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생존 경쟁 (5)
“체엣. 아쉽게 되었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버텨야 하는 건가?”
파란색 타일에 눈독들이던 교류학생들이 이를 악물었다.
이제 안전지대는 후위의 마법사와 사제에게 내줘야 하는 상황.
담당 교관에게 실점을 당하지 않으려면, 지시대로 행동하는 편이 좋았다.
“덤벼라 마물들아!”
“너 죽고 나 살자!”
교류학생들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본국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내지 못한다면, 살아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찬밥 신세일 터다.
메이 또한 그런 곤란함을 겪고 싶지 않았기에 필사적으로 사이드를 휘둘렀다.
“하아… 하아….”
그런데 전날 밤에 생리를 시작한 탓인지, 체력 소모가 예상보다 빨랐다.
나름 관리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점차 체온이 오르고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피의 갈망」을 오랫동안 억제한 부작용이 그녀를 서서히 옥죄어 오고 있었다.
“괜찮아? 힘들어 보이는데.”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전요한이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돌연 메이가 눈빛을 바꾸더니 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아….”
목의 혈색을 본 메이가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피의 갈망」은 참기 어려운 성질의 것.
보유 능력이 혈마법인 탓에, 금단 현상은 예전부터 줄곧 지속되어 왔다.
한계 상황이라 선을 넘을 법도 하건만, 메이는 유혹을 뿌리치고 물러났다.
“미안해.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어.”
만약 유혹에 넘어가게 되면 더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흡혈귀들에게 부모를 잃었던 메이는 그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혈마법은 본래 밤의 일족에게 주어진 능력이야. 그들과의 계약이 없이는 제대로 다루기 어렵지.”
눈앞의 마물들을 베어 넘기며 전요한이 설명을 해줬다.
그러자 메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밤의 일족?”
“그래, 우리가 뱀파이어라고 부르는 존재와 거의 동일하다 보면 돼.”
“아….”
메이는 지난 악몽이 떠오르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등을 맞댄 그녀가 사이드를 거칠게 휘두르자, 한바탕 피 보라가 몰아친다.
‘과거에 녀석들과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네.’
전요한은 메이에게 트라우마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되면 계획이 조금 틀어지게 된다.
블러드스톤을 손에 넣은 후, 흡혈귀 군주를 다시 불러내려 했는데.
‘현 상황으로는 메이가 거절할 가능성이 높아.’
만일에 대비해서 응급처치는 해야겠다 싶었다.
전요한은 메이에게 「피의 속박」을 걸기로 했다.
서창민을 자유롭게 해준 덕분에 이번에 새로운 대상을 고를 수 있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만약 네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게 된다면, 적당한 도움을 주려고 해.”
마물과의 전투 도중이라 자세한 설명을 해줄 여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메이는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약점을 이용해서 노예처럼 부리기라도 할 셈이야?”
경계심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전요한은 메이가 마음을 열도록 살살 꼬드기기로 했다.
“믿지 못하겠다면, 내 피를 빨도록 해줄게.”
“…뭐?”
순간, 메이는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흡혈귀들에게 있어서 처음 피를 빨게 해준다는 건, 부모가 자식에게 권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전요한은 지금 메이를 보호자로서 지켜 주겠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실제로 흡혈해본 적은 한 번도 없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괴물이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
“당연하잖아? 너 같으면 시도해 보겠어?”
“나를 믿어. 언젠가는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잖아.”
혈마법을 구사하면서 피를 거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소량이라도 주기적으로 흡혈을 하며 욕망을 다뤄야만 금단현상에 집어 삼켜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린, 잠시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해줘.”
“응,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채린이 빙벽을 일으키며 주위를 감쌌다.
이윽고 전요한이 손목을 내밀자, 메이는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내가 괴물이 된다면, 그냥 고통 없이 죽여줘.”
무슨 일이 있어도 흡혈귀 같은 존재 따윈 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지금까지 잘 견뎌 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 테니까.”
“알았어. 그럼 시작할게.”
두근거리는 혈맥을 바라보던 메이는 살며시 입을 벌렸다.
그러자 송곳니가 조금씩 자라나며 흡혈에 유리한 모습을 갖췄다.
스윽.
예리한 송곳니가 손목을 조심스럽게 파고들어 갔다.
전요한은 따끔한지 미간을 조금 찌푸렸지만, 인내심을 발휘했다.
