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무법지대 (2)
‘조금 길들이기 어려운 녀석이 나타났군.’
귀찮은 상황이 예상되었다.
오정구는 본능에 충실하고 모험을 선호하는 유형.
권위에 복종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보상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했다.
따라서 고동배처럼 큰형님 노릇은 못 할지라도 그 밑의 행동대장 역할엔 제격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어이, 무슨 일이야? 설마 우리 말고 다른 집단이 있어?”
뒤늦게 낌새를 챈 최태성이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그에게 오정구와 관련한 정보를 흘렸다.
“저자는 이쪽 지역구의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흉악범입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골치 아파질 상대죠.”
“…젠장. 여기서 무법 세력을 만나다니 운이 지지리도 없군. 일단 우리 세력부터 불러 모아야겠어.”
현재 최태성이 일행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재결집한 후 일행은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이봐, 좀 곤란한 상황에 마주치긴 했는데 서로 필요한 것만 챙겨서 떠나는 게 어때? 굳이 손해만 보며 싸울 필요는 없잖아?”
자경단 무리의 앞쪽으로 걸어 나온 최태성이 공격 의사가 없단 표시를 보였다.
그러자 오정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우리도 너네 상대할 여유 없어. 못 본 걸로 할 테니 물자 분배는 공정하게 하자고.”
이렇게만 진행되면 일행으로서는 최선의 결말이다.
그런데 하필 마지막 순간에 오정구의 시선이 전요한 쪽으로 머물렀다.
“어, 잠깐. 저 자식 윤길수 패거리 아니야?”
“그 옆에 있는 놈도 교도소에서 분명히 봤어.”
“둘 다 신참내기인데 줄 서라고 꼬드기니까 포섭된 모양이야.”
오정구는 윤길수와 맞붙느라 당시 교도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정확한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반대편의 이목이 일시에 전요한에게로 집중되자 최태성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얘네들 우리 자경단 소속이거든? 교도소는 용무가 있어서 잠시 들렀던 것 같은데 너무 오해하지 말아주라.”
“웃기고 있네. 이게 지금 단순한 오해로 보여?”
“너희 소속일지라도 윤길수랑 붙어먹은 건 확실해. 안 그러면 왜 교도소에서 난동을 피웠겠어?”
“너네는 그냥 보내줄 수 있는데 저 둘은 안 돼. 이렇게 만난 이상 끝장을 한번 보자고!”
오정구 패거리는 화가 난 표정으로 일제히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본 최태성이 자경단을 뒤로 물리며 우리와 거리를 뒀다.
“미안하다. 아무래도 너네 일인 것 같으니까 잠시 빠져 있을게.”
그렇게 해서 2 대 7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최태성에게 강성태의 신변을 맡겼다.
“그 애만 돌보고 있어주세요.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비록 수적으로 열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쪽이 불리한 건 전혀 아니었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채린과 메이도 참여 의사를 밝혔다.
“나도 도울게.”
“가만히 있을 순 없지.”
고개를 끄덕인 후, 전요한은 오정구 패거리를 향해 가벼운 도발을 했다.
“한꺼번에 덤비시죠. 시간 아까우니까요.”
“뭐, 뭣이?!”
“어린놈이 아주 겁이 없구나!”
“지금 우리가 우위인 거 안 보여?”
오정구 패거리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일제히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곧, 압도적인 전력에 의해 역으로 학살당하기 시작한다.
스걱!
둔탁한 절단음과 함께 한 차례 피 보라가 일어났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손쉬운 상대로군.’
저들도 헌터이긴 하지만 그래 봤자 눈앞의 작은 이익이나 좇는 소인배들이다.
쓸 만한 이능력 한두 개 얻었다고 범죄를 저지르다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일 뿐.
죽었다 깨어나도 전요한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왜 이렇게 강해?!”
“특히 저기 장검 든 녀석, 아무래도 상위 랭커 같아!”
뒤늦게 깨달았더라도 이미 늦었다.
굳이 살려두고 싶지 않았기에 전부 베어 넘겼다.
졸지에 오정구만이 배후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 이런 미친….”
