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생존 경쟁 (3)
무저갱과도 같이 끝을 알 수 없는 칠흑의 공간.
전요한은 마력 수정의 푸른빛에 의지해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콰드득!
비밀 통로를 배회 중인 망자는 대부분 해골 병사였다.
녀석들을 상대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은밀하게 설치된 함정을 제거하는 데 조금씩 시간이 소요된다.
“확실히 이쪽이 더 흥미진진하군요.”
채린, 메이와 함께 묵묵히 내 뒤를 따르던 멜리사가 짧은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고성으로 곧장 진입한 다른 조원들을 지켜보다 여기로 합류한 상태다.
“어려워 보이는 루트를 선택했다고 괜히 걱정해 주시는 건 아닌가요? 교관님이 있어서 난도가 낮아졌다고 실전평가 점수가 깎이거나 하면 곤란한데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전투를 보조해주는 선에서만 움직이니까요.”
전요한의 질문에 멜리사는 걱정 말라며 웃어 보였다.
관리국의 다른 요원들처럼 그녀도 전요한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이는 중이다.
다른 차원의 강대한 적대자들과 맞서 싸워 온 그였기에 이런 집중 관찰은 당연한 일이었다.
휘리리릭!
새로운 구역에 발을 들이자 벽면으로부터 여러 다발의 독화살이 날아왔다.
마력 장벽으로 막아낸 후 몇 걸음 더 나아갔다.
이번엔 시계추처럼 진자 운동을 하는 육중한 쇠 날이 눈앞에서 아찔하게 위협을 가해 온다.
스삭! 스삭!
육중한 쇠 날은 기다란 사슬로 매달려 있어 연결부를 절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겉보기엔 녹슨 금속이지만 상위 마법으로 강화되어 있는 상태.
그래서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찰나의 틈을 이용해 지나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전요한은 더 간편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카랑!
콰아아앙!
아르티나로 쇠 날의 가장자리를 쳐내자 굉음과 함께 지저분한 먼지가 일었다.
굳이 연결부를 절단하지 않아도 함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들면 그만.
벽면에 깊게 박힌 쇠 날이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일행은 서둘러 통과를 시도했다.
나머지 함정은 쇠창살이 일정 패턴으로 지면에서 솟아나는 등 쉬운 난도였다.
지금까지 대부분 경험해본 것이기도 했기에 그다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기분 나쁜 거 느껴지지 않아?”
가시밭길의 끝자락이 보일 즈음이었다.
사이드를 비껴 든 채 따라오던 메이가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채린도 문제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표정을 굳혔다.
“아무래도 이 앞쪽에 수문장이 있는 것 같네.”
소위 중간 보스라고 부르는 우두머리 몬스터.
아직 초입이긴 하지만 아카데미 생도에겐 적잖이 긴장되는 상황이었다.
“모의 훈련에서 연습했던 대로 대처하죠. 현재의 전력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할 겁니다.”
물러설 수 없다 여긴 멜리사가 전투를 제안했다.
물론, 보스전인 만큼 그녀는 여기 남은 채로 참가하지 않겠다고 미리 못을 박았다.
전요한은 아치형의 청동문 앞으로 다가선 후 잠시 멈춰 섰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움직임이 재빠른 녀석 같으니까.”
감각을 곤두세우니 기묘한 걸음걸이가 느껴진다.
걸음을 옮기자 어두운 저 너머에서 스산한 기척이 들려왔다.
사사사삭!
놈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던 전요한으로서는 저 움직임이 곧바로 머릿속에 연상된다.
여러 개의 기다란 다리와 절지동물 특유의 외골격.
일행이 상대해야 할 수문장은 바로 거미 여왕, 아리안네였다.
* * *
뒤쪽의 청동문이 세차게 닫히며 도주로를 차단했다.
레이드를 시작하기 전, 전투 준비 중인 채린과 메이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거미 여왕은 지능이 높아. 그러니 우세를 점하더라도 절대 방심하지 말라고.”
숨겨진 위협 요소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아르티나를 들어 올린 후, 전요한은 허공을 향해 오러를 날렸다.
촤아아아악!
거미줄이 잘려나가는 소리.
우선 아리안네의 고유 영역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키아아아아!
기민한 움직임으로 선공을 피한 아리안네가 거미줄 위에서 곧 반격을 시도해왔다.
흡사 배설물이 쏟아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무수한 알들이 쏟아진다.
그것을 본 채린과 메이는 잽싸게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여기도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지 몰라. 만약에 대비해서 신중하게 움직이도록 하자.”
먼저 시범을 보이기 위해 둘의 움직임을 제지하고 곧장 앞으로 도약했다.
벌써부터 부화하기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거미 알들.
녹색 진액과 뒤섞인 채 사방에 흩어져서 제거하기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지만.
부우우웅.
