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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81화 (81/180)

제81화. 무법지대 (3)

스걱!

하지만 그간 빠르게 성장을 거듭한 전요한에게 이런 허접한 시도가 먹혀들 리 없다.

아르티나로 대상을 두 동강 낸 후 미간을 찌푸렸다.

“변이된 좀비라고는 해도 보기에 너무 역겹네.”

조금 전 공격했던 개체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문드러져 있었다.

멜리사 역시 비위가 상하는지 잠깐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제대로 된 변이를 거치지 않는단 증거겠죠. 그저 본능적으로 상위 개체의 조정 능력에 기대는 거야.”

엄밀히 말해서 변이종의 아류에 불과한 좀비는 그 한계점이 명백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뭔가 결심을 한 듯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이렇게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저도 여길 최대한 서둘러서 빠져나가고 싶어졌어요.”

설마 그걸 시도하려는 것인가.

뭔가를 묻기도 전에 멜리사가 자신의 대검을 지면에 내리꽂았다.

이윽고 불꽃에 휘감긴 그녀의 대검은 거대 도마뱀과 유사한 형태로 변해갔다.

「살라맨더」.

화염계의 정령이자, 대검 그 자체이기도 한 존재다.

“…전부 불태워버릴 생각입니까?”

“네, 그러는 편이 훨씬 낫잖아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공략 속도를 앞당겨야겠어요.”

앨리스의 의지에 반응하듯 살라맨더가 기다란 혓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마침 저 너머로부터 달려들던 좀비 무리가 그 불꽃에 간단히 소각당했다.

“진작 이렇게 할걸.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요.”

이제 속이 후련하다는 듯이 멜리사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일행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 * *

멜리사의 분발로 인해 지하철역을 정리하는 작업은 가속도가 붙었다.

덕분에 변이된 좀비가 여럿 출몰하는 단계에서도 화력이 부족하지 않았다.

“저게 바로 변이종의 둥지인 것 같군요.”

질퍽한 늪으로 주위를 뒤덮은 영역을 향해 전요한이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 구심점엔 살아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알이 놓여 있다.

여러 마리의 좀비가 주위를 서성이는 중이었다.

“좋았어. 지금 당장 불태워서 없애 버리자고!”

어서 결판을 내고 싶다는 듯이 멜리사가 살라맨더를 앞세웠다.

그때, 어둑한 저 너머에서 거대한 몸체의 좀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

오정구가 말했던 우두머리 개체.

어설프게 변이하다가 망가져버린 녀석들과는 달랐다.

제법 위용도 있고 부가적인 능력도 보유 중이다.

“저, 저놈이에요! 꽤나 등급이 높은 레이드 몬스터 같은데 어떻게 상대하실 건가요?”

자신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오정구가 옆으로 비켜서며 물었다.

대답 대신, 멜리사는 우두머리 좀비를 향해 살라맨더를 날려 보냈다.

휘아아아!

하지만 우두머리는 우두머리인지, 녀석은 주먹을 휘둘러서 간단히 살라맨더를 튕겨냈다.

“여기서부턴 보디가드의 도움을 받아야겠네. 자, 돌격해!”

멜리사가 요지부동 자세로 서 있는 고동배의 엉덩이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자 고동배는 한껏 황홀한 표정을 지어 보인 뒤 곧바로 우두머리 좀비에게 달려들었다.

“여왕님을 위하여!”

이쯤 되니까 저런 모습도 위화감이 점점 사라져 간다.

오정구 역시 체념했는지 나지막이 그를 부를 뿐이었다.

“큰형님….”

하지만 이 같은 추태와는 별개로 고동배의 전투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전신을 미지의 체질로 변화시키는 체질 변환 능력으로 그는 우두머리 좀비에게 큰 한방을 먹여주었다.

퍼억!

비록 마력 실드에 의해 데미지가 중화되긴 했으나 그것도 언제까지고 지속되지만은 않는다.

고동배가 최전방에서 선전하는 동안, 살라맨더는 주위의 다른 좀비들을 깡그리 불태워 버렸다.

화르르르륵!

딱히 고동배를 배려하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그는 이리저리 잘도 불길을 피해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겠군.’

전요한은 질퍽한 늪의 한가운데서 꿈틀거리는 알을 향해 걸음을 내달렸다.

