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무법지대 (1)
한나 앨리슨.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에도 유일하게 바깥 통행을 허락받은 이능력자다.
그녀가 머무르는 5성 호텔은 임시 피난처와 다소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잠시 멈추십시오.”
“무슨 목적으로 왔습니까?”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무질서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철저한 호위를 받고 있다니.
과연, 세계적인 기업가의 장녀다운 생활이었다.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사전에 연락을 드렸습니다만.”
전요한은 멜리사만 대동하고 이곳으로 온 상태였다.
사내들은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들어오십시오.”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들은 모두 「프리메이든」의 보안사원들이었다.
전부 이능력자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관리국 요원 못지않은 전력의 소유자들이다.
보안사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두 사람은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5성 호텔이라 그런지, 실내의 구조와 인테리어가 호화스럽기 그지없다.
‘사업 문제로 여기에 머무르고 있었나보군.’
한나 앨리슨이 어떤 인물인지는 대충 들었다.
「물질변환」이라고 하는 특수능력이 있는데, 21세기의 연금술사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똑똑.
귀빈실에 도착한 보안사원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얼마 후,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후후…. 네가 바로 소문의 그 아이구나.”
의자에 앉아있던 금발 여인이 머리를 살짝 숙이며 한 손으로 선글라스를 내려 보였다.
왼쪽은 푸른색, 오른쪽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 색이 서로 다른 오드아이.
“저에 대해서 이야기라도 들으셨나보죠?”
“당연히. 「프리메이든」의 정보력을 무시하지 마.”
한나는 검은 스타킹의 늘씬한 다리를 꼬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보안사원들을 뒤로 물리고는, 메이드에게 접대를 준비시킨다.
“차나 한잔하지 않을래? 바깥 상황이 어수선하긴 하지만, 딱히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건 아니잖아?”
이번 사태로 얼마나 많은 피해가 발생하든 별로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발끈한 멜리사가 입을 열었다.
“혼란이 지속되면 당신의 사업에도 방해가 될 텐데요? 한국에 대규모 신소재 산업단지를 구축하려던 것 아니었나요?”
동아시아의 강대국 중에서 한국은 유례없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게이트 너머로 다녀온 이능력자들이 각종 유물이나 광물 따위를 앞장서서 가져온 덕분이다.
한국은 이러한 변화에 신속히 적응했고, 정부 주도하에 유능한 연구진을 다수 포섭한 상태다.
전례가 없는 국내의 인프라를 활용하여 기술 혁신과 산업혁명을 달성하는 것이 바로 「프리메이든」의 목표.
한나가 한국에 내방한 이유는 결코 가볍지 않은 성질의 것이었다.
“후후. 관리국 특수요원이라 잘 알고 있네. 「브룬힐데」라고 했던가? 저돌적인 북유럽계치고는 제법 머리를 쓰는 편이야.”
한나는 재미있다는 듯 멜리사를 쳐다봤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이라, 보기에 썩 좋지는 않은 모습이다.
“일단 홍차 두 잔부터 주문해 주시죠. 가능하다면 적당한 디저트도 함께요.”
말을 마친 전요한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이런 유형의 상대에겐 조급함을 보일수록 협상이 불리해지는 탓이었다.
“너에겐 어떤 칭호를 붙여야 할까? 최소한 저 여자와 동급이니 적당한 게 필요할 텐데.”
“마음대로 부르시죠. 그런 것에 딱히 연연하진 않아서.”
“음… 알에서 깨어난 후에 유명세를 떨쳤으니, 「이카루스」가 어떻겠어?”
그녀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멜리사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저었다.
“걔는 비운의 인물이잖아요. 비행 도중에 밀랍으로 만든 날개가 녹아서 추락사했죠.”
“뭐, 그렇긴 하지. 하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잖아? 인류에게 하늘을 날 수 있단 희망을 전해 줬으니까.”
끊임없이 한계에 도전하려는 인간의 도전 정신.
그것은 본질적인 잠재력을 각성할 때, 날개의 형태로 발현된다.
그렇기에 한나에게 있어 이카루스는 실패자가 아니라, 선지자였다.
“어쨌든, 저희는 항체 보유자를 데리고 있습니다. 관리국 같은 정부기관과 접촉이 필요한데, 메신저 역할을 해주실 수 있나요?”
슬슬 시간이 되었다 생각한 전요한은 본론을 꺼냈다.
그러자 한나는 흥미로운지 눈을 빛냈다.
