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82화 (82/180)

제82화. 무법지대 (4)

“후우…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대였네.”

“그러게 말이야. 왜 하필 정신조작계 능력을 지닌 기생충이어서 긴장하게 만드는지….”

이로써 한나를 곤란하게 하던 네뷸러스의 수작질은 저지했다.

하지만 좀비 사태는 여전히 문젯거리였다.

백신 개발이 언제 완료될지는 미지수로 남아 있다.

“저기, 전요한 님 맞으시죠?”

“소문만 들었는데, 정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런 말 할 상황이 아니긴 한데, 사인 좀 해주실래요?”

레이드가 종료되자 내 주위로 불청객들이 몰려들었다.

대체 이건 무슨 인기인 거지?

전요한은 멍청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다들 갑자기 왜….”

“모르고 계셨어요? 저번 레이드 이후로 유명세를 떨치셨는데.”

“거대 라트리비스를 혈혈단신으로 잡는 모습에 반했습니다.”

“너튜브에 영상 올라오고 나서 조회 수 폭발했어요. 옆에 계신 누님도 괜찮으시다면 사인 좀.”

…졸지에 꽤나 곤란한 처지가 되어버린 것 같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네, 전요한 님. 너무 멋져요!”

“이번에 발생한 좀비 사태도 거의 혼자서 해결하신 거죠?”

“여기 오기 전에 항체 보유자가 발견되었다는 소식 들었어요.”

이렇게 사석에서 관심을 사로잡는 건 난생처음이다.

헛기침을 하며 적당히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보다 못한 멜리사가 우리 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말들은 나중에 하고 슬슬 돌아가죠. 아직 남아 있는 위협 요소가 더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녀는 이번 사건으로 민감해져 있었다.

섣불리 다가오는 자들에게 경계심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메르키오르 재단의 음모를 사전에 막아내지 못했으니,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겠지.

아무튼, 지금은 정신없이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할 타이밍.

간단히 휴식을 취한 후, 일행은 지상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 * *

일행은 거점으로 확보한 교도소에 머물면서 대략 한나절 정도를 소요했다.

이후엔 좀비를 소탕하는 작업에 열을 올렸다.

“말이 많던 B구역은 이제 확실히 정리했습니까?”

“네, 며칠간 내버려 두면 다시 원상 복귀되겠지만 지금은 청결합니다.”

지도를 보며 던지는 질문에 윤길수가 차렷 자세로 보고를 올렸다.

현재 교도소 내의 서열 1위는 다름 아닌 전요한이었에 아무도 면전에서 함부로 입을 올리지 못한다.

“수고했습니다. 보급 물자 분배까지 완료하면 돌아가서 부하들과 자유 시간 보내세요.”

“네, 감사합니다.”

윤길수는 깍듯이 90도로 인사한 후 소장실을 나섰다.

사실 이건 조금 과하다 싶긴 한데, 멜리사가 한번 군기를 제대로 잡은 후 좀처럼 자연스러워질 기미가 안 보인다.

“교도소장 역할이 잘 어울리네? 뭔가 타고난 성향인가 봐.”

옆에서 조용히 구경만 하던 메이가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반대편의 채린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쟤는 남을 이끄는 스타일이야. 뭔가 주위 사람들을 안심하게 만들어주는 면이 있어.”

조금 무안해지는 칭찬들이었다.

짧게 헛기침을 한 후, 전요한은 주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아무튼, 우리에겐 5일이 남았어. 그동안 다른 세력과 협력해서 최대한 좀비의 개체 수를 줄여놓아야 해.”

치안을 유지하려면, 좀비의 개체 수는 현재 수준의 20%가 되어야 했다.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조건이었기에, 걱정과 근심으로 모두의 표정이 일시에 어두워졌다.

“좀비 확산을 억제하려면 생존자 구출도 꾸준히 신경 써야겠어.”

“결국, 백신 개발이 얼마나 빨리 완료될지가 관건이겠네.”