그러자 지면으로부터 빙벽이 계단처럼 솟아올랐고, 이내 아르티나의 검신이 알의 정중앙에 박혔다.

푸욱!

이로써 끝인가?

불길한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던 순간, 상처 입은 알이 폭발하며 전요한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크윽…!”

서둘러서 마력 방벽을 펼치지 않았다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을 상황.

공중제비를 돌아서 안전하게 착지한 후, 일행에게 한발 늦었음을 알렸다.

“아무래도 놈이 부화한 것 같습니다. 이건 자폭이 아니라 마력 파동이에요.”

마력 파동을 시전 가능한 건 변이종 중에서도 상위 개체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꽤나 곤란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이야기.

멜리사도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만 더 서두를 걸 그랬어요. 좀비 사태가 발생한 후로 어째 일이 잘되지 않네요.”

네뷸러스도 철저한 계산하에 준비한 계획임이 분명하다.

“아직 부화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화력을 집중하면 더 곤란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들 어서 참전해 주세요.”

채린과 메이까지 합세하면, 레이드를 하기에 충분한 전력이었다.

이후 전장의 열기는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츠르르르!

살라맨더가 혀를 날름거리며 변이종에게 불을 내뿜었다.

이어서 얼음 기둥이 솟구치며 주위를 뒤덮었고, 핏빛으로 물든 사이드가 변이종의 몸체에 내리꽂혔다.

“크르르….”

그럼에도 변이종은 좀처럼 사멸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다 느낀 멜리사가 녀석을 잠시 관찰했다.

“…설마 저게 본체가 아닌가?”

그녀의 혼잣말은 미묘한 파문을 남겼다.

전요한은 불길한 예감에 정신을 집중하여 변이종을 재확인했다.

‘다시 보니 뭔가 이상하네.’

만약 이것이 변이종의 본체라면 어떤 의지든 생명체로서의 욕구가 느껴져야 한다.

그런데 눈앞의 존재는 단순한 인형일 뿐이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며 꿈틀거리는 모습이 육안상 생동감을 주긴 하지만 그건 보여주기에 불과하다.

보통 이런 개체를 더미라고 부르는데 제대로 낚인 셈이었다.

“본체는 이미 부화하여 어디론가 숨은 듯하군요.”

전요한은 질펀한 늪으로 뒤덮인 영역 내부를 살폈다.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 걸 보면, 인지 조작 따위의 능력을 지닌 상위 개체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기생충에 가까운 존재인 모양이네요. 여태껏 저희가 눈치채지 못한 것도 이상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변이종의 진정한 정체를 파악한 멜리사가 살라맨더를 불러들였다.

살라맨더는 몸을 움츠리더니, 다시 대검의 형태로 되돌아왔다.

그녀가 실력 행사를 하려던 찰나, 바깥쪽으로부터 누군가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대체 뭐지?”

“저 안쪽에서 누군가 싸우는 것 같은데?”

어디선가 나타난 헌터들.

저들도 불확실한 정보를 주워듣고 지하철역 내부로 진입한 것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더라도, 이번 레이드에 한해선 그저 방해꾼만 될 것 같다.

“린, 저 사람들은 못 들어오게 막아.”

“응….”

고개를 끄덕인 채린이 빙벽을 세워 통로를 봉쇄했다.

조용히 떠나주길 바랐으나, 그 기대와 달리 불청객들은 빙벽을 다짜고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결계석인 것 같으니 일단 부숴보자!”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그냥 되돌아갈 수는 없지!”

이러면 쓸데없이 마력만 낭비하는 꼴이다.

채린이 곤란해하자 결국 전요한은 빙벽을 해제시키도록 했다.

“이번엔 어쩔 수 없겠다. 죽든 말든 내버려 두자고.”

“…응.”

이후 빙벽이 사라지자 불청객들이 곧바로 일행을 발견했다.

“어? 저 사람들 주둔지에서 마주친 적 있지 않아?”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본 적 있는 것 같아.”

다들 주위 정황을 통해 분위기가 심각하단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끼어들 거라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레이드 대상이 까다로우니 각오는 하시길.”

다시 레이드에 집중하기 전, 불청객들을 향해 짧은 경고를 남겼다.

“후방 지원은 맡겨줘! 최대한 엄호할게!”

채린이 시간을 벌겠다며 빙결 마법을 시전했다.

