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변이 바이러스 (2)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좀비들을 처리하는 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녀석들이 엄폐물 따위에 가려져서 아예 보이지 않으면,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여기 숨어 있었네.”
“이쪽에도 기어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잘 찾아봐. 또 어디엔가 짱박혀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다 보니 저번 던전부터 함께 다니게 된 3인이었다.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던 멜리사도 졸지에 담당 교관 노릇을 하고 있다.
“아무리 이능력자라도 좀비에게 물리면 감염의 위험성이 있어요. 최대한 안전을 확보하면서 돌아다니세요.”
이능력자의 면역력은 일반인보다 몇 배 높은 편이지만 전요한의 절대면역만큼이나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어쩌다가 좀비들이 다시 창궐하게 된 걸까? 저번엔 악마들의 짓이었다는데, 혹시 이번에도?”
채린이 걱정거리를 늘어놓았다.
멜리사는 그녀의 그늘진 표정을 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은 메르키오르 재단이 고의로 혼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정보가 들어오긴 했어요.”
“네? 설마 그런 반인륜적인 짓을 아빠가….”
채린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녀의 집안이 메르키오르 재단을 떠받치는 주요 기둥 중 하나였던 탓이다.
“딱히 몰아세울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마음의 각오는 단단히 해두는 게 좋아요.”
만약 모든 게 사실이라면 채린 역시 이용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정략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가 아니라, 초월적인 가능성을 지닌 이능력자로서.
“린에게 나쁜 짓을 하려 한다면, 단단히 혼쭐을 내주겠어. 누구든 말이야.”
앞장서서 좀비들을 소탕하며 전요한이 의지를 불태웠다.
이번 사태로 벌써 수백여 명의 사상자가 났을 터다.
지역구 내의 모든 업무가 마비되고 봉쇄령이 내려진 상황.
이런 혼란을 일으킨 녀석들은 전부 찾아내서 뿌리를 뽑아내야 했다.
“이렇게 피해가 큰 건 저번 좀비 사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지?”
얌전히 사이드를 휘두르던 메이가 질문을 던졌다.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근 몇 년간의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요.”
“그럼 메르키오르 재단의 인물들이 악마들과 손을 잡은 거 아니야?”
메이는 이러한 악의가 인간의 욕망을 넘어섰다고 덧붙였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전요한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어쩌면 타인을 짓밟고 그 위에 군림하려는 욕구가 점차 커진 걸지도 몰라.”
경제적 부유함과 귀족적인 생활로 인한 쾌락도 점차 무뎌지기 마련이다.
무질서와 혼란은 그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새로운 여흥을 즐기게 해준다.
마치 중세시대의 성처럼, 하나의 도시국가를 만들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다든지.
이세계에서 비롯된 재해에 대비하며 먼저 자리를 잡으려는 선구안마저 엿보인다.
“어? 여기 아까 정리하고 지나온 곳 아니야?”
잡담이 오가던 도중에 메이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생존자가 떨어뜨린 것으로 보이는 음식물.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데 수상쩍은 냄새가 짙게 풍겨 왔다.
“직접 살펴보고 올게.”
은밀히 접근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전요한은 일행을 멈춰 세웠다.
가끔씩 보이는 흔적을 따라 추적 한 결과, 컨테이너 박스로 둘러싸인 공터에 다다랐다.
‘박수호를 데려왔으면 적당히 미끼로 써먹을 수 있었을 텐데.’
잡일을 좀 시킨다고 주둔지에 남겨둔 것이 좀 후회되었다.
아무튼, 상대는 질 나쁜 불한당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생존자를 납치할 만한 녀석들은 그리 많지 않아.’
추적해오며 발견한 흔적들은 이것이 납치 사건임을 암시한다.
잘은 몰라도, 무슨 일인지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다.
‘저번에도 악마들이 죄악을 강림시킨다고 산 제물을 붙잡아 놓았었지.’