정신을 집중한 후 마력 파동을 일으키자 알들이 한쪽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스삭! 스삭!
뭉쳐 있는 개체들을 일차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양옆에서 육중한 쇠 날이 튀어나와 갑작스럽게 위협을 가해왔다.
이전 구역에서와 같은 패턴.
차이점이 있다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점이었다.
카랑!
카랑!
사슬에 매달린 채 진자 운동을 하는 쇠 날들을 쳐내며 전요한은 눈을 감았다.
이런 상황에선 차라리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에 의존하는 편이 더 낫다.
“잘도 수작질을 부리는구나.”
거미줄 위에서 전요한을 내려다보던 아리안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후 그녀는 흉측한 입에서 맹독 체액을 한껏 머금더니 이쪽으로 총탄처럼 마구 쏘아대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맹독 체액과 맞닿은 지면이 강한 산성 반응을 일으키면서 회갈색으로 부식된다.
동시에 다른 함정도 발동되어 여기저기서 화살이 날아오고 일부 타일이 움푹 꺼져 구덩이가 드러나는 상황.
그러나 이에 굴복할 전요한이 아니었다. 사상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대미궁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여기에서 무너질 순 없다.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내심 전의를 불태우자 뜻밖의 변화가 일어났다.
마치 전신이 흑화하는 듯한 느낌의 격노.
일시적인 각성으로 인한 전력의 상승이었다.
그리 오래 유지할 수는 없으므로 전요한은 서두르기로 했다.
아르티나를 휘두르자 지척에 있던 거미 알들이 일시에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퍼퍼퍼펑!
아리안네의 권속인 새끼 거미는 맹독충의 일종이어서 부화되기 전에 정리해두는 편이 좋다.
짧게 심호흡을 한 후 고개를 돌리니 채린과 메이가 남은 거미 알들을 처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리안네가 밑으로 내려오지 않으려 해서 이런 식으로 거추장스러운 잡일을 계속해야 한다.
전요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더 좋은 수단을 찾아냈다.
“하루 종일 거기 매달려 있을 생각이냐? 여왕의 체면이 말이 아니네.”
그건 바로 도발.
의외로 저런 타입이 자존심을 조금 긁어놓으면 분노심에 자제력을 잃어버린다.
“네까짓 게 감히 날 평가하다니… 쓸 만한 무기를 들고 있다고 너무 우쭐거리는구나.”
예상대로 아리안네는 지지 않고 앙칼지게 대꾸해왔다.
이쪽을 향해 뭐라고 하든 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치부를 들춰내 볼까?’
대미궁에서 들은 적이 있는 한 가지 비화가 생각났다.
“변이종의 침입으로 원시 밀림이 잠식당했던 때가 있었다지? 듣기론 네가 그들의 여왕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며. 비겁하게 네 동족들을 배신해 가면서….”
“닥쳐라! 지금 당장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더는 모욕을 당하기 싫은지 아리안네가 붉은 눈을 빛냈다.
그녀는 새하얀 섬유질의 거미줄을 타고 강하한 후 다짜고짜 기다란 다리로 선공을 해왔다.
휘익! 휘익!
자진해서 포위당한 걸 보면 어지간히도 화가 났나 보다.
전요한은 거침없는 연속 공격을 회피하며 빈틈을 노렸다.
“계속 반격하지 않을 거야? 잘만 하면 파고들 수 있을 것 같은데.”
패턴 파악이 끝났는지 건너편에서 사이드를 휘두르던 메이가 계획을 물었다.
현재 일행은 아리안네를 둘러싼 채 그녀의 맹공을 몇 분간 받아내는 중이었다.
“조급해하지마. 아직은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니까.”
아까부터 전요한이 노리는 기회란 단순한 반격이 아니었다.
일격 필살.
혹은 그에 필적할 만한 데미지를 줘서 아리안네가 최후의 수단에 기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마침 그녀가 무리한 일격을 감행해왔다.
“고작 이 정도밖에 못 하면서 나를 도발한 것이냐? 시간을 끌 수작 같은 건 안 통한다!”
일순간 거대한 몸체가 전요한이 있는 쪽으로 기울어지며 그림자를 드리운다.
채린과 메이는 일단 내버려 두고 전력 집중하겠단 의미인데 기다렸던 바였다.
‘대미궁에서 즐겨 써먹었던 검술을 선보일 시기가 된 것 같군.’
「파사월섬(破邪月閃)」.
사악한 존재를 단번에 파훼하는, 초신속의 횡참격이었다.
검신에 오러를 응집시킨 후, 대담하게 정면에서 발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휘익! 휘익!
미동도 않고 기다리자, 곧 검붉은 마기로 무장된 앞쪽 다리들이 동시에 머리 위를 엄습해왔다.
만약 제대로 적중당하면 즉사할 위력의 내려찍기.
