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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72화 (72/180)

제72화. 생존 경쟁 (6)

“대일본 제국의 사무라이 정신을 보여주마!”

본인이 어느 시대를 사는지조차 망각했는지, 켄이치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이후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카타나가 휘둘러졌다.

나름 3성급의 성유물이었지만, 수천 년간 살아온 흡혈귀를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실력이 형편없군요. 다음 기회를 노리라고 하기에도 너무 움직임이….”

절묘하게 상체를 비튼 카디스가 뒤쪽으로 물러나며 조롱했다.

이후 인도 출신의 생도가 참마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마찬가지로 데미지를 입히는 데 실패했다.

다음 차례는 메이.

그녀가 높이 도약해서 단번에 사이드를 휘두르자 처음으로 금속성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카랑!

같은 계열의 능력을 사용해서 그런지 빈틈을 잘 노린 수.

전요한은 머릿속에 둘의 전투 장면을 흑백 화면처럼 그릴 수 있었다.

이전보다 훨씬 감각이 예민하게 주위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덕분이다.

“여기서 잡종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메이와 무구를 맞댄 채 카디스는 경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줄곧 무미건조했던 목소리에서 희미한 떨림이 느껴진다.

휘아아아!

이에 반응하듯 사이드를 잡아 쥔 메이의 육체를 붉은 혈기가 휩싸고 돌았다.

그것은 분노.

과거에 자신의 가족들을 살해했던 흡혈귀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이런, 증오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다기엔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그 권능은 근원이 저와 같은걸요?”

카디스는 상대가 미흡하다고 여겼는지, 여전히 조롱하는 어조로 일관했다.

여유롭게 공격을 받아내며 다른 생도들에게 한 가지 권유를 한다.

“이 여자애의 동료들을 죽인 자에겐 특별한 혜택을 드리겠습니다. 무사히 탈출하는 건 물론이고, 「피의 권능」까지 제공하죠.”

그간 권속들의 눈을 통해 카디스는 공략팀의 내부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3명씩 한 조를 이루어 경쟁하는 중이니, 그 점을 부추기기로 한 것이다.

“나쁘지 않은 제안인데?”

“잘은 몰라도, 피의 권능이라는 게 제법 탐이 나.”

“뭐 하던 녀석인지 기억이 안 나긴 한데, 이만 죽어 줘야겠어.”

교류학생들 중 일부가 이쪽으로 음흉하게 눈빛을 빛냈다.

과거의 기억을 점차 「망각」해온 탓에, 이제는 같은 동료였단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서 와, 한 번에 상대해줄게.”

전요한은 손가락을 까딱하며 도발해 보였다.

채린의 안전이 최대한 확보될 수 있도록 전투 자세를 취한다.

그 모습을 본 켄이치가 휘파람을 불었다.

“오호, 자신만만한데? 하지만 우리도 아카데미에서 수재라고 나름 인정받는 학생들이야.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걸?”

동료들 중 최약체였던 녀석이 저렇게 떠드니 밉상이 아닐 수 없다.

나머지 두 명 역시 본인이 최강자라고 믿는 게, 적잖이 한심스러웠다.

“죽더라도 우리를 너무 탓하지는 마. 본래 약육강식의 세계 아니겠어?”

“뒤에 있는 예쁘장한 여자애는 대신 갖고 놀아줄게.”

도전장을 내민 견습생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전요한의 주위를 포위하듯 둘러싼다.

보다 못한 멜리사는 대검을 들어 올리며 교류학생들을 만류했다.

“그만하시죠.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 겁니까?”

“내버려 두세요. 어차피 자비를 베풀어도 흡혈귀의 모략에 죽게 될 운명이니까요.”

제단형 던전인 만큼, 저들은 서로를 희생양으로 내세우다 결국 자멸하게 될 것이다.

도움 따윈 필요 없다는 눈빛을 보내는 전요한.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인 후 뒤로 물러났다.

“그럼 간다!”

“죽을 각오하라고!”

“우린 절대 봐주지 않아!”

이후 기다렸단 듯이 세 방향에서 돌격해오는 교류학생들.

먼저 전요한은 그들 중 한 명을 향해 오러를 날렸다.

“크윽!”

날아오는 오러를 막아내기 위해 녀석이 도검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동안 나머지가 거리를 좁혀왔고 이윽고 양쪽에서 파괴력 있는 전투 스킬이 시전되었다.