일단 혼란이 일어나면, 그로 인해 새로운 무질서가 파생된다.
마치, 깨진 유리창의 법칙처럼.
안 그래도 좀비들 때문에 어수선한데 죄악의 사도까지 날뛰면 곤란하다.
전요한이 온 감각을 곤두세운 채 걸음을 옮길 때였다.
“으음?”
저 너머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휘리리릭!
곧바로 내던진 단검이 허공을 찢으며 녀석의 은폐 장소를 향해 날아갔다.
티잉!
단검이 뭔가에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나서 곧장 도주하는 그림자가 보인다.
치열한 추격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거기 서!”
조무래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움직임이 민첩하다.
컨테이너 박스 위를 가볍게 뛰어넘어 가로지르는 모습이 비범하기까지 하다.
도주 경로가 용의주도해서 쉽사리 쫓기 어려웠다.
“그래도 어림없다!”
이깟 잔머리에 계속 농락당할 전요한이 아니었다.
거리가 점차 좁혀지자 상대는 고개를 돌려 견제 수단을 사용했다.
휘이익!
연막 수류탄이 날아오며 짙은 연기를 퍼트린다.
전요한은 눈을 질끈 감았지만, 추격을 포기하진 않았다.
시각이 제한되면 다른 감각을 이용하면 되니까.
혀를 내두를 정도로 끈질기게 뒤를 쫓자 녀석도 안 되겠다 여겼는지 걸음을 멈췄다.
“과연 듣던 대로 보통내기는 아니군요. 왜 이리스가 대미궁에서 당신에게 목숨을 잃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릴 정도로 중성적인 목소리.
뒤돌아서 이쪽을 바라보는 사내의 실루엣을 향해 나는 입을 열었다.
“하얀 마녀의 이름을 아는 걸 보니 너도 마족인가 보군?”
“그렇습니다. 의외의 사건이 발생해서 구경하러 온 건데, 당신까지 만나다니. 우연도 보통 우연이 아니군요.”
의외의 사건이라.
마치 이번 혼란과는 관련이 없다는 말투다.
그래도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을 터.
상대가 마족인 것을 확인한 이상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아르티나를 들어 올린 채 다가가자 사내는 그러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이런, 잘 생각하는 게 좋아요. 여기 있는 아가씨가 자칫하면 황천길로 갈 수 있으니 말이죠.”
“읍읍….”
로프에 의해 사지가 꽁꽁 묶여 있는 여인의 신음이 회색 연막 너머에서 들려온다.
이후 얼굴이 보이게끔 사내가 그녀를 이쪽으로 밀어냈다.
“…….”
암막이 너무 짙어서 여전히 시야엔 실루엣만 있지만, 딱히 아는 사람 같진 않다.
“후후, 고민되시나요? 여태껏 정의의 사도인 척하다가 이런 딜레마에 빠지니 매우 곤란하시나 보네요.”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는지 사내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전요한의 입장이 곤란해졌으리라 생각하며, 요구 조건을 늘어놓으려 한다.
“뭐, 협상 정도는 해드릴 생각이 있습니다만. 혹시 관심이라도 있으신가요?”
하지만 전요한은 녀석의 농락에 당할 생각이 없었다.
위험 부담은 조금 있지만, 인질로 잡힌 여성의 목숨을 구원해 주기로 했다.
“그거 알아? 이런 식으로 날 협박한 놈들은 전부 죽었다는 거.”
“한번 해보시죠. 저는 오히려 협상이 결렬되는 쪽이 더 기대가 됩니다.”
사내는 이 기회에 전요한의 능력의 본질을 가늠해볼 참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콰콰콰쾅!
어디선가 얼음 가시 넝쿨이 날아와 사내를 덮쳤다.
채린의 빙결 마법.
각성한 상태라서 그런지 파괴력이 대단했다.
“큭!”
