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생존 경쟁 (1)
시르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다음 날이었다.
- 혹시 오늘 오후에 시간 있어?
채린의 문자 메시지였다.
마치, 개인적인 용무로 불러내려는 듯한 어감이다.
평소처럼 학생회장으로서의 업무를 미리 내세우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별 상관없다 여긴 전요한은 대수롭지 않게 답장했다.
- 마침 여유가 있긴 해. 급한 용무라도 있어?
-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너와 단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채린은 구체적인 용무를 말하지 않았다.
약속 장소도 학외로 잡은 걸 보면, 다른 생도들의 이목을 최대한 피하고 싶은 모양이다.
- 알겠어. 그럼 약속 장소에서 보자고.
채린의 상태가 괜찮은지 할 겸 요청을 수락했다.
저번에 정혼자에게 심한 모욕을 당했는데, 그로 인해 충격을 받진 않았는지 걱정된다.
아직 현장 실습을 준비하는 기간이어서 날이 저물기 전까지의 외출은 허용된다.
“생각해보니 이번 달 용돈도 들어왔었네.”
상급생의 품위유지비로 300만 원이 통장에 입금된 상태다.
그간의 활약을 생각하면 서너 배는 올려줘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뭐, 그래도 당장 생활하기엔 딱히 지장 없으니까.”
따지고 보면, 이것도 아카데미 생도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오로지 성장에만 전념하면서 지속적인 수익이 발생하는 것 말이다.
만약 아카데미에 입학하라는 관리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용돈벌이를 위해 이런저런 잡다한 일을 하게 되었을 터다. 번거로운 데다가, 이렇게 여유를 부릴 틈도 없었을 테지.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자 싱그러운 봄바람이 얼굴을 강타했다.
“어디선가 벚꽃 향기가 나네.”
입학할 당시만 해도 조금 쌀쌀한 겨울 날씨였다.
당시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는 시간이 흘렀다는 게 느껴진다.
하긴, 그동안 제법 많은 일이 있었다.
질투의 죄악을 쓰러뜨렸고, 지금은 메르키오르 재단의 음모와 마주하고 있지.
되도록 별일 없이 지내고 싶었지만, 세상은 전요한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 다음 역은 신촌, 신촌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목적지에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안내 음성이 들려온다.
하차해서 인파를 따라 걷자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채린의 모습이 보였다.
“예상보다 빨리 왔네.”
“그러는 너야말로. 얼마나 일찍 도착해 있었던 거야?”
“30분 정도. 이렇게 외출하는 건 드문 일이라 여유롭게 준비하고 싶었어.”
채린이 긴 생머리를 매만지며, 청순한 매력을 한껏 뽐냈다.
트렌디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회색조의 롱 코트가 그녀와 잘 어울린다.
“그럼 어디로 갈까?”
“우선 근처 카페로 가자. 미리 알아둔 곳이 있어.”
데이트 코스라도 짜듯, 채린은 사소한 이동 경로까지 계획해 두었다.
함께 거리를 걷고 있으니 옆을 지나치는 사내들의 눈빛에 시기가 어렸다.
‘기분 나쁘게 쳐다보네.’
부러움 섞인 표정들을 보며 전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반면, 채린은 그런 시선이 나쁘지 않은지 안색이 밝아졌다.
“우리들, 주목받는 거 같네.”
“그러게. 마스크라도 착용하고 올 걸 그랬나.”
최근에 변이 바이러스가 확산되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곤란한 상황인 듯하지만 헌터에겐 무의미한 일이다.
이능력을 각성한 이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류의 바이러스 따위에 면역력을 지니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답답하겠네. 감염자 수가 늘어날 때마다 엄격한 방역 지침에 따라야 하니까.”
“응, 한동안은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할 거야. 어딜 가나 무분별한 녀석들은 있겠지만.”
최근의 화젯거리를 떠들어내던 두 사람은 어느덧 카페로 들어섰다.
빈티지한 소품으로 장식된 공간.
아늑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보기에 제법 괜찮았다.
“그럼 슬슬 용무를 이야기해 볼래? 아카데미에 뭔가 골치 아픈 사건이라도 터진 거야?”
의자에 걸터앉은 전요한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채린은 커피를 주문한 후 그의 표정을 가만히 살폈다. 그녀는 어쩐지 뾰로통한 모습이었다.
“별일 없으면 불러내면 안 되는 거야?”
“응?”
예상치 못한 반문에 전요한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화장부터 해서 옷차림까지 제대로 준비하고 나온 모습이다.
‘내게 관심이라도 있나?’
입학 초기와는 달리 외모가 훤칠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집안에서 정혼을 해둔 상대가 있다고 해도, 연애는 별개의 문제인 건가.
아니면 자신의 욕망에 더 솔직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던 전요한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못 만날 건 없지. 아니, 원한다면야 매일 만나도 괜찮을걸?”
“그래? 사실,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내심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모습의 채린이었다.
그녀는 쑥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고맙다고?”
“으응. 그러니까, 저번에 나타나서 내 약혼자가 나쁜 짓을 하려던 걸 막아준 거….”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는지 채린은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제법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로서 도와준 것뿐이야.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치, 친구로서?”
“그래. 비록 기수는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학년이잖아?”
전요한은 씨익 웃으며 이를 드러냈다.
그 모습에 채린은 살며시 미소 짓더니, 조신하게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후 본심을 흘리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내뱉는다.
“너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졌어. 조금 도와줘도 괜찮겠어?”