* * *

순간, 허공의 궤적이 머릿속으로 예측되며 이후의 장면들이 미래시처럼 떠올랐다.

「전투 예지」.

종합 능력치가 높아지니 이런 부가능력도 생기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전투는 한결 수월해졌고, 일방적인 학살이 뒤따랐다.

스걱!

일격을 받아낸 직후의 틈을 타서 상대의 빈틈을 노렸다.

녀석은 전요한의 반격을 피하려 했으나 뜻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히익!”

그에게서 감당하기 어려운 살기가 느껴진 탓이었다.

굳어버린 육체는 결국 두 동강이 나버렸고 그로부터 한 차례의 피 보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위기감을 느낀 켄이치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마, 말도 안 돼….”

상대에 대해 완전히 망각하고 있어서 보일 수 있는 반응.

한편, 전요한은 「절대면역」 덕분에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어서 이 귀찮은 녀석들을 정리해야겠어.’

메이 혼자서는 수천 년간 살아온 흡혈귀를 상대로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다시 덤벼드는 두 명의 모습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여유가 없어져가던 전요한은 거침없이 아르티나를 휘둘렀다.

“아아악!”

양손 도끼를 휘두르려던 생도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절반으로 갈라졌다.

녀석 또한 러시아 지부의 아카데미에서 장래가 촉망받는 수재.

하지만 방해가 된다면 그저 벨 뿐이었다. 이후의 일에 대해선 더는 상관하지 않는다.

“허어….”

패색이 점점 짙어지자 켄이치가 하얗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등을 돌리며 도망치려는 기색을 보이기까지 하는데.

먼저 달려들었던 3인 중 마지막 생존자라고 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곧장 예비용 단검을 던졌다.

얼마 전에 골동품 가게에서 500만 원을 주고 사온 건데, 제법 나쁘지 않은 성유물이다.

“크흑!”

발목을 베인 백선우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진다.

다가가서 끝장을 내려 할 때, 배후로부터 돌연 누군가의 불온한 기척이 느껴졌다.

카랑!

그리고 이어지는 기습적인 공격.

이건 노렸다기보다는 그저 눈먼 살의에 가깝다.

“한눈을 판 사이에 이성을 잃었나 보네.”

피의 갈망에 완전히 매몰되어 버린 메이였다.

허술하게 관리했다고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표정을 하고 있다.

유혈이 낭자한 현장에 있었으니 안 그래도 억제하기 어려운 충동을 더욱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를 베고 싶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 늦지 않았어. 그러니까 포기하면 안 돼.”

서로 무기를 맞대고 마주 본 채, 메이가 피의 갈망을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그 모습을 본 카디스가 저 너머에서 비꼬는 투로 말을 건네왔다.

“잡종에겐 무슨 말을 해줘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탈진한 개처럼 헥헥대다가 누군가를 물 뿐이죠.”

분명 그녀가 혈마법에 의존하여 전투를 벌이는 건 위험 부담이 있었다.

그래도 이번 위기만 넘겨내면 자신의 욕구를 제어하는 요령을 어느 정도 체득할 수 있겠지.

전요한은 잠시 시간을 끌 필요성을 느꼈다.

우선 피의 속박을 통해 메이를 조금 진정시킨 후, 멜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메이 대신 흡혈귀를 맡아주세요. 녀석을 상대할 만한 자가 현재 딱히 없습니다.”

“좋은 계획이라도 있어요?”

“보시면 알아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때마침 메이가 서서히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으으….”

눈먼 공격으로 휘두르던 사이드도 움직임을 멈췄다.

이윽고 움직임을 멈춘 그녀는 거친 심호흡을 내뱉었다.

“하아… 하아….”

피의 갈망에 휘둘리느라 일시적으로 혈마법을 과다하게 남용했던 탓이었다.

“조금 안정을 취하도록 해. 하던 일을 마저 마무리 지을 테니까.”

그건 바로 켄이치였다.

발목이 베여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출혈이 심한 탓인지 시간을 끄는 동안 그리 멀리 가지도 못했다.

스르륵.

전요한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켄이치를 천천히 뒤따라갔다.

금방 간격이 좁혀졌고 아르티나를 들어 올리며 싸늘하게 한마디를 건넸다.

“기억이 되돌아오기 전에 죽이는 게 아쉽네.”

이런 상태로는 무슨 말을 한들 별 의미가 없었다.

현재의 켄이치는 자신이 왜 ‘특별취급’을 받는지조차 모른다.

