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교도소의 폭군 (3)
“당신 같은 성범죄자는 다신 아랫도리를 못 쓰게 만들어 버려야 해요.”
“절대 도망 안 치고 말도 잘 들을 테니 제발 그것만은….”
“뭐, 일단 얌전히만 있으면 살려는 드릴게요.”
불안에 떠는 고동배를 향해 멜리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일행은 소장실을 나섰다.
“크, 큰형님이 고자가 된다니….”
“거 장난이 좀 심하네. 협박을 해도 왜 하필 그 부위를….”
포박당해서 바깥쪽 통로 구석에 내팽개쳐 있던 일당이 큰일 났다는 듯이 수군거린다.
확실히 민감한 주제이긴 했나 보군.
죽일 거면 죽이라는 태도로 일관하던 고동배마저 숨죽이게 만들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수용동의 C구역을 향해 가고 있을 때, 메이가 한 가지 정보를 말해줬다.
“아까 작업동을 지나쳤을 때, 개조된 차량이 있었어. 이따가 탈출할 때 써먹으면 좋을 것 같아.”
시가지에서 좀비들이 날뛰는 상황이었다.
적당히 개조된 차량이 있으면 생존자 이송에 도움이 된다.
메이가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확인한 후,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이따가 확인해보자.”
마침 이곳의 작업반장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작업동의 중간 관리자, 장대현.
공구를 들고 정밀한 기계를 수리하는 것이 제법 쓸모가 있어 보였는데, 죽이지 않았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중간 지점인 B구역을 지나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거, 오정구 씨!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니오!”
상당히 격양된 어조인 걸 보니 아마도 내부적인 파벌 다툼일 가능성이 높겠다.
잠시 멈춰 서서 인파가 몰려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서로 마주 본 채 기 싸움을 벌이는 중인 두 사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뭐가 너무해? 시비는 너네 애들이 먼저 걸었는데 왜 억울한 척 적반하장이야!”
고동배의 휘하에 있는 일당 중 2인자의 서열을 다툰다던 인물들.
바로 오정구와 윤길수였다.
“우리 애들 말로는 그쪽에서 먼저 책임 전가를 했다는데?”
“혼나기 싫어서 거짓말한 거겠지. 딱 보면 견적 안 나와? 장사 하루 이틀 해보시나.”
“참 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더니… 토착 세력이라고 매번 고개 숙여주니까 이제 내가 당신 부하로 보이시오?”
“그러면 늦게 들어온 네가 나보다 서열이 높아? 하긴, 그동안 내부 정리한다고 관계가 좀 애매하긴 했지.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누가 우위인지 판가름을 내보자고!”
점점 언성이 높아지던 두 사내는 결국 일대일 승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모처럼의 싸움 구경이 재미있었는지 옆에 있던 메이가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과연 누가 이길까? 나는 오정구가 더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오정구는 주무기가 쌍검이고 윤길수는 날이 조금 휜 장검이었다.
무구의 상성은 딱히 어느 쪽이 우세라고 보긴 어렵고 실제로는 숙련도 차이가 결전의 승리자를 결정지을 터다.
‘아무래도 윤길수가 유리해 보이긴 한데.’
결과까지 지켜볼 여유는 없었기에 걸음을 재촉했다.
“내버려 둬도 우리에게 유리해질 테니, 항체 보유자를 찾는 일에나 집중하자.”
아무래도 오정구는 여러모로 고동배와 비슷한 점이 많아서 다루기가 어렵다.
한편, 윤길수는 그와 대조적인 성향의 소유자이니 필요에 따라 나름의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이윽고 C구역의 진입 구간에 도달하자 멋모르는 경계자들이 다가와 우리를 막아서려 했다.
퍼억!
퍼억!
대화할 시간조차 아까웠기에 곧바로 제압하여 기절시켰다.
“여기가 격리 대상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구나. 감염 위험이 있는데 그냥 들어가도 괜찮겠어?”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는 헌터니까 면역력이 일반인보다 높아.”
변이 바이러스라고는 해도, 아직까지 헌터 출신의 좀비는 발견하지 못했다.
굳건하게 닫혀 있는 철문을 열고 내부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수감실에 갇혀 있는 생존자들이 도움을 요청해왔다.
“제발 살려주세요!”
“저는 감염자가 아니에요!”
저들에겐 미안하지만 더 중대한 임무가 있기에 절실해 보이는 시선을 외면했다.
내부를 살피고 있을 때, 문득 구석지에 수그리고 앉은 한 소년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래시가 발동하여 푸른 기운에 휩싸여 있는 것이, 심상치 않다.
“…….”
소년은 별로 살고 싶은 의욕이 없는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뭔가 희귀한 특질이 있을지도 몰랐기에 말을 걸어 봤다.
“너, 이름이 뭐니?”
“…강성태요.”
“좀비한테 물린 적 있지?”
“네.”
“얼마나 됐어?”
“하루 넘었어요.”
그렇다면 거의 좀비 사태가 벌어진 직후에 감염되었다는 이야기다.
헌데도 아직까지 이상 증세를 보이지 않는다는 건….
“설마 얘가 항체 보유자야?”
별 기대는 안 하고 있었는지 메이가 놀랍단 반응을 보였다.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주위 생존자들도 저마다 모여서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항체라면 백신 개발에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럼 저 아이를 연구소로 데려가면 우리가 치료받을 수 있단 말인가요?”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해! 어이, 뭐 하고 있어! 어서 이 사실을 외부에 알려!”
한 줄기의 빛처럼 희망이 생기자 달아오르는 분위기.
전요한은 서둘러 강성태를 수감실에서 꺼내 줬다.
“좀비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지 못하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니?”