긴장감에 심박수가 늘어날 법도 했지만 각성으로 인한 효과 덕분인지 오히려 승부욕이 생겨난다.
곧이어 창백한 번뜩임이 눈앞의 아리안네를 횡참했다.
“아아아악!”
불의의 일격에 당한 아리안네가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기세 좋게 들어 올렸던 앞쪽 다리들은 여러 마디가 절단된 채 경직 상태에 놓였다.
검상으로 깊게 파인 몸체는 분수처럼 탁한 체액을 한껏 내뿜는다.
단시간에 회복 불가능한 치명상.
종합 능력치가 좀 더 높았으면 끝장을 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어서 숨통을 끊어야 해. 아리안네가 이성을 잃고 폭주하기 전에.”
전투 자세를 고쳐 잡으며 전요한은 화력 집중을 요구했다.
둘은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으나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절호의 기회인데 놓칠 순 없지.”
“마무리 일격 정도는 자신 있어.”
서둘러 합동 공격을 펼치려 할 때였다.
패닉 상태였던 아리안네가 정신을 차리고 두 눈을 번뜩였다.
“어림없다!”
휘아아아아!
필사적인 의지로 발산하는 진홍색의 파장이 일행을 거세게 밀쳐낸다.
“크윽!”
“꺄악!”
타이밍이 조금 늦은 건가.
이러면 아쉽게도 다음 페이즈로 넘어가게 된다.
쓰러졌던 몸을 일으키자 형체가 변이되기 시작하는 아리안네의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전력으로 상대해주마. 한 놈씩 제압해서 천천히 말려 죽여주지.”
변이가 완전히 끝난 아리안네에게서 승리를 확신하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원시종의 특질과 뒤섞여 괴상하면서도 위협적으로 진화한 외형.
과거에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변이종이 되는 길을 선택했었다.
다만, 그 과오를 인정하기 싫어서 새롭게 받아들인 인자를 억제하고 있었을 뿐이다.
전투에 재돌입하기에 앞서 전요한은 굳은 표정의 일행을 격려했다.
“서로 호흡을 잘 맞추면 이번에도 충분히 해낼 수 있어. 이제 와서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저 상태에서의 전투는 꽤 미숙할 테니까.”
위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변이한 상태라 그녀도 내적으로는 상당히 혼란할 것이다.
새로운 육체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먼저 나서며 아르티나를 들어올렸다.
이후 거친 풍압과 함께 허공에 형성되는 푸른 궤적!
제법 위세가 있었으나 아리안네는 코웃음을 치면서 얼마 전 재생된 앞다리로 그 참격을 막아내려 했다.
“그깟 알량한 재주 따위….”
하지만 전요한이 노리는 바는 따로 있었다.
일찍이 벽면으로 쳐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뒀던 육중한 쇠 날들.
그것들을 다시 이끌어내 진자 운동을 시키면 어떻게 될까.
“지금이야, 린!”
“알았어!”
얼마 전에 은밀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날려 보내는 얼음 덩어리에 의해, 벽면에 고정되어 있던 쇠 날들은 다시 움직임을 시작한다.
스삭! 스삭!
아군에게도 성가신 일이지만, 가장 곤란해지는 쪽은 몸체가 거대한 아리안네였다.
절묘한 타이밍에 날아오는 쇠 날들을 본 그녀가 채린을 향해 분노의 감정을 터트렸다.
“이런 빌어먹을 년!”
당장이라도 공격해올 것 같은 눈빛이나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여러 개의 육중한 쇠 날을 받아내기 위해 몸놀림은 점차 바빠졌다.
덕분에 전요한의 다음 참격은 의도된 부위에 정확히 들어갔다.
스걱!
모처럼 재생되었던 몸체가 다시 한번 깊은 검상을 입는다.
변이종의 인자를 받아들여 외골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선 당해내지 못하지.
게다가 일 대 다의 전투 상황.
뒤이어 데미지를 입힌 채린과 메이의 일격에 아리안네는 몸체를 비틀거렸다.
“어, 어째서 내가 저런 하위종에게 일방적으로…!”
뒤늦게 진홍색 파장을 발산하여 산란을 하려고 해보지만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푸콱!
한번 크게 당했음에도 이쪽 전력을 계속 얕잡아봤던 거미여왕의 비참한 최후.
몇 차례의 교전 끝에 빙결의 마법검, 아르티나가 완전히 그녀의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치지지직.
그리고 찾아온 정적.
일행은 안도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나쁘지 않은 레이드였어.”
“별일 없이 끝나서 다행이야.”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면 힘든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방심은 금물. 소생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니 인화성 물질을 뿌리고 화형식을 집행했다.
마른 장작더미처럼 활활 타오르는 아리안네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다른 조의 인원들이 여기까지 도착해 있었다.
아마도 정면 돌파하는 루트에선 무언가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