오정구는 현재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목에 검 끝을 갖다 대며 전요한은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을 죽여선 안 되는 이유를 한 가지라도 대보시죠.”
딱히 살려주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다.
하지만 녀석이 쓸모 있는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몸소 나서기까지 했는데 이대로 참수를 하긴 조금 아깝다.
차가운 눈초리로 노려보자, 오정구는 벌벌 떨면서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시, 실은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조, 좀비들이 지하철역의 최심부에 둥지를 트고 자기들끼리 변이를 하고 있습니다.”
지하철역의 최심부.
변이하기 시작한 좀비들의 둥지였다.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고급 정보다.
아르티나를 목에서 거둔 후, 전요한은 사색이 된 오정구를 향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당장 거기로 안내해.”
* * *
지하철역을 수색하기 위해 자경단 무리와는 잠시 헤어졌다.
사실상 개인행동에 가까웠지만 최태성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앞서 오정구 패거리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이리라.
“지하철역의 최심부엔 왜 진입했던 거지?”
오정구를 홀로 앞세운 채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며, 전요한은 개인적인 의문점을 물었다.
녀석은 혹여 뒤에서 찌르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다른 지역구로 넘어가는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봉쇄령이 내려졌지만 지하철은 혹시 비밀 통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요.”
그 정도는 충분히 납득 가능한 판단이다.
아무리 자유의 몸이 되었어도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시가지에 계속 머무르긴 싫었겠지.
의도는 확인되었으니 이제 오정구의 남은 역할은 둥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것뿐이다.
“둥지에서 정확히 뭘 보았다고 했지? 변이를 통해 태어난 좀비들의 우두머리?”
“부, 분명 정예 몬스터라고 부를 만한 개체가 있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자세히 확인하지 않고 도망쳤지만요….”
오정구는 평소의 모습답지 않게 완전히 기가 죽어 있었다.
실력 격차가 너무 크다 보니 모험 선호의 성향보단 권위 복종의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런데 좀비가 둥지를 튼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네. 본래 좀비는 지능이 없지 않아?”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채린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말대로 좀비는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 공동체 의식이 있는 건 아니었다.
따라서 둥지를 튼다는 게 어불성설이지만 그 역의 명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처음부터 둥지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어. 누군가에 의해 그들이 모여들 만한 성소가 마련된 것이지.”
“그렇다면 이것도 네뷸러스라는 놈들의 짓인가? 하긴, 녀석들이 그냥 좀비 바이러스만 유포하고 떠났을 리 없지.”
네뷸러스가 모든 것의 원흉이란 점이 확실시되자, 옆에서 함께 걷던 메이가 이를 갈았다.
전요한은 그녀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녀석들이 굳이 이쪽 지역구를 노린 이유는 자신 때문일 수도 있다.
“형, 무슨 생각 해요?”
“아니, 아무것도.”
골치 아픈 생각은 잠시 접어두는 편이 좋겠다.
강성태를 흘끗 내려다본 후 전요한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어두컴컴한 지하철역의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뒤편으로부터 선명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또각.
정적에 휩싸인 지하철 통로라서 그런지 더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걸음.
그녀의 정체는 멜리사였다.
지하철역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직후, 교도소에 잠시 다녀오는 길이다.
“그쪽은 별일 없었어요?”
“네, 제가 끼어들지 않아도 별일 안 일어나겠던걸요?”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멜리사가 불만이냐는 듯이 팔짱을 껴 보였다.
이후 그녀의 배후로부터 나타나는 예복 차림의 사내.
그는 다름 아닌, 일전에 우리가 다함께 제압했던 고동배였다.
“…….”
한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 희끄무레한 표정이 조금 이상하다.
주의 깊게 살펴보니 고동배는 일종의 최면에 걸려 있었다.
“이런 녀석에게 잘도 「자기암시」를 걸어 놓았군요.”
“뭐, 한나의 도움을 좀 받았죠. 고자가 되는 것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더라고요.”
멜리사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넘겼다.
“…중간에 최면 풀리면 책임 못 집니다. 알아서 처리하세요.”
“후후,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요. 절대 반항하지 못하게 확실히 조련해 뒀으니까.”