“쓰읍.”
흡혈을 한 메이의 눈빛에 순간 광기가 어렸다.
본능적인 피의 갈구.
점차 통제력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이자 전요한은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진정해. 광기에 이끌려서 네 본모습을 잊지 마.”
그러면서 은근슬쩍 「피의 속박」을 거는 전요한.
자칫 잘못하면 상당한 반발을 사며 낭패까지 볼 수 있는 시도였다.
다행히도 메이는 욕구가 진정되는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비린 맛이 나.”
불평을 늘어놓지만,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이후 빙벽을 허물어내자, 메이는 안정을 되찾은 모습으로 전투에 다시 임한다.
그 모습을 본 멜리사는 재미있단 표정을 지었다.
‘호오.’
금기가 걸린 혈마법에 대해서는 아카데미의 기밀 문서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과연 전요한이 그녀의 잠재력을 온전히 해방시켜줄 수 있을까?
이윽고 치열한 전투가 끝나자, 멜리사는 생도들을 불러 보았다.
“부상자는 얼마나 되죠? 각자의 전리품을 가지고 오도록 하세요.”
생도들의 실전 성적을 실시간으로 평가하는 건 담당 교관의 임무였다.
다행히 심각한 부상자는 없었고, 누군가가 내민 쪽지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쫓기지 않는 자, 「망각」하게 될 것이다… 이게 과연 무슨 의미인 것 같습니까?”
쪽지는 우두머리로 보였던 마물에게서 튀어나왔다고 한다.
멜리사는 지난 경험을 통해 노련한 해석을 내놓았다.
“쫓기지 않는단 건 뒤처졌다고 해석해도 되겠죠. 즉, 경쟁에서 밀려날수록 점점 기억 상실자가 되어 간단 말입니다.”
“기억 상실자라니… 받아들이기 어렵네요.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려서 망각하게 만든단 거죠?”
채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요한은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상위 존재의 권능은 때로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은 현상을 일으키기도 해.”
“상위 존재?”
“응, 저번에 강림했던 마계 군주를 떠올려 봐.”
질투의 죄악은 관리국 요원들도 어리둥절해할 정도의 기현상을 일으켰다.
이곳에 그만한 위계를 지닌 존재가 잠들어 있다면, 누군가가 지난 기억을 「망각」하게 되더라도 딱히 이상할 건 없다.
“문제는 그 권능의 영향으로 생도들 간의 경쟁이 유도된단 점이에요. 다들 정신 번쩍 차리고 따라오도록 하세요.”
다음 층계로 오르기 전, 멜리사는 모두에게 주의를 주었다.
교류학생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흐음. 이만하면 되려나.”
전요한은 혹여 자신이 중요한 사실을 망각할까 봐 메모지에 이것저것 적어두기 시작했다.
한편 메이는 아무래도 상관없는지 간간이 발생하는 전투에만 집중했다.
“네가 속박을 걸어주고 나서 조금은 안정된 기분이 들어.”
「피의 속박」은 그녀가 욕망을 억누르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물론, 그만큼 신경을 써줘야 하긴 했지만 전요한은 만족했다.
같은 조원인 메이가 더 활약해 준다면, 이번 실전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걸 두고 일석이조라고 말하는 거지.’
혈마법을 구사하는 이능력자에게선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메이의 호감도를 올려둬서 나쁠 건 없다.
미래시가 발동한 시야에 그녀의 모습이 푸른빛으로 비춰진다.
“그런데 너, 쟤랑 사귀는 사이야?”
천장에서 내리꽂히는 쇠창살들을 피하면서 메이가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배후에서 화력 지원을 하는 채린에게 가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제일 먼저 서로의 안전을 신경 써주고 있잖아. 같은 조원이라고는 해도, 미묘한 분위기야.”
메이는 자신의 동료가 누구를 소중히하는지 확실히 하고 싶어 했다.
전요한은 그 우선순위를 솔직히 인정했다.
“무엇보다 린이 다치지 않았으면 해. 하지만 너라고 해서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야.”
“바람둥이네. 한 여자만 지켜내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러니 최대한 신경 쓰지 않게 해줘. 슬슬 골치 아파지려 하고 있으니까.”
이런 말을 할 만도 한 게, 그들은 어느덧 지금 고성의 최상층에 도달해 있었다.
