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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73화 (73/180)

제73화. 변이 바이러스 (1)

“예상대로 무사히 돌아왔군.”

“하지만 희생자가 조금 발생했어. 이번 일로 해외지부와 조금 마찰이 일어날 것 같네.”

메르키오르 재단의 임원들이 저마다 소감을 말했다.

제단형의 던전에 아카데미 우등생들을 투입한 결과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하고 있었다. 그보다, 다음 계획을 서둘러 진행하고 싶군.”

의장 자리에 앉아 있던 서창곤이 새로운 안건을 제의했다.

강경파인 채강준은 기다렸단 듯이 찬성표를 던졌다.

“좋은 생각이군. 안 그래도 우리의 계획을 눈치챈 움직임이 보이고 있어.”

관리국의 개들이 아카데미 교정에 슬금슬금 기어 들어오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예상했던 바였기에 이사회 임원들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우리의 사업에 정당성이 부여되려면 적당한 「혼란」이 필요하네. 지금쯤이면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겠지.”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는 법이네. 위협적인 재해가 일어나야만, 비로소 사람들은 ‘구원’을 찾지.”

대다수가 다음 단계로의 이행에 동의하고 있었다.

변이 바이러스.

저번에 기승을 부렸던 좀비의 유전자를 연구하여 한층 강화된 위협 요소를 만들어낸 상태였다.

이것을 고의적으로 퍼트려 광역적인 재해를 일으키고, 국내의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다.

“자제들은 미리 불러들여도 되네. 어떻게 하겠나?”

“나는 거절하도록 하지.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말이야.”

유독 채강준만이 딸을 방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고태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린은 자네의 딸이기도 하지만, 이쪽의 입장으로선 예비 며느리네. 어째서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 거지?”

“아무래도 딸아이에게 좀 더 성장할 기회를 줘야 할 것 같아. 마침 좋은 자극제도 곁에 있는 모양이고 말이야.”

채강준은 끝내 자신의 본심을 밝히지 않았다.

잠시 실랑이가 일자, 서창곤이 중재에 나섰다.

“그렇다면 이번에 한해서는 자네 딸의 바람대로 하도록 하지. 아카데미 최상급의 전력인 만큼, 앞으로의 ‘실험’에도 좋은 데이터를 제공해줄 테니까.”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행해지는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고태석은 매우 유감인 표정이었지만, 다수의 의견 앞에서 결국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딸까지 소모품으로 이용하려 하다니. 정말 지독한 놈이군.’

단지, 마음속으로 혀를 차며 안타까워할 뿐이다.

“오늘의 회의는 이만 마치도록 하지. 이번 혼란은 꽤나 오래 지속될 테니, 「요람」에서 만나도록 하세.”

단결을 공고히 하자는 의미로 서창곤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를 따라서 다른 임원들도 같은 동작을 하며 결의를 부르짖는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더라도, 이곳에만큼은 완벽한 낙원을 완성하세!”

“우리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는 그 날까지!”

“전진, 또 전진만이 있을 뿐이네! 미래로의 희망찬 도약을 위해!”

메르키오르 재단의 음모는 이제 막 본격적으로 시작한 터였다.

그들이 바라보는 모니터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담은 앰플들이 의문의 사내들에 의해 옮겨지고 있었다.

* * *

던전 공략을 마친 후, 전요한은 인근 도시의 한 펜션에서 뒤풀이를 했다.

곧바로 아카데미의 기숙사로 되돌아가기엔 아까웠던 탓이다.

“혼란으로 여러 명이 죽었는데, 이래도 되는 걸까.”

바에 앉아서 커피잔을 기울이던 채린이 어두운 기색을 보였다.

옆에 서있는 멜리사가 활짝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에요. 이런 모임을 갖는다고 해서 그들을 모욕하는 것도 아니고요.”

앞으로의 나날만을 생각하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권리이자 의무였다.

메이도 그녀의 지론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와서 우울해져 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그럴 바엔 자유롭게 오늘 밤을 즐기겠어.”

