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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84화 (84/180)

제84화. 무법지대 (6)

바실리스크는 공격이 적중할 때마다 일종의 반사 공격처럼 상대에게 독 데미지를 준다.

그러니 이전 구역에서 얻었던 용과수 열매로 독 데미지를 중화시키며 순차적인 공격을 반복해야 했다.

“확실히, 이런 녀석은 혼자서 맞서 싸우다간 원인도 모르고 당해버릴 수 있겠군요.”

“네, 게다가 상당히 강력하니 전투 시에 여러모로 주의하는 편이 좋습니다.”

간단히 공략 방법을 설명해주며 전요한은 최전방에 섰다.

그러자 바실리스크가 보석안을 빛내며 긴 꼬리로 공격을 감행해왔다.

콰아아아앙!

육중한 타격음과 함께 모래먼지가 주위를 뒤덮는다.

녀석은 제법 선전했지만 덩치 차이마저 상회하는 실력 격차를 메우진 못했다.

간발의 차로 꼬리 치기를 피해내자 눈앞의 장면이 느릿하게 흘러가며 순간 바실리스크의 약점이 눈에 들어왔다.

검 끝으로 그 부분을 여러 차례 찌르자 녀석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가 숨을 거뒀다.

“와, 이거 정말 엄청나게 많이 주는데요?”

지면에 드랍되는 골드를 보며 도광진이 입을 크게 벌렸다.

지금까지 오면서 수집한 것보다 그 수량이 더 많았기에 일행은 싱글벙글하며 전리품을 분배했다.

“사실 여기엔 비밀상점이 숨어 있습니다. 다들 눈치채셨는지 모르겠군요.”

“네? 전혀 몰랐는데요?”

“어디에 있는데요?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이는데.”

일행이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우뚱하자 전요한은 아까 지나쳐 왔던 기암괴석을 가리켰다.

도광진이 그쪽으로 다가가 움푹 파인 곳에 손을 대봤지만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바실리스크의 황색 보석이 열쇠 역할을 합니다. 일종의 자격 같은 거죠.”

다시 말하자면, 이건 중간지역에서 상대 세력과 경쟁을 해야 차지 가능한 물건이다.

하지만 일행은 진작 황장호 패거리를 몰아냈고 공략 난이도를 한 단계 낮출 수 있었다.

스르르륵.

황색 보석을 결합하자 기암괴석의 일부가 문처럼 열렸다.

그 어둑한 밑으로 이어진 계단.

일행이 함께 조심스럽게 내려가자 순례자 차림의 비밀상이 우리를 반겼다.

“어떤 물건을 보러 오셨나요?”

비밀상은 취급 중인 물품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요한은 대뜸 그에게 신속함을 요구했다.

“10골드입니다.”

비밀상이 두루마리 형태의 스크롤을 건넸다.

이것을 사용하면 10여 분간 움직임이 상승.

전투 시에 부족한 민첩 스탯을 보정받을 수 있었다.

“호오, 대단하군요.”

“이게 있으면 아까처럼 아쉽게 놓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황장호 패거리를 노릴 수 있는 기회는 아직 두 번이 더 남아 있었다.

일행을 달래며 전요한은 스크롤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 *

개울가에 뻗어 있는 돌다리.

일행은 그 너머에서 황장호 패거리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너무 힘들어.”

“이런 데서 또 습격당하지는 않을까 무섭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그런 말 좀 하지 마.”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일당은 여전히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미 한번 기습을 당해 보았기에 저들은 그간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 보느라 심신이 많이 지쳐 있을 터였다.

“여긴 레이드 몬스터가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적들과 조우하는 중간 지점은 아닌 모양이야.”

“어서 지나가자. 경쟁에서 뒤처지면 기습당할 확률이 많아진다고.”

여기가 중간 지점인 줄 모르기에 생겨나는 착오.

그리고 레이드 몬스터가 없는 건 일행이 진작 공략을 끝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황장호 패거리가 돌다리를 모두 건너자 전요한은 토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쉽게 도망치지 못할 겁니다. 확실히 처리해 드리죠.”

아까 비밀상에게서 구입했던 스크롤을 찢으며 확고한 사형 선고를 내렸다.

[‘마법 스크롤 : 신속함’을 사용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움직임이 기민하게 보정됩니다!]

황장호 패거리로서는 본의 아니게 배수의 진을 친 상황.