“사, 살려줘….”

그저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목숨을 구걸하기만 할 뿐이다.

솔직히 죽일 가치조차 없다 느껴졌지만.

스걱!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손수 목숨을 거뒀다.

이로써 앞서 덤벼들었던 놈들은 모두 죽은 상황.

나머지는 무서워서 덤벼들지조차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괘, 괜찮아?”

배후에서 지켜보던 채린이 말을 건네왔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향했다.

멜리사가 홀로 카디스와 공방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인다.

“당신은 잡종이 아닌 모양이군요. 저를 충분히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거겠죠?”

자신이 불리해졌단 사실도 간과한 채, 카디스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멜리사는 그런 녀석을 향해 조소를 머금었다.

“저는 그저 시간만 때우고 있었을 뿐이에요. 마무리는 저 아이들이 하게 되겠죠.”

어디선가 혹한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흠칫 놀란 카디스는 각성 상태로 돌입한 채린을 바라봤다.

“화신으로 나아갈 잠재력을 지닌 이능력자였다니. 이거, 너무 방심하고 있었군요.”

채린 뿐만이 아니었다.

전요한도 잠재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며 힘차게 달려든다.

“네놈은 끝이야, 흡혈귀!”

카랑!

카랑!

이윽고 정신을 차린 메이까지 끼어들면서 치열한 접전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자 카디스는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결국, 서슬 퍼런 사이드가 카디스의 왼팔을 절단한다.

이어서 나머지 신체 부위까지 전요한과 채린에 의해 차례로 도륙당했다.

푸콱!

사방에 검붉은 혈액이 튀며 주위가 지저분하게 더럽혀졌다.

아까와 달리 메이가 피의 갈망을 잘 이겨내자 카디스는 순순히 패배를 시인했다.

“어서 마무리를 지어라, 소녀여. 그렇지 않으면 저주받은 능력에 의해 내 육체는 곧 재생하고 말 것이다.”

마지막 순간엔 자긍심을 지키고 싶었던 것일까.

처형식이 집행될 때까지 그는 두 눈을 감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푸욱!

혈기에 휩싸인 사이드가 심장을 내리꽂았다.

푸른 불길이 주위로 퍼져나가며 토막 난 부위를 불태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피 웅덩이는 혈기로 화하여 사이드를 통해 메이의 체내로 흘러 들어갔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카디스를 근원으로 존재하던 소악마도 형체가 소멸해 버렸다.

어수선하게 떠들던 잡담꾼이 사라지자 주위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수고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내부적인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전후사정을 고려하여 평가엔 반영하지 않겠습니다.”

최후의 전투를 지켜보던 멜리사가 최종적인 성적을 매겼다.

전요한이 소속된 1조만이 만점을 받았고, 나머지는 형편없는 점수가 부여된다.

“기억이 사라진 상태였어서 조금 억울한데.”

“그래도 뒤처진 건 사실이니.”

“다음엔 좀 더 잘해야겠어.”

카디스가 소멸한 후, 망각의 저주에서 풀려난 생도들이 중얼거렸다.

부러워하는 시선을 뒤로한 채, 전요한은 최상급의 전리품을 들어 올렸다.

「블러드 스톤」.

이걸 이용하면 다시 한번 흡혈귀 군주, 드라카를 소환할 수 있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계기가 생기면, 그를 불러서 메이의 전력을 올려줘야 할 터였다.

‘대가로 뭔가를 받긴 해야겠지.’

메이가 투자할 만한 상대이긴 하나, 무상으로 전력을 올려줄 만큼의 호감까진 없었다.

적당한 거래가 필요하다 느낀 전요한은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너, 나한테 해줄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게 뭐야?”

단순히 협상을 하기 위한 운 띄우기였다.

그런데 메이는 의도를 오해했는지 조금 얼굴을 붉혔다.

“역시 나 같은 여자가 취향이었던 거야? 다짜고짜 그런 속 보이는 말을 하다니, 변태 같아.”

하지만 싫지만은 않은지, 몸을 비비 꼬며 입가에 검지를 올린다.

“린, 쟤 왜 저러는 거야?”

“…네가 먼저 이상한 말을 했잖아. 어서 사과해.”

이번만큼은 채린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전요한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얼굴이 개연성인 건가.”

예전엔 아무리 선행을 해도 이런 식으로 여자가 꼬이지는 않았었다.

인물이 훤칠해진 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은 하루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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