채린과 메이가 서로 마주 보며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한편, 이번에 데리고 온 박수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각각의 거점을 대표하는 자들끼리 한데 모여서 대책을 의논하는 건 어떻겠어?”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안 그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의견이야. 다만, 서로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 무력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겠네.”

특히 자경단장인 황장호와 육군 중령 정승식은 이미 한차례 맞붙은 적이 있으니 더 걱정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던 한 인물이 떠올랐다.

오정구.

녀석은 지하철역의 최심부에서 레이드를 할 때 몰래 도망쳤는데 현재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헌터들의 경우엔 쉽게 포섭되지 않을까? 그래도 유대감이 남아 있잖아.”

잠시 정적이 흐르던 도중, 채린이 긍정적인 생각을 내비쳤다.

그녀다운 판단.

하지만 그들도 이런 상황에선 무법자와 다름없는 행동을 일삼을 수 있었다.

“너무 안일한 생각 같아. 여긴 지금 무정부 상태이고 사실상 무법지대야.”

메이도 문제가 있다 여겼는지 곧바로 반박해왔다.

모두를 위해 전요한은 종합적인 결론을 내렸다.

“세력별 회의는 일단 시도해보자. 중간에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대표자들끼리 맞붙는 편이 피해는 더 적을 거야.”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들 모두를 일거에 제압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멜리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별일 없었어? 우연히 네뷸러스에 대한 단서를 하나 찾아서 돌아오는 길인데.”

“그게 뭔가요?”

“좀비 사태의 발원지로 추정되는 영역에서 이걸 발견했어.”

멜리사가 투명한 앰플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의약품이나 화학 약품을 담는 소형의 밀폐 용기.

그것을 본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이 떠올랐는진 어렵지 않게 추측 가능하다.

“어딘가에 질병을 퍼트리는 목적으로 운영되는 연구소가 존재하는 거군요.”

“그래, 맞아. 그리고 이건 해외에서 반입된 쪽이 아니라 국내에서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그 말은 내부 협력자가 있단 의미로군.

확실히 밀반입은 관리국의 감시가 철저해서 계획상의 위험이 따른다.

“대략적으로 위치 추정도 해보셨습니까? 한국에서 그런 것이 가능한 곳은 그다지 많지는 않을 텐데요.”

“글쎄, 일단 관리국에 알리고 나서 알아볼 예정이야.”

멜리사는 메르키오르 재단의 임원들 중 누군가가 네뷸러스와 손잡았으리라 의심했다.

그녀가 계속해서 추측을 늘어놓고 있을 때였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한나가 보낸 보안직원.

그는 전요한에게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저번 거래에 대한 결과인가요?”

“그렇습니다. 아가씨께서는 현재 여기 안 계셔서 대신 전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전요한은 간단히 내용을 눈으로 훑었다.

다행히 시르케를 비롯한 그의 지인들은 무사한 상황.

관리국과 이야기하여 조만간 그들을 이쪽으로 데려오겠다고 한다.

‘과연 봉쇄령조차 예외로 넘어가는 유력 인물답네.’

한나의 도움 덕분에 일이 한결 쉽게 진행될 것 같았다.

일단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전요한은 다음 업무를 처리했다.

* * *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도심가의 한 공터.

전요한은 원탁 앞에 앉아 각 거점의 대표자들과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당신이 교도소 쪽의 지도자일 줄은 미처 몰랐군요.”

자경대장인 황장호가 재미있다는 듯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는 전요한과 더불어 여기서 세력이 가장 큰 편에 속했다.

“저는 이 자리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툭하면 난동을 부리는 무법세력하고 대체 무엇을 논의하겠다는 겁니까?”

육군 중령 정승식이 황장호를 노골적으로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그는 저번의 알력 다툼으로 부상을 당해 왼쪽 상박에 고정 붕대를 하고 있었다.

“거, 싸울 거면 당신들끼리 싸우고… 나는 분배 문제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설마 좀비 소탕을 할당하기 위해 여기 모인 건 아니겠죠?”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소수 집단을 대표하는 민간인 한 명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난장판이 될 것 같았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모르는 사실을 하나 알려드리죠. 좀비 확산을 막지 못하면 엄청나게 곤란한 사태가 발생할 겁니다.”