그녀로서는 여러 가지로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전요한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그런데 감당할 수 있겠어? 나와 함께 다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앞으로도 어떤 위협이 찾아와서 모두를 절망에 빠뜨릴지 모른다.
채린은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해둔 것 같지만, 다시 한번 의사를 묻고 싶었다.
전요한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채린은 손가락에 있는 약혼반지를 빼냈다.
“무엇이든 감수하겠어. 나, 이제는 주위의 구속 따위엔 연연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값비싼 약혼반지는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전요한이 보기에 그것은 더 이상 한낱 귀금속이 아니라, 운명의 주사위처럼 느껴졌다.
‘재벌가의 이해관계에 더는 놀아나지 않겠다는 건가.’
채린은 메르키오르 재단의 음모에 대해서도 조금은 눈치채고 있었다.
한층 성장한 그녀의 눈동자에서 굳건한 의지가 엿보인다.
[채린]
잠자는 숲속의 마녀(★★).
여전히 곤경에 빠져 있으나 당신의 도움으로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녀가 포기하지 않도록 계속 이끌어준다면, 언젠가는 그 보답을 후하게 받을 것입니다.
그동안 서로 부대끼는 일이 많아서인지, 누구보다도 관계 진전이 빠른 채린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잠재력은 빙산의 일각 정도로밖에 드러나지 않았다.
전요한은 앞으로 이렇게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 늘려도 좋겠단 생각을 했다.
“아무튼, 이따가 뭐 하고 놀까? 재벌가의 영애랑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네.”
“답답한 신분에서 벗어날 겸, 오늘은 서민적인 코스로 잡아 봤어.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좋아.”
말을 마친 채린이 눈을 빛내며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보여주었다.
완벽한 데이트 코스.
함께 사진을 찍는 위치까지 정해놓는 치밀함에 전요한은 혀를 내둘렀다.
“계획성이 투철하구나, 너.”
“내겐 소중한 시간이야. 그러니 성실하게 에스코트해 줘. 네 부탁도 사소한 건 조금 들어줄 테니까.”
“사소한 부탁?”
“…어, 없으면 말고.”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른 채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서두르라며 전요한의 팔목을 붙잡았다.
“이야기는 이만하면 됐어. 어서 가자.”
마음속의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기엔 그녀는 아직 어렸다.
무안한 표정으로 뒤돌아서는 모습을 보며 전요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 * *
아카데미 본교로부터 조금 떨어진 위치의 고층 빌딩.
메르키오르 재단의 이사회 임원들은 한자리에 앉아 중대한 사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 아이의 영향력이 상당하군요. 이대로 내버려 둬도 될지 잘 모르겠어요.”
임원들 중 한 여인이 전요한의 존재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줄곧 지켜보고는 있었지만, 그동안의 행적이 예상을 뛰어넘는다.
“별문제는 없을 걸세. 유명학 국장이 직접 관리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문제가 된다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네.”
의장직에 앉아 있는 사내가 걱정 말라며 여유를 부렸다.
서창곤.
막강한 재력으로 이사회를 이끌어온 그는 서창민의 친부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군. 우리가 친목을 위해 열었던 사교 모임까지 나타나서 행패를 부릴 줄은.”
옆쪽에서 가만히 있던 사내가 기분 나쁘다는 듯 툴툴댔다.
고태석.
예스러운 안경을 고쳐 쓰는 모습이 어지간히도 고리타분 해보였다.
“자네의 아들이 얻어맞은 일은 유감이네. 하지만 채씨 일가의 여식에게 실례를 범한 것도 사실이니 더는 이의 제기를 하지 말게나.”
나지막한 어투로 달래던 서창곤의 시선이 반대편으로 향했다.
채강준.
이능력자 남매를 자식으로 둔 그가 무덤덤한 얼굴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딱히 할 말이 없는가? 자네의 딸이 모욕을 당한 것이 신경 쓰인다면 지금 발언하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끼리 투덕거린 일인데, 무슨 언급이 더 필요하겠나? 그보다는, 얼마 전에 등장한 신유형의 재해가 급선무네.”
채강준이 언급하는 건 얼마 전 동해안에 모습을 드러낸 던전 게이트였다.
상징체의 모습을 본떠서 일단 제단형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아직까진 아무런 정보가 확인되지 않았다.
“학내에서 소란이 일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네. 그때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관리국에 맡기는 편이 어떻겠나?”
벽면의 스크린에 출력된 사진 자료를 보며 서창곤이 먼저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자 강경파인 채강준은 곧바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위험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아카데미의 우등생들을 우선적으로 투입해야 하네. 확실한 인간 병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비전 아니던가?”
조만간 완공될 학원도시를 수호하는 최정예 전력이 그들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다.
관리국의 영향력조차 미치지 않고,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상태에서도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소국가의 완성.
그 위에 군림하며 절대적인 지배층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메르키오르 재단의 검은 야욕이었다.
설령 그 희생양이 자신의 친딸이 될지라도 채강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분명, 성과는 있었지. 희귀한 확률로 숨은 잠재력을 드러낸다는 각성자가 학내에서 나타났으니까.”
현재 학생회장인 채린을 떠올리며 서창곤은 만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이사회 임원 모두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번 안건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재들에게 다시 한번 미래를 맡겨보도록 하세. 설레발일지 모르지만, 이번에도 뜻밖의 소득이 있을지 모르겠군.”
마침 학내에 동아시아의 교류학생들이 와 있었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국내 출신의 생도들은 더욱 가파른 성장을 요구받게 될 터.
지난 사례의 성공에 기대감을 내비치며 이사회 임원들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