“무질서한 상황을 최대한 빨리 끝내겠단 건가? 남겨두고 온 동료도 걱정되니까?”
그녀가 말하는 동료란, 시르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내의 정보망을 통해 이미 전요한의 주위 인물에 대해선 전부 조사해놓은 상태다.
“적당한 거래라고 생각하는데요. 당신은 정부기관에 도움을 준 셈이 되니까요. 후일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겠죠.”
“기회를 얻는 거란 말이지? 그런 식으로 설득해올 줄은 몰랐네.”
검은 선글라스를 벗은 한나가 이쪽을 똑바로 응시했다.
오드아이라 그런지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눈빛.
미묘하게 오가는 신경전이 잠시 벌어졌다.
“어때요, 거래에 응하시겠습니까? 이렇게 훌륭한 윈윈 전략은 흔치 않은데요.”
전요한은 결단을 촉구하듯 한나와 눈을 마주 봤다.
한나는 이색적인 연성 능력을 사용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테이블 위에서 만지작거리던 회중시계가 황금빛으로 변하더니, 다시 본래의 은색 메탈 재질로 되돌아온다.
“확실히, 이쪽에 불리한 부분은 없네. 하지만 한 가지 더 조건을 내걸겠어.”
한나는 끝내 수긍했지만 원하는 게 더 있어 보였다.
그녀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어 보인다.
“혹시 이 표식에 대해서 알고 있어?”
역으로 반전된 오각성이 중심부를 이루는 마법진.
사진 속의 그건 바로 악마 숭배와 관련된 비밀 단체, 「네뷸러스」의 상징이었다.
“대미궁에서 자주 봤죠. 죄악의 사도들이 주로 쓰는 건데, 여기선 처음 보네요.”
“이놈들이 내 사업을 방해하고 있어. 그러니까, 함께 퇴치해 줬으면 해. 레이디의 어려움을 모른 체하진 않겠지?”
한나는 마치 자신의 기사가 되란 듯이 말했다.
영국 출신이라 그런지 괜히 신사숙녀 타령이다.
“좋습니다. 대신, 제 동료들의 안전은 확실히 확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다면, 최대한 힘을 써볼게. 나도 그 이세계인과 나누고 싶은 대화가 많거든.”
이로써 거래는 성사되었다.
메이드가 문을 열어주자, 전요한은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조만간 다시 뵙죠.”
흘끔거리던 멜리사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한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물론, 그렇게 될 거야.”
안 그래도 언젠가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상대다.
인연이 닿아서 수고를 덜었다 여기며 한나는 홍차를 홀짝였다.
* * *
“이제 뭐 할 거죠? 한나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 좀비 소탕에만 집중할까요?”
차량의 운전석에서 내리며 멜리사가 물었다.
“네. 그리고 백신 개발엔 시간이 걸리니 당장 필요한 보급품도 더 마련해놓을 생각입니다.”
말을 마친 후 전요한은 교도소에서 가져온 지도를 펼쳤다.
그러자 현재 위치한 지역구의 구체적인 정보가 시각적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혹시 생존자 집단의 다른 거점을 찾는 건가요?”
“네, 지금쯤이면 한정된 자원을 두고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겠죠.”
긴급 피난처에 오래 머무르지 않으려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욕구 불만족 상태인 헌터들 사이에 껴서 서로 싸우기보단, 이참에 마련한 거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편이 낫다.
“한나의 의뢰를 수행하기에도 그 편이 낫겠네요.”
“물론입니다. 네뷸러스는 이능력자 집단이 상주하는 곳을 최대한 피하려 할 테니까요.”
보급품 확보를 위해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레 마주치게 될 터였다.
무법지대에서 활동하는 불순한 무리도 포함해서.
“말이 나온 김에 이번 탐색 임무에 자원하죠. 어차피 저희 거점으로 가려면 거쳐 가야 하는 경로니까요.”
헌터 무리와 협조하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이탈하여 교도소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좋은 생각이네요. 이런 상황에선 부지런히 움직이는 편이 정보 파악에도 좋죠.”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가지 탐색을 준비했다.
좀비 사태로 인해 난장판이 된 현재 상황에서 물자를 확보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부에서 낙하산을 이용해 상공에서 떨어뜨리는 보급품을 수거하는 것.
나머진 인근의 상점이나 공장 따위를 터는 것이다.
군용 트럭을 타고 이동하면서 일행은 폐허가 된 도시의 광경을 담담히 바라봤다.
