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무법지대 (5)
지난 일자에 개최했던 대표자 회의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헌터들 중 일부가 전요한에게 붙었고 전체적으로 세력 간의 대결 구도가 명확해졌다.
황장호의 세력과 나머지 세력의 갈등을 통해서 말이다.
수적으로는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기에 서로의 영역이 겹치는 곳에선 나름 팽팽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냥 저 녀석들 힘으로 밀어버리고 싶군요. 하는 짓이 전부 얄밉습니다.”
특히 도광진은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며 황장호의 배후를 칠 기회만을 노렸다.
“일단 기다리시는 게 좋습니다. 지금 저들과 맞붙으면서 화력을 낭비하면 좀비 확산을 억제하기 어려우니까요.”
안 그래도 상황이 좋지 않으니 황장호를 처단하는 건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좀비 소탕에만 집중하던 도중,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이거… 실화인가요?”
교도소 앞의 공터에 던전 게이트가 생겨난 것이다.
같은 구역 내 거주 중인 헌터들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 근처에 게이트가 있다는 소문 들었어?”
“보급품도 부족해져 가는데, 공략을 하다 보면 괜찮은 걸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헌터들은 앞다투어 던전 공략에 참여하려 했다.
하지만 적당한 수익 분배를 위해서는 인원이 제한되는 상황.
따라서 누가 선정되느냐를 놓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내가 들어갈 거야!”
“무슨 소리! 먼저 온 순서대로 하면 1등은 나야!”
“그냥 여기서 한판 붙고 이긴 사람이 들어가는 걸로 합시다, 어때요?”
아직 좀비 소탕도 충분히 진전되지 않은 상태인데 이 같은 분쟁은 별로 달갑지 않다.
결국, 대표자 회의가 다시 개최되었고 각 구역별로 헌터 인원수에 비례해서 뽑기로 결정했다.
“혹시 던전 공략에 참여하고 싶으신 분 있습니까?”
“글쎄, 나는 딱히….”
“나도 피곤하니 기권할게.”
채린과 메이는 별로 의욕이 없는지 먼저 거절 의사를 밝혔다.
박수호도 말없이 고개를 내젓고 도광진과 멜리사만이 관심을 보인다.
“황장호 세력에게 보상을 넘겨줄 수는 없죠.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걸요? 몸이나 풀 겸 해서.”
그 외에 다른 이들도 참여하고 싶어 했으나 우리에게 할당된 인원은 6명뿐이었다.
그리고 주전력이 모두 유적지 공략에 투입되면 곤란했기에 나머지 3명은 제비뽑기로 결정했다.
“다시 한 번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공략 인원이 확정되자 도광진이 공손하게 말을 건네 왔다.
그는 국내 서열 10위권의 길드장임에도 불구하고 전요한에게는 언제나 깍듯이 예를 갖춘다.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아마 도중에 안 좋은 일들이 자주 일어날 겁니다.”
처음부터 절반씩 세력이 갈려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황장호 세력은 대부분이 하이에나이므로 방심은 결코 금물이었다.
“아무래도 거기서 전부 처리하고 나오는 편이 낫겠네요. 괜히 살려두면 여기까지 분쟁이 옮겨 오는 셈이잖아요?”
멜리사는 실력에 자신 있는지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긴, 그녀라면 황장호를 비롯한 어지간한 상위 랭커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터다.
“그럼 공략을 하러 가죠. 황장호 일행도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던전 게이트는 언제나 양쪽 세력의 감시를 받는 중이라 저들끼리 먼저 들어가 버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황장호가 이쪽을 보며 씨익 하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건 거의 대표자 회의의 연장선상이군요. 긴장하는 게 좋겠어요.”
황장호 일행 중에 그나마 특기할 만한 인물은 최태성뿐이었다.
조금 신경질적인 면이 있긴 해도 그렇게 성향이 나쁘다고만은 보기 어려운 자.
그래도 일단 저쪽에 서 있는 이상 호의를 갖기는 어려웠다.
“잡담은 이쯤 하고 내부로 진입하죠. 공략에 며칠이나 걸릴지 장담 못합니다.”
양쪽으로 갈라선 채 공략조는 유적지의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정사각형의 영역이 퍼즐처럼 다닥다닥 연결되어 있는 무대.
그 시작 포인트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 소악마가 시공의 틈 너머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무법 지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분. 저는 안내자예요.”