“세상이 멸망하나요?”
“비슷해. 이곳처럼 나쁜 어른들이 각 지역의 질서를 주도하게 될 거야.”
메르키오르 재단의 음모는 곧 다가올 대재앙에 대비하여 사회 체제를 재편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안전한 곳에서 모든 혼란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적당히 알아듣게 설명하자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후 그는 통로 저편을 가리키며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길 안내를 해줘요. 저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 * *
강성태는 항체 보유자란 점을 제외하면 평범한 아이였다.
좀비 사태가 발발하던 시각에 그는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던 중이었다.
이후엔 급한 마음에 혼자 도망치다 그만 좀비에게 물려 버렸다고 한다.
“근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뭔가 이상하긴 했어요. 제게 정말로 항체가 있는 걸까요?”
뒷좌석에서 이야기를 계속하던 강성태가 문득 질문을 던져 왔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우리는 교도소의 작업동에서 개조한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단순히 잠복기가 길다기엔 이상한 점이 많아. 그러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보통 백신 개발 기간은 얼마나 되요? 너무 늦어버리면 아무 의미 없잖아요.”
“중대 사안이니 어떻게 해서든 단기간에 일을 끝내겠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문제는 외부로부터의 협조가 얼마나 빨리 이루어지느냐였다.
긴급 피난처를 방호 중인 중령 정승식에게 찾아가는 편이 가장 확실할 터.
그렇게 생각했건만,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군부대는 온통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잖아.”
잔해만 남아 있는 터를 둘러보며 채린이 믿을 수 없단 반응을 보였다.
불과 한나절 사이에 이런 참사가 발생하다니….
전요한으로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이, 거기는 뭐 하러 훑어봐? 빌어먹을 군인 놈들은 우리가 전부 쫓아냈는데 말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근처에 있던 헌터들이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그제야 우리가 없었을 때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서서히 파악되기 시작했다.
“헌터와 군인이 여기서 한바탕한 겁니까?”
“그래, 자꾸 통제만 하고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 양 행세하길래 아예 몰아내 버렸어.”
역시나.
상황이 혼란하다 보니 어디서나 내분이 끊이질 않는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외부와의 연락 수단은 당장 하나밖에 없는 셈이다.
계속해서 군인 욕을 해대는 헌터들의 뒤를 따르며 전요한은 대화를 시도했다.
“현재 관리국하고 연락은 되는 상황인가요?”
“정체불명의 전파 간섭 때문에 직접적으로는 아직 못 해봤다. 하지만 보급 헬기의 전단지 살포를 통해 일방적인 통지는 내려왔지.”
“그게 뭐죠?”
“봉쇄령을 유지할 테니, 문제 해결에 협조해 달라더군. 피해는 나중에 보상해 준다는데, 도움이 필요한 건 지금 당장이라고.”
예상대로 상당히 소극적인 대처였다.
좀비 바이러스가 전국적으로 발생했다면, 관리국으로서도 신경 써야 할 게 많겠지.
하지만 항체 보유자가 나타났단 소식을 들으면, 이쪽에 적극 협력해줄 것이다.
“모스 부호 따위를 사용해서라도 이 사실을 알려주세요. 그래야만 혼란을 빨리 끝낼 수 있습니다.”
“…알았어. 우리도 노력해볼게.”
자신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라 여겼는지 헌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어디론가 떠난 후, 전요한은 눈앞의 지휘 초소를 응시했다.
여긴 헌터들이 새롭게 구축한 수뇌부인 것 같다.
누가 권력을 쥐고 있을지는 대충 예측이 간다.
“어서 오시죠, 저희는 이번 재난에 대응하기 위해 결성된 자경단입니다. 뭐, 어떻게 보면 사실상의 헌터 조합이기도 하고요.”
경계초소 내부로 들어서자 기사복 차림의 사내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황장호.
그는 국내 서열 10위권의 길드인 이카루스를 이끄는 유명 인사였다.
“헌터 조합이라… 아무런 개념 정립도 되지 않았던 극초반에 쓰인 단어군요.”
“그렇긴 하죠. 당시엔 관리국은커녕 길드도 없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들 막공으로 유적지를 공략했습니다.”
막공이란 아무렇게나 막 모은 공격대란 의미였다.
이 또한 조금은 구시대적인 용어인데, 정규 인원으로 편성된 공격대인 정공과 대비된다.
그리고 그 정공이 길드의 형태로 진화하기 전까지 존재하던 것이 바로 헌터 조합.
다시 말해서, 헌터 조합은 토벌청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일종의 지역별 공동체였다.
“그럼 자경단장님이라 불러야겠군요. 아니면 조합장님?”
“우리는 자경단장으로 정했습니다. 이곳의 자치를 총괄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자신의 지위를 강조하며 황장호는 슬며시 전요한의 눈을 바라봤다.
여기서 별일 없이 지내고 싶으면 아무쪼록 잘 보이라는 무언의 압박.
황장호의 거만한 태도가 거슬렸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경단장님.”
“허허, 별말씀을. 여기선 모든 물자를 공정하게 분배하니 질서 유지에만 잘 기여하시면 됩니다.”
황장호는 아직 특별히 전요한에게서 원하는 것이 없어 보였다.
간단한 인사치레 후 전요한이 지휘 초소를 나왔을 때였다.
“드디어 찾아냈어! 외부와의 연락을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을!”
잊고 있었던 박수호가 헐레벌떡 이쪽으로 뛰어왔다.
“그 방법이 뭔데?”
“특별히 예외 조치를 받은 이능력자가 있대! 그녀를 보내면 서신이라도 전달할 수 있을 거야!”
어째서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바깥으로의 통행이 가능한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전요한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줘. 지금 당장.”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