그동안 영화에서 즐겼던 세기말의 모습과 전혀 차이점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처참함.
최근에 이렇다 할 던전 재해가 일어난 적이 없었기에 더욱 그렇게 여겨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
방탄 헬멧을 착용한 강성태가 옆에서 심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녀석은 생이별한 가족이 내심 걱정되는 모양이다.
“그 꼬맹이는 왜 데려온 거야? 덕분에 우리만 귀찮게 되었잖아.”
어깨에 대검을 기대고 있던 헌터가 투덜대듯 말했다.
녀석의 이름은 최태성.
자경단장인 황장호의 부하 중 한 명이고 실력은 대략 중위권 정도 되었다.
“저희만의 사정이 좀 있습니다. 피해는 안 끼칠 테니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하세요.”
“나 참, 봉쇄령 내려져서 이러고 있는 것도 억울한데 보모 노릇까지 해야 하다니….”
최태성은 좀비 사태로 인한 혼란 때문에 상당히 민감한 상태였다.
현재 동행 중인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
말은 안 해도 온갖 짜증과 분노가 서려 있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외부와의 교신은 계속 시도하고 있는 겁니까? 보급품 확보만큼이나 중요한 일인데.”
괜한 다툼이 벌어지는 걸 피하기 위해, 전요한은 적당히 화제를 돌렸다.
조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최태성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전파가 안 통하는 문제라서 그 원인이 되는 곳을 찾고 있어. 조만간 답이 나오겠지.”
이런저런 정보가 내부적으로 나오고 있을 때였다.
일단의 좀비 무리가 돌연 군용 트럭에 달라붙었다.
“어서 떨어뜨려!”
“여러 마리가 물고 늘어지면 속도 느려진다!”
양쪽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던 헌터들은 안간힘을 쓰며 좀비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차량 내부에서 속성 마법이나 전투 스킬 따위를 잘못 시전하면 곤란하다.
단순무식한 방법을 동원하는 편이 바람직했다.
다행히 좀비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제압되었고 일행은 한시름 걱정을 내려놓았다.
“후우… 차량으로 이동하는 것도 어지간히 불편하네.”
이물질이 묻은 대검을 군용 트럭 바깥쪽으로 털어내며 최태성이 다시금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물자를 이송하려면 이 같은 상황은 불가피한 일.
그냥 어쩔 수 없는 처사라고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
“인근의 마트까진 아직입니까?”
“거의 다 왔어. 도로가 뚫려 있었으면 진작 도착했을 텐데 빌어먹을 좀비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 거야.”
그동안 여러 구역을 돌아다니며 소탕했는데도 개체 수가 줄어들지 않는다.
이건 신규 감염자가 지속적으로 생겨남을 의미한다.
짐작하건대, 거점화된 피난처 중 내외적인 취약점으로 인해 붕괴한 곳도 적지 않을 것이다.
최태성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군용 트럭이 끼이익 하며 멈춰 섰다.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니 익숙한 간판의 대형마트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런데 유리창이 깨져 있는 등 멀쩡한 데를 찾기 어려웠다.
하긴, 심각한 재난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약탈당하는 곳이 생필품 가게라고는 한다.
“이미 다른 놈들이 털어갔네.”
“그래도 들어가 보자. 물건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한꺼번에 가져갔겠어?”
아직 좀비 사태가 일어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헌터들은 기대감을 버리지 않았다.
이윽고 전투 대형을 갖춰서 어둑한 내부로 들어서자 정처 없이 서성이던 좀비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제기랄, 여기에도 있잖아?”
“일단 전부 처리하자!”
“혹여 불이 붙을 수 있으니까 화염 마법 같은 건 사용하지 마!”
다시 한번, 소모적인 좀비 소탕이 시작되었다.
동행한 헌터들과 함께 한창 전투를 벌이던 와중에 외부로부터 한 무리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왜 이렇게 시끄럽지?”
“안쪽에 사람이 있나 본데?”
“우리 대신 정리해주는 거네. 지금 들어가지 말고 잠시 기다릴까?”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저들도 식료품 따위를 얻기 위해 마트를 찾은 모양이다.
구석지에서 덤벼드는 좀비를 간단히 베어 넘긴 후 전요한은 입구 쪽을 관찰했다.
무장한 일단의 무리가 머뭇거리며 떠드는 중인데 최선두에 서 있는 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오정구.
윤길수와의 세력 싸움에서 패배한 후 교도소를 떠났다는 녀석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