당장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이 가죽 채찍을 꺼내 드는 멜리사.
그녀가 고동배의 아랫도리를 후려갈기자 민망한 상황이 벌어졌다.
“죄송합니다, 여왕님! 제발 고자만은 만들지 말아주세요!”
그 반항적이던 고동배가 무릎을 꿇고 멜리사를 향해 노예처럼 싹싹 빌기 시작한다.
이를 목격한 오정구가 순간적으로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크, 큰형님….”
오랫동안 윗사람으로 모셔 왔던 자에 대한 이미지가 단번에 박살 나는, 충격적인 현장.
무안함을 느낀 전요한은 한차례 헛기침을 한 후 그만하라는 의사를 밝혔다.
“알겠으니까 이만 가죠. 여길 완전히 정리하려면 제법 시간이 소요될 겁니다.”
“어머, 같은 남자로서 안타까웠나 보네? 다음엔 좀 더 재미있는 역할극을 보여줄 테니 기대해.”
멜리사는 겉보기와 달리 조금 취향이 이상한 면이 있었다.
그래도 아군 전력으로선 충분히 도움이 되는 상대다.
함께 수색 대형으로 통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어둑한 저 너머로부터 좀비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아아악!”
“크아아아!”
아직까진 지상에서 봐왔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개체.
하지만 심층부로 들어갈수록 변이된 놈들이 점점 많아질 터였다.
본격적인 공략을 시작하기 위해 나는 마검 아르티나를 들어 올렸다.
“초입부 정도는 단숨에 돌파하도록 하죠. 저희 전력이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요.”
좀비들이 모여 있는 둥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서 알고 싶단 생각이 든다.
이윽고 좀비 무리가 달려들면서 전투가 벌어졌고 거친 폭발음과 서슬 퍼런 절단음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 * *
지하철역의 어두운 통로는 흡사 미궁 형태의 던전을 방불케 했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악취와 불결한 기운은 오감을 혼란시키고 뭇사람의 판단력마저 흐려지게 만든다.
“으으… 더는 못 견디겠어….”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던 채린이 참지 못하고 결국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녀에게 딱히 해줄 것이 없었기에 전요한은 짧은 위로만을 건넸다.
“조금만 참아. 얼마 안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테니까.”
길 안내를 하는 오정구의 말에 의하면 확실했다.
한편, 고동배는 멜리사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여왕님, 부디 하찮은 저에게 관용의 채찍질을 베풀어 주소서.”
…저 녀석, 여주인에게 복종하는 걸 즐기는 취향이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멜리사가 조련에 성공한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크, 큰형님….”
혼자서 앞서 걷던 오정구가 눈물을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이 민망한 상황이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던 전요한.
화제를 바꾸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는데, 여기에 둥지를 튼 것은 좀비라기보단 변이종인 것 같습니다.”
넓은 의미로 보면 좀비 또한 변이종의 하위 개념에 속한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변이종의 둥지로 몰려드는 것일 테지.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멜리사가 수긍하는 반응을 보였다.
“네뷸러스의 짓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좀비들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키게 한 후에 변이종이 부화할 시간을 벌 생각인가 봐요.”
변이종은 일반적인 좀비보다 더 까다로운 존재였다.
기본적으로 지능이 있는 데다 군집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위 개체는 전투력이 막강해서 헌터들도 레이드를 해야 하는 대상이 많다.
“좀비들도 징그러운데 변이종은 대체 얼마나 더 구역질 나게 생긴 걸까.”
끔찍한 상상이 떠오르는지 메이가 몸서리를 쳤다.
이후 그녀는 핏빛으로 물든 사이드를 휘둘렀고, 지하철역의 통로는 다시 한번 지저분하게 변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변이종은 정말 다양한 유형이 있어서 일일이 약점을 파악하기도 어려워.”
따라서 애초에 현실 세계로 뿌리내리지 않도록 하는 편이 최선의 대비책이었다.
중심부 즈음 도달했다 싶었을 때였다.
기분 나쁜 뭔가가 천장으로부터 철퍼덕하고 떨어지며 배후에서 기습을 가해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