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68화 (68/180)

제68화. 생존 경쟁 (2)

실전 평가를 진행하기로 한 던전 게이트는 당일에야 위치가 공개되었다.

국내 출신의 생도들이 합류 지점에서 기다린 지 대략 한 시간.

공략에 참여하기로 한 다른 인원들은 대형 차량을 타고 일거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아시아 각국에서 파견된 인재들이라는데, 아직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아서 전부 나이가 어린 편이다.

“네가 바로 알에서 깨어났다는 신생 조류?”

“소문과는 달리 날개나 부리가 달려 있진 않네.”

“경험담 좀 들려줘 봐. 한국에서 기묘한 사건이 많이 터졌다며?”

자국에서는 나름 인정받으며 대우받는 녀석들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버릇이 없었다.

귀찮아진 전요한은 심상찮은 기세와 위협적으로 손을 풀며 위압감을 형성했다.

“곤란한 일 당하고 싶지 않으면 까불지 마라. 누가 함부로 질문해도 된다고 하던?”

주위에 몰려와 있던 교류학생들이 살의를 느끼고 하나둘씩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이후 저마다 수군거리긴 했으나 목소리는 금방 잦아들었다.

던전에 진입하기도 전에 내부적인 마찰이 생겨나면 감점 요소가 되는 탓이다.

불만 섞인 표정들을 하나씩 살피던 내 시선은 이윽고 포니테일의 한 여학생에게 머물렀다.

메이.

혈마법 계통의 이능력자인 그녀는 다른 녀석들과 달리 애초에 전요한에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잘도 참고 있군.’

전요한은 그녀가 모두에게 숨기고 있는 피의 갈망을 간파하고 있었다.

저렇게 내면적인 욕구를 억누르고 있을수록 해방되었을 때 더욱 걷잡기 어려운 법.

혹여 던전 내부에서 문제라도 일으키면 곤란하니 항상 곁에서 주시하기로 했다.

“우선 각자의 특성을 고려해 조를 편성하도록 하지요. 메이 양, 현재 사용하는 주무기가 뭡니까?”

잠시 기다리자, 담당 교관인 멜리사가 본격적인 진행을 시작했다.

메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단답조로 대답했다.

“…사이드.”

사이드는 초승달처럼 날이 구부러진 대낫이었다.

보통 양손으로 휘두르는데 반경이 제법 길다.

다루기 까다로운 만큼 공격 범위 안의 적들을 최소한의 동작으로 쓸어버릴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그렇다면 메이 양과 전요한, 채린을 1조로 묶는 편이 좋겠군요. 포지션 상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또 저 녀석이랑?”

저만치 혼자 떨어져 있는 메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이의 제기는 하지 않고 전요한이 서 있는 쪽을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나머지 3인이 마지막으로 4조를 이루면 되겠군요. 그럼 각자의 소속에 따라 모여주세요.”

인원 분배를 마친 멜리사가 조별 집합을 요청했다.

사실, 이런 편성 같은 건 고위직들의 입맛대로 사전 편성되어 있었으나 그는 적당히 진실을 숨겼다.

‘그런 것까지 너희들이 알 필요는 없으니까.’

상부의 명령이니 따르긴 하지만, 미성년의 생도들이 혹독한 시련을 강요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부터 이 아이들은 상대평가를 위해 서로 경쟁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그것도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던전에서.

기분이 착잡해진 멜리사는 두 주먹이 떨렸으나 본심을 감춘 채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러자, 한자리에 모여 있던 아카데미생들은 머뭇거리다가 굼뜨게 이동을 시작했다.

“다들 썩 내키지 않아 하네.”

주위가 소란해진 동안, 그간 지켜보기만 하던 채린이 첫마디를 내뱉었다.

“벌써부터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는 거겠지.”

전요한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던전 내부에선 모두가 최선의 성적을 내기 위해 어느 정도는 서로를 적대하게 될 것이다.

팔짱을 끼고 기다리자 메이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어딘가 모르게 불타오르는 눈빛.

피의 갈망을 잊기 위해 그녀는 이번 성적에 꽤나 집착하는 듯하다.

“저번에 보여줬던 능력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한 것 같네?”

“…걱정 따윈 필요 없어.”

민감한 상태라 그런지 말투가 아까부터 차갑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앞으로는 편하게 대할게. 우리는 같은 조원이잖아?”

“단지 그뿐이야?”

“실은 너에게 개인적인 호기심이 있거든.”

“…나 같은 여자가 취향이야?”

메이의 눈빛에 살짝 경멸하는 감정이 어렸다.

그녀의 외모는 동년배에 비해 다소 앳된 편.

뭔가 오해하는 것 같았으므로 전요한은 한발 물러섰다.

“아니, 굳이 설명하자면 투자 가치가 있어서랄까.”

“투자 가치?”

“피의 갈망을 억제하는 법만 배우면 넌 지금보다 몇 배는 강해질 수 있어.”

“……!”

