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학원도시 (1)
“헉… 헉….”
말에서 추락한 오스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초원 위에 누워 있었다.
상처가 심한 것은 아니었으나 녀석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건 확실했다.
“생각보다 잘 싸우던걸? 그런 기술은 누구에게서 배웠어?”
함께 오스카를 내려다보던 에르첸이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전요한은 뭐라고 답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한테나요.”
“뭐? 하핫. 그 말은 너도 열심히 굴렀단 말이로군. 어쩐지 뭔가 동질감이 느껴지긴 했어.”
에르첸은 대미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오스카 옆에 드러누워 검은 천장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실은 우리 세계는 얼마 전에 멸망했어. 많은 이들이 죽고,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우리처럼 던전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지.”
다른 차원에 잠식당한 세계의 운명.
하지만 에르첸은 별로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저 사람이랑 엮이게 된 겁니까?”
“잘 모르겠어. 그냥 대미궁을 공략하던 도중에 말다툼을 했을 뿐인데… 함께 여기로 끌려오고 나서 이런 식으로 계속 만나버리는 악연이 되었지.”
서로 죽이라는 미션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매번 이러다가 끝난다고 한다.
다시 눈을 뜨면 새로운 무대.
그러다 보니 더욱 서로를 죽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재미있네요. 서로 싫어하면서도 죽이지 못하는 애증의 관계라니.”
“우리는 그저 사라진 세계의 잔재일 뿐이야. 이렇게 박제되어 소품으로 소모되다가 언젠가 사라지고 말겠지.”
만약 자유의 몸이 된다 해도 두 사람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던 도중, 정신을 차린 오스카가 입을 열었다.
“너답지 않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네. 저 애송이가 마음에 드나 봐?”
“시끄러워. 참견하지 말고 여자한테 러브레터나 써.”
다시금 두 사람의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쉴 새 없이 투덕거리는 소리를 한쪽 귀로 흘리며, 전요한은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읽어봤다.
[메인 미션, ‘이세계의 무법자’를 클리어했습니다!]
[기여도를 고려하여 최종적인 보상의 수준을 산정합니다!]
[경이로운 업적! ‘흥정의 주사위’를 획득했습니다!]
‘흥정의 주사위’는 망각의 고성에서도 본 아이템이었다.
안내자인 소악마와 협의하여 공략 난이도를 조정 가능하다.
슬슬 시간이 되었다 싶었을 때, 소악마가 시공의 틈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흠흠, 이제 끝난 모양이군요.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소악마는 에르첸과 오스카가 둘 다 살아 있는 것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불패의 용병대장, 라인하르트’가 여운이 남는 엔딩에 그럭저럭 만족합니다.]
[‘백룡의 기사, 시리우스’가 멸망한 세계관의 일원들이 느끼는 공허함에 깊이 공감합니다.]
[‘광휘의 무녀, 에스텔’이 흩어진 희망이 언젠가 하나로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여기는 다른 차원의 권능자들이 단지 구경하기 위해 만들어낸 유희장소.
대미궁과는 달리, 공개된 형태의 어비스 던전이었다.
여기선 멸망한 세계관의 후일담조차도 그러한 경험을 공유하는 권능자들의 대리 만족 요소가 된다.
그래서 에르첸과 오스카는 이들을 위한 소품으로서 반복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었다.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된 전요한은 소악마를 향해 한 가지를 물었다.
“멸망한 세계관의 구성원은 살아 있는 거야, 죽어 있는 거야?”
“음… 난해한 질문이군요. 생사에 대한 기준은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이거든요.”
그렇다면 단순히 의미에 달려 있다는 것인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가 받아들이기에 달려 있는 영역이라면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물론, 그전에 자신의 세계를 잃지 않는 것이 모두에게 최선이겠지만 말이다.
“어서 돌아가고 싶어.”
귀찮은 놀음에 지친 메이가 한탄을 늘어놓았다.
고개를 끄덕인 전요한은 에르첸과 오스카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이제 그만 돌아가죠. 저희가 속해 있는 현실 세계로.”
* * *
던전을 공략한 후, 전요한은 황장호가 운영하던 자경단의 일원들을 포섭했다.
사실상 가장 큰 세력이던 두 집단이 통합되자 좀비 소탕도 한층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한나의 도움으로 봉쇄령이 걸린 지역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조만간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겠네. 요즘은 좀비만 봐도 현기증이 나.”
“조금만 더 참으시죠. 저희만 예외적으로 빠져나오는 것이니,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장차 일행이 가게 될 목적지는 학원도시였다.
아카데미가 있는 지역구인데, 메르키오르 재단에 의해 눈 깜짝할 사이에 요새화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암부세력의 본거지로 들어가게 되는 셈.
멜리사와 함께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논의하던 도중, 메이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기억 안 나? 돌아가면 소고기 먹는다고 했잖아.”
“생각해보니 그랬네. 대략 다음 주중으로 모임 일정 잡으면 되겠어.”
상상만 해도 신난다는 듯이 박수호가 곧바로 맞장구쳤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모두가 일제히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확실히 소고기는 가장 활약한 사람이 사주는 게 맞겠지.”
“저번 레이드로 많이 벌었다잖아. 소고기 파티 정도는 무리 없을 거야.”
채린과 메이가 서로 마주 보며 웃음 지었다.
분위기를 탔는지 뒤쪽에 서 있던 도광진도 한마디 거든다.
“역시 유대감을 키우는 덴 회식이 제일이죠.”
…뭔가 제대로 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데 하소연하지 못하는 현실이 슬프다.
멜리사도 그런 전요한이 불쌍한지 연민의 시선을 보내왔다.
“…뭐, 잘 먹을게.”
이 정도면 거의 혼돈과 공포의 도가니다.
