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학내 활동 (3)
허겁지겁 달려가서 전화를 받은 정서희가 공손한 말투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상부의 고위 인사에게서 걸려온 전화인가.’
전요한은 흥미 없단 표정으로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후, 수화기를 내려놓은 정서희가 한숨 돌린 표정으로 뒤돌아본다.
“다행히도 잘 해결되었어요. 당사자였던 고태훈의 집안에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대요.”
씩씩거리며 정학 처분이라도 내릴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왜 호의를 베푼 거죠?”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주위의 시선을 고려한 거죠. 요한 씨는 지금 여러 곳에서 주목받고 있는 대상이니까요.”
정부의 여러 기관이 눈여겨보는 대상인 만큼, 함부로 손을 대기는 어려웠다.
대신, 더는 사고를 치지 못하도록 앞으로의 일정을 빠듯하게 진행한다고 한다.
“앞으로의 일정?”
“상급생의 실습 기간을 말하는 거예요. 1, 2학년과는 달리 현장에 나가서 훈련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주로 던전을 공략하거나, 필드 레이드에 참여하는 식이었다.
난이도는 각자의 역량과 성적에 맞춰서 정해지므로, 앞으로는 최상위권의 생도들과 마주치는 일이 많아질 터였다.
“최상위권이라. 별로 그렇게 부를 만한 애들이 별로 없던데.”
“교류학생으로 오는 생도들은 실력이 나쁘지 않을 거예요. 요한 씨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겠지만요.”
정서희도 이제 그의 실력은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다.
그간의 활약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을 때, 멜리사가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여기에 있었군요.”
멜리사는 전요한에게 다른 용무가 있어 보였다.
“이번엔 뭔가요? 필드 레이드라면, 당분간은 뛸 생각이 없습니다만.”
며칠 전, 거대 라비리스타를 잡고 나서 무려 2억 원을 챙겼다.
그 정도면 당분간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터다.
전요한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씨익 웃자, 멜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보군요. 저도 필드 레이드나 뛰고 다닐 정도로 여유로운 처지는 아니에요.”
“그럼 중요한 임무라도 수행하는 중인가 보죠?”
“네, 바로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과도 관련 있죠.”
멜리사가 여기로 온 목적은 전요한을 실전에서 지켜보는 것 이외에 하나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아카데미의 배후라고 할 수 있는, 「메르키오르 재단」의 음모를 알아내는 일이다.
“음모라고요?”
전요한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한편, 정서희는 뭔가 들은 게 있는지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관리국의 고위직들이 정계 인사들과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는 프로젝트 말인가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선배인 이수연이 떠나기 전 얼핏 정보를 흘린 적이 있었다.
“6과 요원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니, 재미있네요. 하지만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모를 거예요.”
“대체 뭐길래요?”
흥미가 동한 전요한은 귀를 기울였다.
메르키오르 재단이라면, 서창민과 채린도 관련이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우선은 협조를 하겠다는 약속부터 받아야겠어요.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멜리사는 비밀 엄수의 의무가 있는지 말을 아꼈다. 의문을 표하는 두 사람에게, 멜리사가 설명을 이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유명학 국장이 두 사람은 예외로 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한다.
“어째서 저희만?”
“남들과 달리 협조할 필요가 있는 건가요?”
정서희와 전요한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멜리사는 희미하게 웃은 후, 유명학 국장의 의도를 설명했다.
“저를 비롯한 다른 요원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계받고 있어요. 그러니 내부인을 포섭하는 거죠.”
“아….”
정서희가 이해했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관리국 내에서도 극비리에 조사 중인 사건이니, 확실한 인물이 아니면 협력을 요청하기 어려웠다.
“의외네요. 관리국 국장은 여전히 저를 의심하는 것 같았는데.”
“의심하기 보단, 조심스럽게 관찰해본 거죠.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보려면 데이터가 필요하니까요.”
