다고요. 위원회장에게 듣지 못했어요?”
그야말로 귀족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셈이었다.
호화로운 저택과 적지 않은 수준의 불로소득.
이곳에 머무르는 한, 부족함이라곤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어느 세계에나 귀족층은 존재하는군요. 이런 생활을 지원해야 하는 서민들은 적잖이 고생하겠어요.”
학원도시의 경제구조를 파악한 시르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일반 도시민의 삶도 그리 피폐한 수준은 아니었다.
“위원회의 지침에만 잘 따른다면, 이전과 비슷한 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들었어. 던전 공략 등을 통해 창출되는 수익이 적지 않다나 봐.”
휴대폰으로 정보를 검색해본 채린은 믿기지 않는단 표정이었다.
메이도 의외였는지 질문을 여러 차례 던졌다.
“대외적으로 고립된 상태 아니었어? 정부기관에게서 등을 돌린 것치고는 내부 사정이 나쁘지 않네.”
“그것도 이미 손을 써둔 모양이에요. 애초에 메르키오르 재단은 관리국의 고위층과 정계의 유력 인사들로 이루어져 있죠.”
기존의 상위 계층인 만큼, 충분히 로비를 해두고, 각 정부부처에 사람을 심어둬서 이번 사건을 덮을 수 있었다.
심지어 관리국 국장까지 침묵하는 걸 보면, 완전한 고립 상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슬슬 도착해 가네. 어젯밤에 예약해둔 곳이 저기야?”
주위 눈치만 보고 있던 박수호가 전방을 가리켰다.
겉보기에도 호화로운 인테리어의 한식집.
내부로 들어서는 사람들도 죄다 상류층으로 보인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예약된 자리에 앉자, 공손한 자세로 다가온 남직원이 메뉴판을 건네줬다.
평균적인 가격대를 본 전요한은 일시에 안색이 굳어졌다.
‘왜 이렇게 비싸?’
기껏해야 배달음식하고 기숙사 식당이나 이용했던 그로서는 기겁할 법한 수준이었다.
“왜 그래? 오늘은 모처럼 다 모였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먹자.”
“맞아요, 곧 돈벌이도 잘되실 텐데 이 정도는 익숙해지셔야죠.”
“…전 많이 안 먹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적게 먹진 않습니다.”
“이게 한국의 구이 문화인가? 뭔가 새로운 경험이네.”
“그런데, 마블링이 뭐야?”
순간,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모두의 대사와 얼굴 표정이 느려지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전요한은 고개를 떨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