이제는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존재.
하지만 처음 경험해보는 이들은 많이 낯선지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뭐야, 완전히 날파리네.”
“꿀통 같은 걸 선물로 주면 도와주는 건가.”
“이야기로만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별 보잘것없구나.”
물론 이런 잡담을 하는 자들은 모두 황장호 쪽의 인원이었다.
안 들릴 듯 전부 들리는 대화 내용에 기분이 나쁠 법도 했지만, 소악마는 해맑은 표정으로 계속 무대를 진행했다.
“그럼 간단히 룰을 알려 드릴게요. 우선 여러분은 모두 무법자입니다. 그래서 행동이 자유롭지만 서로에게 견제를 받을 수는 있어요.”
“무슨 견제?”
“현상금을 내거는 거예요. 물론 그만한 골드를 가지고 있어야 하겠죠? 골드는 무대에서 보상으로 주어지니까 최대한 얻으시면 돼요.”
현상금은 한 명을 향해 여러 명이 걸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수급을 베는 자가 모든 골드를 차지한다.
매우 단순한 룰이었기에 모두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서로 싸우면 누군가에게 어부지리가 될 수도 있단 말이군.”
“혼자 너무 앞서 나가면 모두에게 견제당해서 끝장날 가능성이 높겠구나. 적당히 눈치 싸움이 필요하겠어.”
누구에게나 그럴듯한 계획은 있다.
자신이 직접 희생양이 되어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충분히 승산이 있겠다 판단하는 이들을 보며 전요한은 속으로 웃었다.
이런 식의 무대는 수도 없이 경험해봐서 벌써부터 패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다들 준비되신 듯하니 슬슬 시작하도록 할게요. 우선 두 갈래의 통로 중 하나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시작 포인트를 기준으로 좌우에 각각 하나씩의 통로가 있었다.
별로 고민할 필요도 없이 양쪽의 세력이 자연스레 갈라지며 인원 분할이 끝났다.
“오호, 정확히 반반이라 뭔가 보기가 좋네요.”
할 말을 모두 마친 후, 소악마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시작 포인트의 우측 통로로 이동하자 새로운 영역이 일행의 시야에 나타났다.
[메인 미션 #1]
명칭: 무법자의 길
내용: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자들 중 최소 한 명의 골드를 약탈하시오
제한: 10시간
보상: 약탈한 골드 순으로 차등 지급
기타: 실패 시 데스 매치
“어떻게 보면 생존 게임과 비슷하군요.”
미션 정보창을 들여다보던 도광진이 짧은 감상을 늘어놓았다.
“네, 기본적으로 피아 구분을 하고 적절히 협력과 갈등을 유도하는 것이죠.”
무법 지대의 미로 같은 구조를 살피며 전요한은 아르티나를 들어 올렸다.
“중간중간에 반대편 세력과 마주치게 되는 구역이 있을 겁니다. 그때를 잘 대비해둬야 해요.”
이번 무대는 특이하게도 골드라는 화폐 단위가 존재한다.
골드는 현상금을 내걸거나 본인에게 유리한 버프를 얻는 등 활용 가치가 매우 높았다.
“아무래도 저 몬스터들을 잡아야 골드가 나오나 보군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도광진이 중앙부에 서 있는 고블린들을 가리켰다.
녹색 피부에 작은 체구를 지닌 아인종. 지능도 낮은 편이기에 만만한 상대였다.
스걱!
스걱!
일행은 저마다 한 마리씩 고블린을 해치웠다.
총 여섯 마리였기에 분배는 공정했고 다들 별생각 없이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려 했다.
“잠깐, 이걸 챙겨 가도록 하세요.”
전요한은 알게 모르게 자라나 있는 정령초를 채취하며 모두에게 말했다.
정령초는 질근질근 씹어서 섭취할 경우 일정 시간 정신 환각에 면역 상태가 되는 연금 재료.
그것을 본 멜리사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식으로 단서를 숨겨놓는 거군요? 조금 색다르네요.”
“조금 피곤한 무대 구성이기도 하죠. 관찰력이 부족해서 한 가지를 놓치면 곧바로 생명에 위협이 되거든요.”
특유의 하드코어함이 숨겨진 게 묘한 매력이었다.
물론 전요한은 그걸 매력이라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변태 성욕과 같다 여겼다.
“끼루루룩!”
다음 구역에 배치된 몬스터는 환익조였다.
