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생존 경쟁 (4)
“헉헉… 벌써 이곳까지 정리해 놓았다니….”
“우리, 생각보다 엄청 뒤처져 있었잖아? 완전 낙제 수준인데….”
뒤따라온 교류학생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들이었다.
숨겨진 루트를 찾아낸 것만으로 모자라, 중간 보스격인 몬스터까지 해치우다니.
실전평가상으로 1조는 말도 안 되게 앞서가고 있었다.
“마침 다들 잘 왔어. 고성이 지금 바로 앞이거든.”
전요한은 여유 만만하게 이를 드러냈다.
수문장이었던 아리안네를 해치웠으니 그 다음은 본무대다.
그렇게 해서 모두는 비밀 통로 끝에 있는 나선형의 계단을 올랐다.
불편한 정적이 흐르자 담당 교관인 멜리사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다들, 이곳이 어떤 유형의 던전인지 감을 잡았나요? 분명, 게이트 위쪽의 상징체는 제단 모양을 하고 있지요.”
멜리사는 생도들이 이곳의 핵심적인 위협 요소에 대비하길 바랐다.
아직까지는 본무대가 고성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 이외엔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제단이라면,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의미 아닐까요? 악마 같은 경우엔 산 제물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학생회장인 채린이 먼저 모범생다운 답변을 했다.
그 말에 동의하는지 메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아까 등장했던 안내자의 모습을 보면, 무언가 불온한 존재를 위한 제단일 거야.”
만일 악마가 아니라면 대체 어떤 녀석인 걸까.
교류학생들은 상상력이 자극되는지 저마다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한 마수라도 되려나? 그런 녀석이 아니라면 산 제물이 필요할 리 없잖아.”
“일본의 민담에 나오는 악질적인 요괴일 가능성도 있어. 인간의 내장을 빼먹는 놈들이 많거든.”
“혹시 흡혈귀 아냐? 꼭 드라큘라 백작이 혼자 살 것 같은 장소잖아.”
은연중에 흡혈귀 이야기가 나오자 메이가 뜨끔했다.
그녀의 시선이 불안해지자, 전요한은 나서서 화제를 돌렸다.
“어쩌면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류일 수도 있겠지. 미치광이 과학자라든가.”
“미치광이 과학자? 그건 연관성이 너무 없어 보이는데?”
일본 요괴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던 켄이치가 마음에 안 든단 표정을 지었다.
전요한은 아까 거미 여왕을 잡고 얻은 전리품을 꺼내 보였다.
“이런 게 나왔으니,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만?”
마치 산산조각 난 별처럼 희미하게 반짝이는 파편이었다.
‘진화의 조각’.
이것을 체내에 흡수하면 해당 종족의 유전 인자가 발현된다.
간단히 설명을 해주자 켄이치를 비롯한 대부분이 끔찍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그럼 저걸 흡수하면 기괴한 형체로 변해버릴 수 있단 말이야?”
“운이 좋아서 스킬만 얻는다고 쳐도 너무 꺼림칙해. 더는 인간이 아닌 느낌을 받을 것 같아.”
“아까 쓰러져 있던 거대 거미로부터 나온 거지? 그 녀석처럼 되어버리는 거 아냐?”
인간 이외의 무언가로 외형이 바뀐다는 건 본능적인 혐오감을 유발한다.
그나마 수인족처럼 된다면야 거부감이 덜하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싶은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확인해보니 거미의 유전 인자가 맞군요. 선택은 자유이나, 저도 별로 권장하고 싶지는 않네요.”
멜리사는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 여기며 논란을 일축했다.
이후 계단 위쪽의 널찍한 공간에 들어서자, 소악마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보자, 전원이 무사히 여기까지 도달했군요. 낙오자가 없는 걸 보면 이번 무대는 꽤나 치열할지도 모르겠어요.”
벌써부터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생도들이 박 터지게 싸우길 원하는 기색이다.
“좀 편하게 공략하도록 도와주면 안 되냐? 여기까지 오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고.”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켄이치가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소악마는 음흉하게 웃으며 정육각형의 주사위를 꺼냈다.
“오오, 지금 흥정을 요구하는 건가요? 이거이거 생각보다 흥미 있어지겠는데요!”
마치 게임을 하자는 듯한 말투.