자신의 비밀에 대해서 속삭이자 메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조만간 기회가 올 거야. 그걸 놓치지 않도록 해. 옆에서 도와줄 테니까.”

“너, 대체 뭐 하는 녀석이야. 내게 뭘 원하는 건데?”

메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 후 전요한은 조용히 속삭였다.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그 능력을 빌려줘. 요구 조건은 그게 다야.”

혈액을 매개로 한 고위 마법은 여러 면에서 유용했다.

자신은 적합한 인자가 부족해서 「피의 구속」 정도만 다룰 수 있지만, 메이는 다르다.

“이해가 잘 안 가. 대체 뭘 하겠다고….”

영문을 몰라 혼란해하는 표정.

사춘기 소녀라 그런지,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모습이다.

요주의 인물이었던 메이의 마음을 뒤흔드는 전요한.

멜리사는 그런 그를 흥미롭단 반응을 보였다.

“호오….”

관리국 요원으로서 지켜볼 때부터 느낀 거지만 역시 보통이 아니다.

이번엔 과연 어떤 활약을 할지 기대하며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모의 연습.

서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므로 함께 합을 맞춰보는 건 필수였다.

“던전 내부로 진입하고 나면 예상치 못한 상황이 자주 발생하게 될 겁니다. 학내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실전에서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우니, 미리 대비를 해보도록 하죠.”

하나같이 수재라고는 하나 이들은 일반 던전도 몇 번밖에 공략해본 적 없는 초짜였다.

어느새 진지해진 표정의 아카데미생들과 마주 보며 멜리사는 모의 훈련을 시작했다.

* * *

모든 준비를 마친 생도들은 던전 내부로 진입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메말라버린 불모지와 짙게 내려앉은 잿빛 안개.

미궁형이 아닌 던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였다.

“망각의 고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분.”

기다리고 있었단 듯이 소악마가 재빠르게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것을 본 교류학생 한 명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안내자가 있는 걸 보니, 역시 신유형의 던전이 맞았네. 면접까지 봐가면서 지원하길 잘했어.”

무라사와 켄이치.

여기 모인 이들 중엔 성적이 부진한 편인데, 그래도 나름 수재 소리를 들을 만큼의 재능은 갖춘 녀석이다.

방금 기뻐한 이유는 일반 던전에선 얻지 못한다는, 특별한 보상 때문이었다.

다른 생도들도 입은 다물고 있지만 들뜬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신이 말한 망각의 고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훈련 교관인 멜리사가 소악마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충분히 적대하고도 남을 녀석이었으나, 다른 생도들의 안전을 위해 그는 공손한 태도로 일관하는 중이다.

“여러분의 눈엔 아직 안 보이실지도 모르겠네요. 뭐, 그건 조금 있으면 알게 되실 겁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소악마는 안내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녀석이 어디론가 향하자 멜리사는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앞장설 테니, 아까 연습한 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평상시엔 전형적인 삼각 대형을 유지하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전투가 발생하더라도 안정성을 어느 정도는 보장받을 수 있다.

전요한을 포함한 생도들은 고개를 끄덕인 후 걸음을 옮겼다.

앙상한 회갈색 나무 위에서 울어대는 까마귀 떼가 우리를 내려다본다.

‘감시자인가.’

이런 곳에 서식 중인 생명체는 던전을 지배하는 존재의 권속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그 존재는 고성의 은밀한 장소에서 현재 우리 모습을 지켜보고 있겠지.

별 상관은 없지만, 전요한은 그래도 해치우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휘이이익!

단검이 허공을 찢으며 날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목을 꿰뚫린 까마귀 한 마리가 힘없이 추락한다.

치지지지직!

아까부터 불길하다 여기던 교류학생 한 명이 뒤이어 전격 마법을 시전했다.

멜리사는 그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까마귀들을 죽인 건 단순히 기분 나빠서가 아니었군요. 좋은 관찰력입니다.”

관리국 요원으로서 멜리사 역시 둔감한 편은 아니었다.

녀석들에게서 희미한 마기를 느끼고는 단번에 그 존재 이유를 알아챈다.

“뭔가 사악한 녀석이 배후에 있나보네.”

“교활한 악마라도 되는 걸까? 잘 모르겠어.”

이런 유형의 던전에 익숙하지 않은 교류학생들이 저마다 쑥덕였다.

그때, 붉은 눈을 번뜩이는 괴생명체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

머리가 세 개 달린 사냥개.

생체 실험으로 태어난 키메라인데 고성 주위를 지키는 것이 놈들의 임무다.

여기저기서 개체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멜리사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불가피하게 전투를 한번 벌여야겠군요. 혹시 문제가 있겠습니까?”

“아뇨, 저희 실력이라면 아마도 충분할 겁니다.”

전력도 충분한데 굳이 처음부터 도망 다닐 필요는 없다.

전요한은 당당히 아르티나를 들어 올린 후, 눈앞의 사냥개를 향해 먼저 달려들었다.