순간 회의장에 정적이 흘렀다.

변이 바이러스의 위험성.

이대로 방치할 경우엔, 얼마 전에 지하철역에서 퇴치했던 상위 개체가 등장하여 혼란을 더욱 가중할 터였다.

지능을 지닌 변이체의 조직적인 움직임에 맞서려면, 일개 중대 규모의 재래식 전력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곤란한 사태가 뭔지 정확히 이야기해 주겠습니까? 같은 헌터 입장에서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지요.”

황장호가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저건 일체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연기.

국내 서열 10위권의 길드장인 그가 이 정도의 정보 수집 능력도 없을 리 만무했다.

“끝까지 치졸하게 구는군요. 당신이 그걸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황장호의 얄미운 행동이 아니꼬웠는지 육군 중령 정승식이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황장호도 삿대질을 하며 그에게 도발을 해온다.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민간인들을 닥치는 대로 총살한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요, 대대장님.”

“뭐? 우리가 언제 그런 짓을 했다고… 수용소를 운영한 건 사실이지만 즉결 처형은 좀비로 변한 자들에게만 했어!”

예상대로 두 사람 때문에 회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일단 저들을 조용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전요한은 무언의 무력 행사를 실행에 옮겼다.

살의를 품은 채 고개를 들자 무형의 뭔가가 발산되는 느낌과 함께 주위에 서슬 퍼런 위압감이 형성된다.

「광전사의 격노」.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의견차이가 좁혀지지 않을 터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놀란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군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해 보시죠. 일단 들어는 드리겠습니다.”

이번만큼은 기고만장한 황장호도 한 발짝 물러서서 경청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의 모습을 흘끗 쳐다본 후, 전요한은 모두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여나 최근 일어났던 혼란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분이 이중에 있다면 그만두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러다가 대재앙이 발생할지도 모르거든요.”

“대재앙이라면… 변이종의 출현을 의미하는 겁니까?”

황장호가 멋모르는 척 중간에 질문을 던졌다.

그 모습이 조금 고까웠으나 일단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변이종은 이미 각지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계속 방치되면 진정한 종말이 찾아오겠죠.”

“종말이라, 조금 두렵긴 하군요. 솔직히 이 자리에서 언급하기엔 거창하단 느낌도 들고요.”

황장호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끝까지 이죽거리는 태도로 일관했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잠자코 있던 한 사내가 황장호에게 경고를 보냈다.

“지금 세력이 좀 크다고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것 같은데, 여기서 살아 돌아가고 싶지 않으시면 계속 그렇게 하시죠.”

사내는 지하철역에서 전요한을 도왔던 인물 중 하나였다.

국내 서열 10위권의 사신 길드장, 도광진.

그는 나름 전요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허허,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군요. 그럼 조용히 있겠습니다.”

황장호는 여유롭게 웃어넘겼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대가 만만치 않은 존재임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탓이다.

“보급품 분배와 관련해선 각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하죠. 대신, 합심해서 좀비 소탕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정도로 강조해서 말했는데도 비협조적으로 굴면 무력 제압을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황장호의 경우 적당히 손을 봐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까 도광진에게 견제를 당한 탓인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 회의는 이걸로 마치죠. 서로 용무가 생기면 서신 등으로 직접 해결합시다.”

적당히 말을 덧붙인 후 전요한이 먼저 회의장을 떠났다.

그러자 도광진이 뒤따르며 합류의사를 밝혀 왔다.

“아무래도 전요한 님 말고는 기댈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와 세력을 합치지 않겠습니까?”

도광진은 헌터 무리들 중 상당수를 이끌고 있었다.

그의 성향도 썩 나쁘지 않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함께 단결해서 황장호의 세력을 박살 내버리죠.”

여태까지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인 걸 보면 황장호는 뭔가 이상한 꿍꿍이가 있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두 사람은 공동의 적을 쳐부수기로 결의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