이번엔 도망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황장호가 비장한 응전 의사를 밝혔다.

“여기서 등을 보인 채 다시 돌다리를 건너는 건 자살행위다! 그냥 싸우다 죽자!”

그도 명색이 국내 서열 10위권의 길드장이었다.

비록 무대의 특성을 잘 몰라서 이처럼 당하는 것이지만, 전투 능력 자체는 평균을 상회했다.

황장호는 불리한 상황에 고무받았는지 미친 듯이 환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나는 이런 데서 죽을 수 없다!”

그의 주위에 있던 이들이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끼고 뒤로 물러선다.

“이노옴!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한층 기세가 더해진 신립이 전요한을 거세게 몰아붙이려 했다.

보다 못한 도광진이 도와주려 나섰으나 전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굳이 각성 모드로 돌입할 필요조차 못 느꼈다.

가볍게 몸을 피하며 상대하다가 빈틈을 노려 급소에 검신을 쑤셔 박았다.

푸욱!

황장호는 믿기 어렵다는 듯 눈을 번쩍 뜨더니, 그대로 개울가에 고꾸라졌다.

“그렇게 간단히 해치우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곁으로 다가온 도광진이 놀랍다며 칭찬했다.

이어서 잔당까지 섬멸하자, 소악마가 나타나서 난색을 표했다.

“이런, 벌써 상대 세력을 전부 없애버린 건가요? 그렇다면 무대 진행을 조금 변경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흥미 있는 전개를 원했던 녀석으로선 당연한 반응이다.

“무대 진행을 변경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음… 일단 핵심적인 요소만 다룰 거예요. 무대 설정이 무법지대이니까 그와 관련해서 짧고 굵게 가는 거죠.”

이곳은 소악마는 주인이 부재중인지 나름의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윽고 미션 정보창이 떠올랐고 일행은 그 내용을 천천히 읽어 보았다.

[메인 미션 #2]

명칭: 이세계의 무법세력

내용: 서로 맞붙는 두 집단 중 한쪽을 선택한 후 함께 상대를 제압할 것

제한: 3시간

보상: 기여도 순으로 차등 지급

기타: 실패 시 데스 매치

과연, 상대할 경쟁자가 없어지면 새롭게 불러들이겠단 의도로군.

하지만 전요한으로서도 그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세계의 무법세력이라면 어떤 게 있으려나.”

“글쎄요, 용병단? 그 외엔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해적 같은 부류일 수도 있겠네요. 이세계에도 아마 바다는 있을 테니까요.”

무법세력이란 단어와 관련해서 온갖 추측이 나돌기 시작했다.

소악마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따가 경험해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럼 화이팅!”

녀석이 결코 우리에게 친절한 무대를 마련해 주었으리라 생각되진 않는다.

어떻게든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려 할 테고, 그렇다면 하이에나처럼 전장을 떠돌아다니는 용병단이 적합한 주제겠지.

잠시 기다리자 전요한의 예상대로 중무장을 한 병사들이 나타났다.

“…이런 데까지 오게 되다니. 나도 슬슬 끝인가 보군.”

용병단장으로 보이는 적발 사내가 일행을 보더니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이름이 뭔가요? 그리고 어디 출신이죠?”

전요한은 형식적으로 인사하는 대신 간단한 신상 정보를 물었다.

적발 사내는 당돌하다는 눈빛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에르첸. 남부의 프루아르 지방에서 온 사생아다. 별명은 사냥개란 의미의 하운드.”

프루아르 지방의 에르첸.

아무래도 별로 인지도 없는 녀석일 가능성이 높은데, 반대편의 소개도 들어보고 싶었다.

“또다시 너랑 만나다니… 정말 우리는 악연이로군, 에르첸.”

마침 상대가 알아서 이쪽으로 와줬다.

이번엔 레이피어를 들고 있는 금발 사내를 향해 돌아섰다.

“그쪽은 누구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품위 있고 고귀한 마음을 지닌 미남이지. 연애를 할 땐 맑은 아침의 숲속 공기처럼 부드럽고….”

갑자기 들어 주기가 싫어졌다.

어차피 어느 쪽에 붙든 이기기만 하면 되므로 전요한은 에르첸을 선택했다.

“잘 선택했다, 꼬맹아. 저런 변태 같은 저질남과 손을 잡느니 차라리 내가 나을 테지.”