곧, 우두머리 좀비의 하반신이 일시에 얼어붙었고 멜리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검을 휘둘렀다.

“화력이라면 나도 질 수 없지!”

맹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불길이 우두머리 좀비의 상반신을 뒤덮는다.

이어서 핏빛 사이드를 휘두르는 메이.

최후의 한 방은 전요한이 먹이기로 했다.

“하아아아아!”

이윽고 우두머리 좀비의 복부에 커다란 공백이 생겨났다.

그동안 최전열에서 어그로만 끌던 고동배가 다시 한번 커다란 한 방을 날린다.

퍼어어억!

미지의 체질로 변화한 주먹이 우두머리 좀비의 머리를 세차게 내리찍었다.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가자 불청객들도 녀석을 포위한 채 각양각색의 스킬을 퍼부었다.

콰콰콰쾅!

여기까지만 보면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듯한 레이드다.

하지만 아까도 언급했듯, 상대는 결코 만만한 변이종이 아니다.

어떤 식의 「인지 조작」으로 아군을 속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려 할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슬슬 미래시가 발동될 시기인데 말이지.’

전요한이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우두머리 좀비의 심장부에 붉은 기운이 떠오른다.

‘설마 이거 변이종이 저 위치에 있다는 말인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황당했지만, 절호의 기회임은 틀림없으므로 곧장 녀석을 향해 나아갔다.

기생충 쪽이라면 다른 숙주를 찾을 가능성도 있으니 즉사시키는 걸 목표로 해야겠지.

그 경우엔, 일격에 베어내어 승부를 내는 파사월섬이 제격이다.

“크르르!”

발도 자세를 취하며 눈앞에 서는 전요한.

안 그래도 화가 나 있던 우두머리 좀비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물론, 전요한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속 서 있었다.

파사월섬은 검신에 오러를 응집시킨 후 정면에서 적과 맞서는 형태로만 발동된다.

휘이이이익!

곧, 다부진 주먹이 전요한의 머리 위로 엄습해왔다.

만약 제대로 적중당하면 아무리 그라도 무사하지 못할 위력.

긴장감에 심박수가 늘어날 법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전의만이 솟구친다.

‘이런 위기감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해주지!’

발동 조건은 모두 만족되었다.

의식과 심상을 현실과 일치시킨 순간, 창백한 번뜩임이 눈앞의 우두머리 좀비를 횡참했다.

스걱!

결정타를 허용하고 나자빠진 우두머리 좀비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정예 몬스터이긴 해도 결국 좀비는 좀비. 본연의 저급함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츠르르르.

조그마한 변이종이 깔끔하게 절단된 우두머리 좀비의 심장부에서 기어 나왔다.

녀석에게도 치명상이었는지 더는 인지 조작으로 모습을 감추지 못한다.

“저 녀석이 우리를 가지고 놀았던 거군요. 기회가 있을 때 지금 당장 없애버려야 합니다.”

골치 아픈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음을 강조하며 멜리사가 대검을 치켜들었다.

마무리를 하지 않고 잠자코 서 있던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게 바로 함정입니다.”

“…네?”

“보기엔 별 볼 일 없을지 몰라도 저 녀석은 「정신지배」를 사용할 수 있는 상위 개체입니다.”

아까 마력 파동을 일으켰던 것도 그렇고, 절대 만만히 봐선 안 되는 녀석이다.

거듭하여 주의를 주자 후위에 있던 채린이 내 의사를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위험한데.”

“이번 문제는 아마도 메이가 해결해줄 거야.”

구체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옆에 서 있는 메이를 빤히 쳐다봤다.

메이는 자신의 존재가 부각되어서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피의 권능을 사용하란 거야?”

“응, 그걸로 녀석을 구속하고 있어야 처리하기 쉬워.”

“알았어. 뭐,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특별히 부탁은 들어줄게.”

메이는 정신을 집중하더니 사이드에 혈력을 끌어모았다.

이후 선혈의 파도가 몰아쳤고, 그것은 변이종이 꿈틀대는 곳까지 날아갔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마법진은 변이종의 정신 스킬이 완전히 봉쇄당했다.

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인 전요한이 가까이 다가가 단검을 들어 올렸다.

푸직!

기분 나쁜 체액을 튀기며 서슬 퍼런 검신에 꿰뚫린 변이종.

녀석의 움직임이 완전히 정지하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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