풍압이 실린 아찔한 참격이 신속하고 빈틈없는 연계 동작을 통해 덩치 큰 사냥개의 옆구리를 노린다.

이어서 살갗을 파고드는 감각과 함께 검붉은 궤도를 따라 탁한 혈액이 한차례 흩뿌려졌다.

“우와, 저것 봐! 단 일격에 놈을 해치웠어!”

지면에 널브러진 사냥개를 내려다보며 교류학생들이 떠들어댔다.

“잡담을 늘어놓고만 있을 때가 아닙니다. 던전에 진입한 직후부터 실전평가는 시작되었다는 점, 명심하세요.”

멜리사는 거대한 참마도를 양손으로 우악스럽게 쥐어 들었다.

그러고는 달려드는 사냥개들을 거칠게 압살해갔다.

한편, 반대쪽의 메이는 자루가 긴 사이드를 춤추듯 휘두르며 휘둘렀다.

스슥―!

초승달 형태의 기다란 날로 추수를 하듯 사낭개들의 생명을 거두는 중이다.

“이제 좀 공략할 기분이 나네.”

여유가 없어진 분위기를 느끼며 전요한이 씨익 웃어 보였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왔던 사냥개 세 마리가 동시에 달려든다.

곧, 창백한 번뜩임과 함께 녀석들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실전성적 1등은 내 거라고.”

재능 좀 있다고 까부는 애송이들 따윈 가볍게 제칠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시르케를 아카데미에 두고 왔어도 별 걱정이 없다.

그녀 대신 보조해주는 채린을 옆에 둔 채, 전요한은 다시 아르티나를 들어 올렸다.

* * *

몇 차례의 전투를 더 치르며 나아간 결과, 안개 너머로 고성의 실루엣이 보였다.

“고성 주위도 확인하고 가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물론, 곧바로 진입하는 방법도 나쁘진 않습니다.”

잠시 멈춰 선 멜리사가 선택지를 내밀었다.

각각의 조원들은 서로 모여서 열띤 의논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번 실전은 상대평가인 만큼, 조별 경쟁에서 앞서가려면 공략 방법이 중요했다.

“아까 전리품으로 주운 쪽지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어.”

사이드를 어깨에 기댄 채 메이가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알려주는 단서라기엔 내용이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다.

“그 의미는 위험을 감수하라는 것일까? 하지만 달리 시도할 만한 게 없어 보이는데….”

다른 조원들보다 앞서가고 싶었던 채린이 생각에 골몰했다.

전요한도 고심하다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죽음과 관련된 것이라면 망자일 수도 있겠네.”

망자의 안식을 위한 장소는 바로 공동묘지. 불과 얼마 전에 지나쳐 온 곳이었다.

“확실히 가능성은 있어 보이네. 한번 다시 가보자.”

“전리품으로 나온 단서인데, 분명 뭐가 있긴 할 거야.”

조금 뒤처지더라도 확인해볼 가치는 있었다.

두 여생도가 동의하자 전요한은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하자 저만치서 나타난 해골 궁수가 활시위를 겨눴다.

전요한은 날아오는 독화살을 튕겨낸 뒤 녀석을 향해 오러를 날렸다.

콰드득!

고도의 영력으로 발현된 오러는 상식 이상의 절삭력을 지녔다.

단번에 분쇄된 뼛조각들이 바닥에 널브러진다.

“이곳을 자세히 조사해보자. 방해꾼은 적당히 제거하면서.”

공동묘지를 지키는 언데드는 사냥개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기이한 소리를 내면서 이가 빠진 장검을 들고 다가오는 해골 병사들.

움직임이 느리기에 가끔씩 날아드는 독화살과 조잡한 함정만 주의하면 된다.

이따금씩 덤벼드는 잔챙이들을 처리하며 전요한은 주위를 살폈다.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비석.

외형상으로는 모두가 동일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드르르륵.

멈춰 서서 해당 비석을 뒤로 밀어내자 비밀 통로가 드러났다.

그것을 본 채린과 메이가 놀란 반응을 보인다.

“어떻게 찾아낸 거야?”

“신기해….”

아직 숨겨진 비밀 통로를 찾기엔 단서가 부족하긴 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우연이라고 넘어갈 수 있었다.

“운이 좋았네. 느낌이 수상해서 한번 시도해본 건데.”

“…수상하네.”

어딘가 숨기는 구석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메이는 나를 향해 의문의 눈빛을 남겼다.

하지만 그뿐.

당장 공략에 집중해야 했기에 캐묻거나 하진 않았다.

“발을 내딛을 때 조심해. 생각보다 가파르니까.”

먼저 비밀 통로 안으로 들어서며 전요한은 마력 수정을 허공에 띄웠다.

이후 마력 수정은 은은한 빛을 발하며 비탈진 계단 아래쪽의 모습을 시야에 드러낸다.

한 걸음씩 계단을 내려가니 저 아래에서 배회하고 있는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여기가 바로 숨겨진 루트인 모양이로군.’

본격적인 공략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