불안해진 채린이 앞으로 나서며 설명을 요구했다.
“그 주사위로 대체 뭘 할 수 있는 건데? 룰 같은 걸 정해서 내기라도 하는 거야?”
잘못하면 지금보다도 불리한 조건으로 공략을 진행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두에게서 난감한 눈빛이 감돌자 소악마는 킥킥 하고 웃었다.
“히히! 이건 일종의 기회예요! 던져서 높은 수가 나오면, 위험도는 올라가지만 그만큼 고수익의 전리품을 기대해볼 수 있죠!”
만약 그게 부담스럽다면 흥정은 없었던 걸로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호승심이 발동한 켄이치는 모두의 동의도 없이 주사위를 던졌다.
“그럼 던져야겠네! 잘하면 히든 피스 얻을 수도 있잖아!”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다.
만약, 그러다 모두가 데스매치라도 해야 하면 어쩌려고 그러지?
전요한은 혀를 찼지만, 녀석을 굳이 말리진 않았다.
그저 주사위가 굴러가는 모양새에만 집중했을 뿐.
또르르르.
주사위의 숫자는 6이었다.
그것을 본 일부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부터 헬난이도로 바뀌는 거야?”
여기저기서 소란이 있었다.
모두의 반응을 살피던 소악마는 흉악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잔뜩 긴장하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이렇게 된 이상 지금처럼 전원이 생존하긴 어려우니까요.”
“무슨 말이야? 우리끼리 싸움이라도 시키겠단 거야?”
표정이 굳어 있던 켄이치가 다급하게 물었다.
녀석은 멋대로 상황을 악화시킨 장본인.
주위에서 차가운 비난의 눈길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까 말씀드렸듯, 난이도가 최상으로 조정되었을 뿐이에요. 저는 안내자에 불과하니 시련은 여러분이 이겨내세요, 그럼 이만!”
소악마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잠시 후, 모두가 있는 층계에선 냉랭한 정적이 감돌았다.
* * *
켄이치가 절망했는지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시련은 무슨 얼어 죽을 시련이야! 대체 왜….”
녀석의 울먹임으로 인해 안 그래도 침체되었던 분위기가 더 어두워졌다.
“때로는 위기를 기회로 삼을 줄 아는 것도 필요합니다. 항상 일이 잘 풀리는 건 아니니까요.”
주위를 유심히 살피던 멜리사가 모두를 독려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앞쪽에 있는 제단 쪽으로 향했다.
손을 내밀어 만져 보려 하자, 켄이치가 필사적으로 만류했다.
“자, 잠깐! 함부로 건드렸다가 이상한 게 튀어나오면 어쩌려고 그래!”
아까와는 다르게 잔뜩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이다.
미간을 찌푸린 메이가 뒤돌아보며 눈치를 줬다.
“그럼 어떻게 위층으로 올라가? 이곳의 구조상, 제단을 무시하고 넘어가는 건 불가피한 일이야.”
현 상황에서 그녀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옆에 있던 채린도 함께 맞장구를 친다.
“맞아, 던전을 공략하는 동안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해. 비록 난도가 올라갔다 하더라도.”
다른 교류학생들도 이의는 없어 보였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켄이치도 더는 입을 열지 않자 전요한은 제단을 활성화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기계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내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드르르륵!
얼마 전에 일행이 거쳐 왔던 루트가 진홍색의 결계에 의해 가로막혔다.
“퇴, 퇴로가 차단되었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지?”
교류학생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서로에게 달라붙었다.
벽면의 촛불들이 일시에 꺼지는 바람에, 사방이 흑막에 휩싸인 상황.
그나마 중앙부의 제단이 은은한 붉은빛을 발해서 서로의 모습만 간신히 확인 가능하다.
“움직이지 마세요. 주위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본격적인 시련이 시작되기 전에 전요한은 모두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삐익―!
“어? 쟤가 서 있는 곳이 붉게 변해버렸어!”
저만치 떨어져 있던 누군가가 켄이치의 발밑을 가리켰다.
“비, 빌어먹을…!”
켄이치는 황급히 옆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천장으로부터 예리한 쇠창살이 굉음을 내며 떨어졌다.
“주, 죽을 뻔했잖아?!”