펜션으로 온 인원은 최상위 성적을 기록한 1조 뿐이었다.

나머지는 피곤하다느니, 부상을 치료한다느니 하는 이유로 먼저 가버렸다.

“우리끼리라도 잠시 주어진 여유를 만끽하자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지도 모르니까.”

전요한은 별생각 없이 새로운 사건을 예고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다급히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 헉….”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잠시 나갔다가 들어온 채린이 허리를 숙인 채 숨을 헐떡인다.

“왜 그래?”

“지금 시가지에서 좀비들이 날뛰고 있어!”

갑자기 뜬금없이 좀비라니….

전요한은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혹시 저번처럼 반구체의 결계가 이쪽 지역을 뒤덮었어?”

“…아니, 그런 건 못 봤어. 갑자기 어디선가 좀비가 튀어나와서 보행자를 물어뜯고 난리 피우는 중이야.”

채린은 직접 확인해 보라는 듯이 현관문 바깥을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인 전요한은 몸을 일으켰다.

“일단 다 같이 나가서 안전지대를 찾아보자. 여기 숨어 있기만 하면 고립되어서 더 골치 아파질 거야.”

도시의 경우 인구 밀집도가 높은 편이다.

그렇다 보니, 전염성이 높은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면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된다.

크아아악!

문밖을 나서자, 좀비 한 마리가 도로를 가로질러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한다.

푸욱!

아직 갈 길이 멀었으므로 단검을 투척해서 단번에 움직임을 제압했다.

이건 마력을 주입해두면 원격 회수가 되니 제법 편리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인근 일대가 완전히 마비된 것 같은데….”

주위의 좀비 무리를 향해 빙결 마법을 시전하며 채린이 물었다.

얼음 가시 넝쿨이 휘둘러지며 개체 수를 상당히 줄였지만 그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우선 GPS로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보자. 목적지는 그 후에 정해도 늦지 않아.”

방향성을 잃게 되면, 이동경로가 비효율적으로 낭비되기 마련이었다.

좀비들의 시선을 최대한 피하며 전요한은 은신처로 적당한 후보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순간 게이트가 열린 줄 알았네.”

“관리국은 뭐 하고 있어? 전염 속도가 너무 빨라서 대책 마련이 시급해!”

안 되겠다 싶어 나선 이능력자들이 시가지를 청소하며 저마다 투덜거린다.

여긴 그나마 헌터 전용 주거지역이라서 늘어나는 좀비들을 억제 가능하다.

“으으… 속이 메스꺼워….”

지저분한 시가지의 모습에 비위가 상했는지 채린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등을 도닥이고 있을 때, 멜리사가 입을 열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이 모양이네요. 일 때문에 오긴 했어도 조금은 여유 부리고 싶었는데.”

그녀는 모처럼의 이국 생활을 낭만적으로 즐기고 싶었다고 한다.

“신세 한탄할 때가 아닙니다. 근처에 긴급 피난처가 있는 모양이니 그리로 가죠.”

“그래요. 안내해줘요.”

사태의 심각성 때문인지 대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지도 어플로 안내되는 경로를 따라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과속하던 승용차가 사거리에서 나타나 별안간 일행을 덮치려 했다.

삐이이익!

뒤늦게 경적이 들려오자 다들 좌우로 황급히 흩어졌다.

유일하게 멜리사만 가만히 있다가 자신의 대검을 콘크리트 바닥에 찔러 넣었다.

이후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진홍색의 오러.

승용차는 굉음과 함께 그 앞을 들이받았다.

콰앙!

이후 망가진 건 폭발을 일으키며 산화한 승용차뿐이었다.

“그냥 피해도 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만.”

“귀찮아요. 흥분해서 막 밟아댄 운전자 잘못이기도 하고요.”

북유럽의 여전사들은 전부 이런 식으로 스릴을 즐기는 건가.

아무렇지 않게 대검을 뽑아 드는 멜리사를 보며 전요한은 혀를 찼다.

“운전자는 즉사한 것 같네요.”