깃털이 은은한 광채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
그리고 환익조는 고블린과 달리 식량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 깃털은 뽑아서 팔면 제법 돈이 되겠는데요?”
“네,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는 비밀상을 찾아내면 후한 값에 매입해주죠.”
당분간 함께 할 터이니, 일행에게 정보는 충분히 공유해 주었다.
이들은 앞서 레이드를 함께 한 경력이 있다 보니 적극적으로 전요한의 조언을 들었다.
“비밀상이 있단 건 뭔가 희귀한 물품도 판매한다는 의미네요?”
“여기엔 뭔가 숨겨진 요소가 없는 걸까요?”
다들 기본적인 자세는 되어 있다.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여태까지 살아남진 못했겠지만 말이다.
이들을 최대한 살려야겠다 생각한 전요한은 나무 밑에 자생하고 있던 유령 버섯을 집어 들었다.
“이건 모두 섭취 시에 10여 분간 투명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대신, 적지 않은 독 데미지를 입죠.”
“오호, 여기도 숨겨진 요소가 있었군요.”
“왜 저희는 그걸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아직까지는 별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럼 다음 영역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이것도 일종의 경쟁 상황이라 상대 쪽보다 뒤처지면 생존율이 많이 떨어지게 된다.
유령 버섯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은 후 전요한은 서둘러 일행을 이끌었다.
* * *
듣기 거북한 괴성과 함께 환마종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녀석은 몇 차례 정신 환각을 시도했으나 아까 정령초를 씹어 먹었기에 아무도 이상 증세를 호소하지 않았다.
스걱!
최후의 발악을 하던 환마종이 횡참 공격에 의해 두 동강이 나버린다.
서슬 퍼런 장도를 거둔 후, 도광진은 곧바로 내 쪽을 바라봤다.
“역시 전요한 님이 하신 말씀대로네요. 덕분에 한결 공략이 쉬워지고 있습니다.”
“천만에요. 저도 도광진 씨가 거들어주니 여러모로 편합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황장호 세력과 조우할 타이밍이었다.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기 전에 전요한은 모두에게 유령 버섯을 씹어 먹으라고 권유했다.
“독 데미지는 고통스럽긴 해도 참을 만할 겁니다. 그 대가로 적들을 일망타진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감내할 만하죠.”
유령 버섯의 복용 효과는 10여 분 동안의 투명화였다.
잠시 후 일행은 일제히 놀란 반응을 보였다.
“세상에, 이런 버섯도 존재했군요.”
“지나가다 서로 부딪치지 않게 조심해야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면 딱 좋은 매복 위치네요.”
“황장호 녀석, 우리가 이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하겠죠?”
이번 구역은 레이드 몬스터인 바실리스크가 중앙에 위치하고 사방으로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즉, 여기선 다른 세력과도 마주치는 중간 지점.
일행과 함께 적당히 숨어서 기다리자 예상대로 황장호가 패거리를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 골드 벌기 참 힘드네.”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종착지에 도달하는 걸까나….”
“여긴 지도 같은 거 없어? 진행도를 알지 못하니 너무 답답하네.”
태반이 불만 섞인 말투.
아직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으나 상당히 고생을 한 흔적이 보인다.
적절한 타이밍을 노리던 전요한은 일행과 함께 일제히 황장호 패거리의 배후를 습격했다.
“크헉!”
“뭐, 뭐야!”
육안상으로 아무것도 안 보였기에 황장호 패거리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도 명색이 헌터인지라 당하지만은 않고 감에 의존하여 맞서 싸웠다.
채챙챙챙!
물론 우리가 유리한 건 사실이었기에 저쪽의 사상자만이 일방적으로 생겨난다.
“퇴, 퇴각! 일단 물러나자!”
이대로는 전멸 각이라 생각했는지 황장호가 서둘러 다음 구역으로 도망쳐 버렸다.
무대의 규칙상 이전 구역으로는 되돌아오지 못하기에 일행은 일단 안심했다.
“황장호 녀석, 어쩔 줄 몰라서 당황하는 것 보셨습니까?”
“꼴좋네요. 하지만 붙잡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녀석이 같은 패거리를 방패 삼아 버티는 바람에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요한은 씁쓸해하다가 바실리스크를 향해 돌아섰다.
“저 녀석이나 잡도록 하죠. 레이드 몬스터이니 제법 금화를 많이 줄 겁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