조금만 늦게 반응했더라도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켄이치를 비롯한 모두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어어?”
붉게 빛나는 정사각형의 타일들이 사방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찔해진 일행이 이리저리 피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다.
휘이이이익!
빈틈을 노리고 벽면의 어디선가 독화살이 날아왔다.
결국, 화살은 켄이치의 왼쪽 어깨에 깊숙이 박혀버리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불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는지 켄이치가 까무러치듯 비명을 질렀다.
기절하진 않았지만, 독화살에 당한 것인 만큼 서둘러 치료를 해야만 했다.
“…이거 좀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요. 다들 급습에 당하지 않게 조심하세요.”
켄이치의 부상을 확인한 멜리사가 모두에게 경고했다.
일단 당장의 위기는 넘겼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인 느낌이다.
“서커스라도 즐겨야 하는 상황인가 보네.”
온 감각을 곤두세우며 전요한은 혼잣말을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무언가 위험한 놈들이 느껴지는 탓이었다.
놈들은 어둠을 틈타 사방에서 여길 향해 다가오고 있다.
“아까의 패턴들까지 더해지면 정신없겠어. 한 번에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니까.”
메이는 단단히 각오한 표정으로 사이드를 들어 올렸다.
“다들 발밑을 우선적으로 조심해. 나머지는 내가 최대한 처리할 테니까.”
전요한이 조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
멀리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붉은 눈을 번뜩이는 마수들.
일행이 놈들과 대치 중일 때,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겨났다.
띠링―!
파란색과 초록색.
붉은색에 이어 두 유형이 추가된 것이다.
그런데 붉은색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다음이 초록색, 파란색 순이었다.
“저긴 안전하다는 의미일까?”
“글쎄, 나도 잘….”
다들 선뜻 새로운 유형의 타일 위로 서보려 하지 않았다.
‘파란색은 안전지대쯤 되려나.’
전요한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봤다.
생각해보니, 가운데 있는 제단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살아남고 싶다면, 산 제물을 바치란 건가.’
일부만 생존하기 유리하게끔 설계해놓고 내부 분열을 유도하려는 의도였다.
그렇다면 초록색은 구호품을 보급해 주거나 상처 따위를 치료해주는 영역일 가능성이 높다.
“이봐 켄이치, 초록색으로 한번 가봐.”
비록 다른 조원이긴 했으나, 전요한은 선심 쓰듯 조언을 건넸다.
켄이치는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고 발을 내디뎠다.
“크윽!”
표정을 보니 거의 죽을 각오로 결단을 내린 듯하다.
이후 신비한 초록빛이 타일 위에 일어나더니, 독화살로 인한 부상이 거짓말처럼 회복되었다.
“역시 보급지대가 맞았네.”
초록색 타일은 한번 밟고 나면 사라져서 모두가 이용하진 못했다.
선심을 베푼 대가로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파란색 쪽을 신경 써야 할 차례.
전요한은 채린에게 근처의 한 자리를 권했다.
“저긴 안전할 거 같으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너, 너는 어떻게 하려고?”
채린은 당황하면서 무슨 생각인지 물었다.
주위의 마물들을 노려보던 메이가 대신 답변을 해준다.
“다른 자리를 차지하면 그만이야. 기습에 약한 마법사부터 챙기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으, 응….”
채린은 순순히 파란색 타일 위로 올라섰다.
안 그러면 자신이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탓이다.
이후 투명한 결계가 그녀의 주위를 감싸며 보호해주기 시작했다.
“크르르!”
“키에에엑!”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마물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생각보다 강했기에 교류학생들은 은근슬쩍 파란색 타일을 노렸다.
“비켜! 저긴 내 자리야!”
“어림도 없는 소리!”
심지어 같은 조원끼리 다투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이를 본 멜리사는 한숨을 내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개판 오 분 전이군.”
담당 교관인 그녀가 이런 식의 내부 분열을 달가워할 리 없다.
잠시 후, 진홍색의 불길에 휩싸인 대검이 들어 올려지며 위압감을 형성했다.
“후열의 포지션 중 마법사와 사제 계열만 안전지대를 허용하겠습니다! 나머진 이대로 맞서 싸우세요!”
냉정하면서도 엄격한 지시가 모두의 귓전을 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