멜리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요한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쯤은 굳이 관리국 요원이 아니어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하며 집요하게 파고들 생각까진 없었다.
“우리가 특히 궁금했던 건, 당신의 가능성이었어요. 과연 어느 경지까지 성장할 수 있는 이능력자인가. 유명학 국장님도 그 점을 주의 깊게 보라고 하셨죠.”
“그에 대한 결론은요?”
전요한은 혼자서 팔짱을 낀 채 기대어린 눈빛을 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고민하던 멜리사는 판단을 아끼기로 했다.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애초에 4성 이상의 이능력자가 관찰된 적도 없고, 당신과 함께 다녀본 건 저번의 필드 레이드뿐이니까요.”
4성 그 이상의 경지는 인류에게 있어선 아직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멜리사가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자 전요한은 싱겁단 표정을 지었다.
“뭐, 계속 지켜보시면 알게 되겠죠. 그보단 메르키오르 재단에 대해 더 할 말이 있지 않나요?”
비밀리에 꾸미는 음모를 파헤칠 생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는 관리국의 고위직, 정계의 주요 인사이니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에 국외에서 파견 온 교류학생들이 많죠? 그들로 인해서 어수선해진 틈을 타 정보를 알아낼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눈과 귀를 활용하겠단 거죠? 각자의 위치에서 아카데미 내부 상황을 살펴볼 수 있으니까.”
전요한이 정곡을 찔렀다.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인 후 양쪽의 의사를 물었다.
“어때요, 해볼 건가요? 만약 성과를 거둔다면 나름의 보상이 주어질 거예요.”
“구체적으로 어떤 건데요?”
보상 이야기가 나오자 정서희가 눈을 빛냈다.
“그쪽의 경우엔 1단계 특진. 전요한, 당신에겐 관리국에서 특별한 조건으로 스카우트를 제의할 거예요.”
단순히 관리국의 잡일을 돕는 수준이 아니었다.
최상위권의 전력을 갖춘 만큼, 그에 맞게 예우도 해주고 특별한 지원도 해준다고 한다.
전요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유명 길드에 들어간다고 귀찮게 스펙 쌓는 것보단 낫겠네요.”
“잘 생각했어요. 당신처럼 독자적으로 움직일 필요성이 있는 유형은 관리국에서 활동하는 편이 낫죠.”
멜리사는 일전에 악마들이 줄곧 그를 노렸던 사실을 언급했다.
앞으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면, 소속 길드의 입장으로선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일하지, 죄악의 사도 따위를 막으려는 게 아니니까.
이래저래 따져 봐도 전요한이 가까워져야 할 쪽은 관리국이었다.
“그 관리국의 고위직을 염탐하는 임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니, 골치 아프네요.”
대충 상황을 정리해본 전요한이 한숨을 쉬었다.
자칫 잘못하면, 상당히 귀찮은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서창민과 채린 때문이었다.
“아무튼, 슬슬 듣기로 하죠. 메르키오르 재단의 음모란 것에 대해서.”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음… 일단은 관리국의 창설 배경부터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네.”
서두가 장황한 걸 보니 제법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이것저것 설명하는 멜리사를 보며 전요한은 귀를 기울였다.
* * *
“그러니까, 이곳의 재정을 담당하는 귀족들이 도시국가를 건설하려고 모의 중이란 말인가요?”
시르케는 나름 자신의 세계관대로 이해한 것 같았다.
딱히 틀린 부분은 없었기에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한 영역을 유지하려면 세계적인 전력을 보유한 이능력자도 필요할 거야. 그래서 아카데미의 우등생들을 위험한 던전으로 떠미는 거지.”
“그 과정에서 인재가 얼마나 희생되건 상관하지 않는단 건가요. 지저분한 계획이군요.”
시르케는 메르키오르 재단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머리를 꼬았다.
그녀가 짜증이 날 때면 자주 하는 버릇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혼자서는 너무 멋대로 돌아다니지 말란 거야. 어디든 전에 소개한 인물들하고 동행해줘.”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저기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는데, 아쉽게 되었군요.”