빙결 마법을 받아내느라 일시적으로 사내에게 빈틈이 생겨났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전요한은 여자 포로를 향해 도약했다.
“하아, 그건 안 되지요!”
사내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단검을 뽑아 들어 여자 포로의 뒤를 찌르려 했다.
망설이지 않는 걸 보면, 처음부터 심기를 건드리기 위한 희생양으로 점찍어뒀던 모양이다.
중대한 순간이었기에 각성 상태에 돌입했다.
그러자 사내의 상대적인 거리, 단검을 찌르는 각도, 노리는 부위 등이 보이기 시작한다.
티잉!
몇 수 앞을 내다본 단검 투척.
사내는 다시 한번 스스로를 방어해야만 했다.
그 대가로 여자 포로를 해하려던 걸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런, 이런….”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사내는 멀찌감치 뒤로 물러났다.
안타까운 감정을 드러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무리하게 여직원의 목숨을 앗으려고 하다간 많을 것을 잃게 될 터.
차라리 자신의 정체를 안전하게 숨기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사내에게서 도주할 기미가 보이자, 전요한은 내버려 두고 여자 포로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으신가요?”
“흑흑….”
품 안으로 들어온 여자 포로가 눈물을 흘리며 극한의 두려움을 호소했다.
입에 물려 있던 재갈을 풀어 줬는데도 말을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정신적 충격이 컸나 보다.
“예의 없는 방해꾼 때문에 흥이 깨져 버렸군요. 그럼 다음에 또 만나도록 하죠.”
재차 공격을 가하려는 채린을 뒤로한 채, 사내가 작별 인사를 했다.
허공에 던져진 작은 상자로부터 무수한 꽃잎이 쏟아져 나와 주위를 뒤덮는다.
“도망치기 전에 막아야 해요! 어서!”
무슨 속셈인지 눈치챈 멜리사가 달려오며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모두가 다가갔을 때, 사내는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이번에도 코앞에서 놓쳐 버리다니, 정말 짜증나네요.”
바닥에 흩뿌려진 꽃잎들을 멍청하게 내려다보며 멜리사가 혼자 망연자실했다.
그녀의 말로는, 이전부터 뒤쫓아 왔던 마족이라고 한다.
여자 포로의 구속을 풀어주고 나서 전요한은 입을 열었다.
“그리 속상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쪽도 단서는 얻었으니까요.”
“무슨 단서?”
“자세히 보시면 바닥에 작은 혈흔이 남아 있습니다.”
얼음 파편에 스쳐서 생채기가 났던 것 같다.
이것만 있어도 사내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 터다.
녀석은 인간의 몸을 빌려서 활동하는 중이니, 혈흔도 충분한 단서가 될 수 있었다.
“확실히, 수확은 있었네요.”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도록 하죠. 상대는 주도면밀한 자이니 너무 서두르지 않는 게 좋아요.”
제법 잘난 척 까불고 사라졌으나 불행히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후일을 기약하며, 전요한은 주저앉은 채 울먹이고 있는 여성에게로 돌아섰다.
* * *
인질로 붙잡혔던 여성의 이름은 이설아였다.
별다른 특이점도 없고, 그저 평범하게 일상을 영위해 나가던 일반인.
하지만 사내와 접촉한 증인이었기에 그녀와 좀 더 대화를 나눠 보기로 했다.
“혹시 범인의 신상 파악에 도움이 될 만한 걸 보셨습니까? 사소한 거라도 말씀해 주세요.”
“…무대 가면을 쓰고 있었어요. 체구는 조금 작은 편이었고요.”
이설아는 당시의 악몽 같은 기억이 떠오르는지 한차례 몸서리를 쳤다.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긴 안전지대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무튼,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만약 구출되지 못했다면 저는 지금쯤….”
감정에 복받쳤는지 다시금 울먹이는 이설아.
전요한이 위로하고 있을 때 멜리사가 불쑥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이야기는 다 끝났어요? 저도 조금 할 말이 있어서 말이죠.”