“다시 한번 실례되는 말을 하는군. 나 오스카의 명예를 더럽히려고 했다간 가만두지 않겠어. 아비도 모르고 자란 사생아라서 예의범절을 모르고 자란 것일까, 에르첸?”

양쪽 사내들의 눈빛에서 찌릿찌릿한 전기가 튀었다.

둘 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사이가 안 좋은 것은 확실하고 어서 그냥 맞붙어 줬으면 한다.

“용병단끼리 맞붙으면 당신들 세계에선 룰이 어떻게 됩니까?”

“룰? 그딴 건 없다. 마지막에 이기는 사람이 승자야.”

“아니, 승부는 정정당당해야지. 일대일 결투로 끝내는 게 최고라고. 안 그래, 에르첸?”

잠깐 이야기만 들어본 건데 서로 가치관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순간 골치 아파진 전요한은 어떻게 이들을 싸움 붙일지 잠시 고민했다.

소악마가 더는 안 나타나는 걸 보니 이것도 예정된 진행이라 할 수 있다.

“용병이면 평지에서 전면전을 하면 되잖아요. 그게 그렇게 복잡해요?”

잠자코 있던 멜리사가 따지듯 두 용병대장에게 말했다.

그녀를 본 오스카가 느끼한 미소를 짓더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오오, 눈동자가 보석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대를 향한 나의 정열은 붉게 타들어가는 석양처럼….”

뭐, 이 승부가 어떻게 되든 한 가지 확실한 결론은 내려졌다.

저 녀석이 문제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곧장 에르첸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서 의향을 물었다.

“어떤 식으로 승패를 가를 겁니까? 제 생각에도 전면전이 나을 듯한데요.”

“내 생각도 그렇다. 여자애처럼 레이피어나 휘두르며 고상한 척하는 녀석이 받아들일진 모르겠다만.”

단순히 승낙하는 수준의 문제라면 다 방법이 있다.

전요한은 멜리사의 귀에 대고 계획을 소곤댔고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아요, 해볼게요. 어차피 이기기만 하면 되는 미션이니까.”

전요한이 세운 계획이란, 조금 어이없을지 모르지만 미인계였다.

“당신, 그렇게 제 마음을 얻고 싶어요?”

“오오, 아름다운 레이디. 이 오스카는 설령 하룻밤에 지고 마는 꽃이 될지라도….”

“그럼 이쪽하고 전면전 해요. 참고로 전 당신 응원은 안 할 테니까 억울하면 실력을 증명해 봐요.”

멜리사는 어서 결정을 내리라는 듯이 팔짱을 껴 보였다.

그러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오스카는 눈빛을 빛내며 단번에 승낙했다.

“레이디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면 분골쇄신하여 싸우겠습니다.”

…역시 앞뒤가 좀 맞지 않는 인물이다.

아무튼, 룰은 정했으니 남은 건 적당한 장소를 찾는 일이다.

“대충 이쯤이 좋겠군요. 용병단의 수도 그다지 많지는 않으니까요.”

초원으로 뒤덮인 구역.

지면도 평평하고 장애물 역시 거의 없어서 전면전을 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양쪽 세력을 서로 마주 보게 배치한 후 전요한은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이건 괜히 많이 끼어들었다간 방해만 될 겁니다. 그러니 지원자 두세 명 정도만 받겠습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저도 화력 지원 정도는 해줄게요.”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명한 일원은 도광진과 멜리사였다.

나머지도 은근히 끼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으나 자리가 애매하게 남아서인지 결국 기권했다.

“반드시 승리해서 레이디에게 꽃다발을 바치겠습니다.”

백마를 탄 오스카가 반대편의 멜리사를 향해 느끼한 윙크를 해보였다.

멜리사는 크게 싫어하는 내색은 안 했으나 썩 기꺼워하는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저 남자는 신사도가 좋은 건지, 사상이 변태 같은 건지 도통 구분이 안 가네요.”

개인적으로 후자라고 생각한다.

흑마를 탄 에르첸의 옆에 선 채로 전요한은 아르티나를 들어 올렸다.

상대는 오스카를 비롯하여 총 열세 명. 한편, 이쪽의 경우 열네 명이니 거의 동수 싸움이었다.

이윽고 어디선가의 나팔 소리와 함께 양쪽 세력이 서로 맞붙었고, 승패를 가르기 위한 접전이 반나절가량 지속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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