머리가 어지러워짐을 느끼며 전요한은 책상 앞에 앉았다.
현재 위치는 교도소의 소장실.
몰려드는 생존자들을 관리하며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여왕님! 저에게 총애의 채찍질을 내려 주십시오!”
잠시 교도소의 업무를 보고 있을 때였다.
잊고 있었던 한 인물이 문을 열어젖히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고동배.
전요한은 곤란하단 표정으로 멜리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은 언제까지 방치해둘 건가요? 혹여 최면이 풀리면 큰일 날 텐데.”
“봉쇄령 풀릴 때까진 어쩔 수 없어요. 그리고 최면은 저번에도 말했지만 어지간해선 안 풀리니 걱정 마요.”
멜리사는 이게 뭐 별일이냐는 듯이 혼자서 팔짱을 껴 보였다.
이후 그녀가 보라는 듯이 고동배의 엉덩이에 채찍을 갈겼다.
“아흐흑… 여왕님, 사랑합니다!”
이 무안한 광경을 언제까지 더 지켜봐야 하는 것일까.
채린마저 소리 없이 웃게 만드는 걸 보면 참 별났다는 생각이 든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 성적 욕망도 함께 왜곡된 것인가?
깊이 생각하면 이상해질 듯했기에 전요한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삐리리릭―
한동안 울리지 않았던 휴대폰 벨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 때였다.
드디어 전파 간섭의 원인을 제거해낸 건가.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니 관리국 요원, 이수연에게서 걸려온 전화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 그랬을 것 같아? 좀비 사태 때문에 지금까지 비상근무 상태였다고.
이수연은 불만부터 늘어놓았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넘어가고 곧바로 본론을 물었다.
“저희 일행을 학원도시에 왜 보내려는 거예요?”
- 그게 메르키오르 재단의 요구 사항이었어. 녀석들은 지금 국장님의 지시에도 불응하고 독립적인 세력을 키워가고 있어.
변이 바이러스를 통해 혼란을 일으킨 이유는, 학원도시를 구축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오래전부터 꾸며온 계획이라 넌지시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과감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고 한다.
관리국조차 함부로 대응하기 어렵단 말에 전요한은 한 가지 정보를 흘렸다.
“이곳에서 수집한 바에 의하면, 메르키오르 재단의 임원 중 누군가가 네뷸러스와 관계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 알아보시죠.”
- 그래, 알았어. 국장님에게 보고한 후 어떻게 할지 재가를 받을게.
이수연은 바쁜지 곧바로 연락을 끊었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후, 전요한은 대략적인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관리국 국장조차 눈치채지 못한 음모였던 건가.’
하지만 왠지 모르게 유명학은 알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딱히 단서는 없지만, 그의 회심에 찬 눈빛이 무언가 비밀을 담고 있었다.
“우리를 수송할 차량이 몇 분 내로 도착한다고 해. 교도소장 자리를 승계할 사람을 찾아봐.”
뒤이어 통화를 종료한 멜리사가 인수인계를 촉구했다.
전요한은 그동안 의협심을 불태워 왔던 도광진을 후임자로 선택했다.
“이곳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교도소장의 승계 의식은 약식으로 이루어졌다.
무거운 직책을 털어낸 후, 전요한은 잠시 소장실 내부의 모습을 응시했다.
박수호는 어디선가 가져온 공구를 손보고 있고, 메이와 채린은 서로 마주 보며 수다를 떠는 중이다.
‘…언제부터인가 내 주위에 많은 인연이 몰려들었군.’
이렇게 얽혀 있는 관계가 어떤 미래를 보여줄지 아직은 확신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자신이 이들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거란 사실이었다.
대미궁에서의 비극은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전요한은 주먹을 쥐어 보였다.
* * *
좀비 사태가 발생한 지 일주일 후였다.
학원도시에 도착한 일행은 위원회라고 자칭하는 자들에 의해 주거지역으로 보내졌다.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저택이 눈앞에 서 있었다.
“귀족이라도 된 기분이네.”
고민 끝에 내부로 들어서며 메이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가난한 계층에 속했던 그녀로서는 이러한 파격 대우가 놀라웠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네. 아버지를 뵙고 싶다고 여러 번 요청했는데 거절당했어.”
한편, 채린은 앞으로의 일이 두려운지 표정이 어두웠다.
전요한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주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 테니까.”
어느덧 채린을 동료처럼 여기게 된 전요한이었다.
그녀가 지닌 의지와 잠재력은 메르키오르 재단과의 결전에서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나저나 학원도시라니. 잘도 이런 방어 시스템을 구상했었네.”
배후에 엄청난 흑막이 있음을 느꼈는지, 박수호가 한마디 중얼거렸다.
멜리사는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더니, 주방의 냉장고에서 미리 비치된 맥주를 꺼냈다.
“대낮부터 음주입니까?”
“뭐, 어때요. 좀비 사태 때문에 며칠간이나 고생했는데.”
북유럽 출신답게 멜리사는 주량이 상당했다.
그녀가 유리병째로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을 때였다.
“이제야 도착한 겁니까? 잘도 늦장을 부렸군요.”
어깨에 캣시를 올려둔 채, 시르케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여전히 생도복 차림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선, 별문제는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익숙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서희 씨는요?”
“위원회의 권고에 의해 관리국으로 되돌아갔어요. 아무래도 염탐질을 할 수 있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시르케의 말에 의하면, 학원도시는 위원회라고 하는 집단을 주축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물론, 그 배후에는 메르키오르 재단이 있을 터다.
“한번 만나 볼까요. 그 위원회장인가 하는 사람을.”
항체 보유자인 강성태는 이미 관리국에게 넘긴 상태였다.
더는 사릴 이유가 없다고 여기며, 전요한은 눈을 빛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