그녀가 든 쟁반 위엔 야채수프가 담긴 그릇과 소박한 차림의 다과가 놓여 있다.
아마도 저번에 놓친 사내와 관련하여 추가적인 질문을 하려는 모양이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는 옆쪽 간이 막사에 있으니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세요.”
“네, 정말로 감사드려요.”
이설아는 조신한 몸짓으로 일어나 전요한을 배웅했다.
간이 천막에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메이가 혀를 내둘렀다.
“너는 주위에 여자가 너무 많은 것 같아.”
“…오해야, 오해.”
정말로 얼굴이 개연성인 걸까.
외모가 훤칠하게 역변한 후로, 예상치 못하게 여성들과 자꾸 엮이는 것 같다.
전요한은 고개를 세차게 흔든 후, 주위를 한번 돌아봤다.
이번 사태로 인해 갈 곳을 잃고 몰려든 사람들이 저녁 준비를 위해 화로에 불을 피우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서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 거야? 빨리 아카데미로 돌아가고 싶은데.”
“쉽게 예측하기 어려울 것 같아. 좀비 바이러스가 생각보다 확산되어서 인력이 부족해.”
게다가 최근 잠잠하던 마족까지 나타나서 신경 쓸 게 많아졌다.
눈을 질끈 감으며 검지로 관자놀이를 짚는 전요한.
그는 메이와 함께 일행이 모여 있는 화로 앞에 앉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저번에 요리 경연대회 했던 기억이 나네. 다들 우승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잖아.”
지글지글 끓는 부대찌개를 내려다보며 채린이 추억 돋는 이야기를 해댔다.
그러자 옆에 있던 메이가 사이드에 기댄 채 맞장구를 쳤다.
“맞아. 묵은지 등갈비찜. 그 부드러우면서도 풍성한 식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
메이는 은근히 미식가 기질이 있었다.
평소에도 음식을 꽤나 가려 먹는지, 옆에 놓인 건어포는 입에 대지도 않는다.
“뭐, 부대찌개도 충분히 맛있으니 오늘은 이걸로 만족하자.”
충분히 익었다고 생각한 전요한이 먼저 국자를 들었다.
그릇에 한 가득 떠서 건네주자, 메이는 조심스럽게 시식을 해봤다.
“부대찌개도 맛있는 것 같아.”
간단한 평가였지만, 충분히 만족한 표정이다.
뒤따라서 맛본 채린도 합격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음식점을 차려도 되겠는 걸? 노숙하며 먹는 식사치곤 훌륭해.”
당연한 말이지만, 이쪽 지역은 모든 업무가 마비되어 배달 음식을 시킬 수가 없었다.
만약 옆에 정서희가 있었으면 울상을 지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전요한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번에 무사히 되돌아가면, 모여서 맛있는 걸 사먹자. 모처럼의 뒤풀이 파티도 아쉽게 무산되었으니까.”
“어떤 걸 사먹게?”
조금 기대가 되는지 메이가 빼꼼 고개를 든다.
“글쎄. 좀 더 생각해보자. 메뉴는 천천히 정해도 늦지 않으니까.”
“나는 한식으로 먹고 싶어. 이쪽의 문화도 경험해볼 겸 해서.”
메이는 자신의 바람을 밝혔다.
이왕이면 전통 음식이 좋겠다는 말에, 채린이 후보군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음,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나름 해외의 평이 좋은 건 떡갈비도 있고, 육전도 있고….”
문득 쓸데없는 고민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셋이서 잡담을 나누는 동안, 그간 잊혀 있던 존재가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박수호.
녀석은 전요한의 지시로 이런저런 물품을 모아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에효, 왜 나만 이 고생이야.”
하지만 자청해서 동행하는 것이니 번거로운 일은 도맡아서 해야 한다.
어서 빨리 강해지고 싶다며 박수호는 눈물을 찔끔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