“히히! 잘도 여기까지 왔군요? 그렇다면 시련의 무게가 더 무거워져야겠지요.”
허공에서 나타난 소악마가 한층 강화된 페널티를 예고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갑자기 누군가가 기억상실을 호소했다.
“잠깐만,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지금까지 줄곧 민폐를 끼쳤던 켄이치였다.
그가 던진 말에 다른 교류학생들도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내 국적은 뭐였지? 태국이었나?”
“어젯밤에 뭐 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나. 마치 의식이 단절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쪽지에 적혀 있던 경고는 사실이었다.
멜리사는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이들에게서 증상이 심한 것을 확인했다.
“이런, 「망각 현상」이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었군요.”
이대로는 담당 교관으로서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주인님의 권능에 마음껏 감탄하세요! 이쯤에서 한 가지 알려주자면, 먼저 복종하는 자들은 가혹한 시련을 면죄받을 것입니다!”
상황이 악화된 것을 빌미로 소악마가 은근슬쩍 꼬드기기 시작했다.
이곳을 지배하는 존재의 하수인이 되라는 속삭임.
부상을 입은 탓에 생존 가능성이 낮아져서, 유혹에 넘어가려는 이들도 보였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딱 잘라서 거절한 후 나는 적당한 위치의 테이블 앞에 앉았다.
최상층은 연회장처럼 화려하게 치장된 공간이었고 우리는 메이드에게 귀빈 대접을 받았다.
“여긴 대체 무슨 목적으로 준비해놓은 공간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군요.”
“기다리면 알게 됩니다. 일단은 주위 사물에 익숙해지세요.”
“으음….”
옆자리에서 질문을 던졌던 유명호가 생각에 잠겼다.
메이도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우리와 같은 테이블을 공유했다.
“…뭐라도 시켜야 할 것 같네.”
“원한다면 메뉴판을 보고 주문해.”
테이블 위에 아까 메이드가 놓고 간 메뉴판이 있었다.
거기에 적힌 것들을 읽어본 메이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주문하라고 한 거야?”
“혹시나 해서.”
메뉴판의 주문 목록은 폐기된 실험체의 부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성의 주인이 지닌 악취미에 질렸는지 그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여태까지 개고생한 걸 생각하면 그건 모두가 동의할 생각이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던 때였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연회장의 촛불들을 모두 꺼뜨렸다.
샹들리에 조명도 없어서 삽시간에 어두워진 주위 공간.
저 너머로부터 소악마가 아닌, 차가운 사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연회장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럼 게임을 시작해 볼까요?”
고성의 오래된 주인.
흡혈귀 카디스가 마침내 정체를 드러냈다.
카디스는 위계가 높은 밤의 일족이기에 그 존재감만으로도 위압감을 일으켰다.
“뭐, 뭐지.”
“이상하게 몸이 안 움직여.”
얼굴이 창백해진 채, 팔다리를 떠는 여생도까지 있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누군가가 마력 수정을 허공에 띄워 어두운 주위를 밝히려고 했다.
콰득!
하지만 그 시도는 곧바로 실패로 돌아갔다.
어디선가 날아온 혈탄이 곧바로 마력 수정을 관통하며 산산조각 내버린 것이다.
“게임의 룰은 간단합니다. 어떤 빛도 허락되지 않고 공격은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한 명씩 하는 것이죠.”
잠시 흐르던 정적을 깨고 카디스가 본격적인 제안을 했다.
전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
잠자코 지켜보던 멜리사가 낮은 목소리로 동의를 구했다.
“저는 굳이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다 함께 공격하는 편이 어떨까요?”
어차피 생사를 놓고 싸울 상대인데 처음부터 총력전을 벌이는 편이 백번 낫다.
멜리사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현재 상황도 고려해봐야 했다.
“시야가 차단된 전장에서 다른 생도들은 어차피 방해만 될 겁니다. 일단 룰에 따라주죠.”
가능한 희생자 수는 줄이고 싶은 것이 전요한의 목표였다.
인명을 중히 여긴다기보단, 흡혈귀의 악랄한 장난질에 넘어가기 싫어서다.
“그럼 어서 도전하시죠. 망설이는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간답니다.”
카디스는 여흥을 제대로 즐기고 싶은지 모두의 행동을 촉구해왔다.
녀석이 계속 우쭐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켄이치가 먼저 달려가 선공을 날렸다.
녀석은 자신이 일행 중에서 최약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