시르케는 모니터에 띄워놓은 관광명소들을 바라봤다.
개중엔 천체의 움직임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천문대도 있다.
“모처럼 이쪽 세계로 넘어온 건데, 미안해. 전부 다 돌아다니긴 당분간 힘들 것 같네.”
전요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무안해했다.
그러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시르케의 어깨 위에 손을 얹는다.
“생각해보니,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장소는 당일치기로 갔다 올 수 있을 것 같아.”
“배려해주는 건 고맙지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야. 내겐 이야기가 잘 통하는 교관이 있거든.”
원칙주의적인 실비아를 말하는 건 아니었다.
이번에 자신의 담당 교관으로 파견 온 멜리사.
그녀라면 시르케의 고민거리를 진지하게 들어줄 것이다.
‘차원을 넘어온 이종족도 함께 보호한다고 했었지.’
관리국의 입장에서 시르케의 존재는 놀라웠다.
전대미문의 영계 마법을 시전하는 하프엘프.
그녀가 특별하게 대우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불순한 목적으로 노리는 이들도 있을 테니 항상 곁을 지켜줄 수호자가 필요하다.
‘만약 시르케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녀석이 있다면 전부 없애 버리겠어.’
몰래 음모를 꾸민다는 메르키오르 재단도 단번에 박살을 내버릴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후, 전요한은 멜리사를 호출했다.
“대충 이해는 했어. 현장 답습이란 명목으로 시간을 내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
멜리사는 잠시 사라지더니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히 빠르네요?”
“실비아에게 이야기했더니 금방 처리해줬어.”
물론, 그녀에겐 어디까지나 현장답습이란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럼 출발하죠. 시르케가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전요한은 곧장 떠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거울에 비친 시르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깐, 왜 아직도 이세계의 복장을 하고 있는 거야?”
“그야, 한 번도 기숙사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으니까요.”
시르케는 당연하단 듯이 지팡이를 흔들어 보였다.
어두운 색감의 로브를 걸친 채, 눈에 띄는 고깔모자를 눌러쓰고 있다.
이세계에서는 별로 이목을 끌지 않겠지만, 여기는 다르다.
“고집 피우지 말고, 전에 가져다준 생도복으로 갈아입어. 쓰리 사이즈는 서희 씨가 대충 맞는다고 했으니까.”
“…알겠습니다. 거울 앞에서 갖다 대보니 조금 어색하길래 안 입은 건데, 하는 수 없군요.”
시르케는 잠시 뒤로 돌아서 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 몇 분 정도가 지나자, 거들어주던 정서희가 암막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이종족이라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기대 이상이네.”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건, 이제 막 입학한 듯한 분위기의 미소녀였다.
흑묘 캣시가 아담한 어깨 위에 올라타며 교태로운 소리를 낸다.
실제 나이는 100살이 넘었지만, 하프엘프인 덕분에 겉모습은 10대의 여자아이다.
“이쪽의 남생도들한테 인기 많겠네, 시르케.”
“저속한 발정의 대상이 되는 건 사양입니다.”
흥미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시르케는 거울 앞에 섰다.
짧은 치마 밑으로 드러난 각선미가 본래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괴리감이 있었다.
“귀찮아질 것 같으면, 네 남자친구인 척 행세해줄 수도 있어.”
“그것도 싫습니다. 당신은 제게 있어 어린아이 같은 존재니까요.”
시르케는 연달아 부정적인 말만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들뜬 모습이었다.
그녀가 모든 준비를 마치자, 전요한은 기분 좋은 듯이 흥얼거렸다.
“이것저것 잔뜩 둘러보고 오자고! 모처럼의 외출이니까!”
이쪽 세계에 문외한인 동료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내심 두근거려 하는 시르케의 손을 잡은 채 전요한은 문밖을 나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