“어차피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였던걸요? 발원지가 어딘진 잘 모르겠지만 이 근처이긴 한 모양이에요.”

멜리사의 말대로 바이러스가 멀리서 퍼져 왔다기엔 정부의 대처가 조금 느렸다.

아마도 문제가 발생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잘 대처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조금 이상하긴 하군요. 백신이 개발된 것으로 아는데 다시 좀비 바이러스라니….”

“난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퍼트렸다고 봐요. 관련 지식이 있다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죠.”

주위에 수상쩍은 움직임이 없는지 멜리사가 주위를 살폈다.

그녀는 이게 메르키오르 재단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직 확증은 없지만, 혼란 속에서 이익을 취하려는 무리인 만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이해가 잘 안 되네. 이런 짓을 벌여서 대체 뭘 얻을 수 있다는 거지?”

“빨리 안전지대로 가고 싶어. 여기 있으니까 자꾸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라.”

다시 걸음을 옮기며 채린과 메이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인내심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자 얼마 후 저 멀리서 바리게이트가 설치된 지대가 보였다.

“저기가 긴급 피난처인가 보네? 간이 천막도 있고 물자를 나르는 군인들도 보여.”

후열에서 뒤따르던 채린이 한시름 놓은 듯이 말했다.

한 번도 파훼된 흔적이 없는 게 나름 안전한 모양이다.

더군다나 잠시 잊고 있었던 얼굴도 보인다.

“오랜만이다, 이런 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박수호.

녀석은 전요한을 보자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박수호]

방패를 든 하급 기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겠다는 순수한 열망만으로 당신의 곁을 지킵니다.

실력은 아직 형편없지만, 어디엔가 쓸모가 있을지 모릅니다.

‘이 녀석하고는 아직도 관계가 진전되지 않은 건가.’

성급이 오를 때도 된 것 같은데, 괜히 입맛만 다시게 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별일 없었냐?”

“응, 좀비들의 수가 조금 많았지만 그럭저럭 혼자 다닐 만했어.”

박수호는 신체강화 계열의 이능력자라서 좀비 정도는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다고 했다.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늠름한 모습의 군인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쪽은 모두 헌터 직군이십니까? 지금 인력이 부족해서 그런데 바쁘지 않다면 협력 좀 부탁드립니다.”

중령 계급장.

육군 부대의 대대장 정도 되는 위치이니 대화의 필요성은 있다.

“좀비들을 해치우는 일이라면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게 저희들의 일이니까요.”

“…그런데 여성분들은 같이 다니면 위험할 것 같습니다만. 이쪽 방침은 부녀자 보호가 1순위이니 안심하고 맡겨도 됩니다.”

육군 중령은 신경 쓰이는지 배후의 채린과 멜리사를 응시했다.

전요한은 고개를 저은 후, 멜리사의 신분을 밝혔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분은 관리국 요원입니다.”

“…쓸데없는 참견이었군요. 제 이름은 정승식입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정승식의 태도가 한결 공손하게 변했다.

관리국하고는 비상시에 협조해야 하는 만큼, 언행을 조심하기로 한 것이다.

“그럼 저희가 맡아야 할 구역을 알려주시죠. 인원이 적긴 하지만 최대한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아, 네.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기다렸다는 듯이 정승식이 일행을 작전 지휘소로 이끌었다.

잠자코 뒤를 따르며 마음속으로 다음 계획을 고민했다.

‘곧 봉쇄령이 내려질 텐데, 어떻게 하지.’

당분간 아카데미로 되돌아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내버려 두고 온 시르케가 신경 쓰였지만, 그녀에 대해선 잠시 잊기로 했다.

유사시엔 정서희가 관리국에 도움을 요청한다고 했으니 별 일은 없을 터다.

‘이참에 스탯이나 올리며 성장하는 편이 좋겠어.’

그동안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 왔지만, 여전히 부족함이 많았다.

오랜만에 만난 박수호도 열심히 굴려야겠다고 결심하는 전요한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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