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학내 활동 (2)
샹들리에의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무도회장이었다.
테이블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고, 고풍스러운 음악이 실시간으로 연주되고 있다.
상류층들에게만 허락된 공간.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입었으나 채린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여긴 날 위한 곳이 아냐.’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같이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거나 가문 간의 결속을 요청하는 내용들이다.
주위를 둘러싼 이들 중에 무도회의 분위기를 즐기러 찾아온 부류는 없었다.
그저 사교 모임을 이윤 창출의 기회로 이용해 먹으려는 하이에나들일 뿐.
본심을 숨긴 채, 입을 가리며 하하 호호 웃는 모습들이 가식적으로만 보였다.
‘이런 옷이나 입고 바보처럼 서 있어야 하다니.’
공주들이나 입을 법한, 고상해 보이는 장식의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허리는 꽉 조이고 가슴골이 심하게 파여 있어서, 남자들의 눈빛을 받아내기가 민망했다.
“제법 잘 어울리는걸? 역시 내 예비 신부다워.”
백색의 턱시도 복장을 차려입은 사내가 다가왔다.
고태훈.
최근 신소재 산업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채씨 가문이 1등 신랑감으로 고른 인물이었다.
“…입 발린 칭찬은 그만해.”
채린은 그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고개를 홱 돌렸다.
신사적인 복장을 하고는 있으나, 표정이 벌써부터 보기 안 좋게 음흉해져 있다.
“아직도 나를 제대로 된 정혼자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야? 너희 아버지가 확장 중인 사업은 우리 집안의 도움을 받아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거 잊었어?”
고태훈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자신의 가치를 강조했다.
언젠가 신소재 산업의 유명 계열사를 승계받게 될 유력자.
적장자가 몬스터 잡는 일이나 하겠다며 뛰쳐나간 채씨 가문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비록 그 인품과 성향에 ‘사소한 결함’이 있더라도.
“네가 나를 원한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참다못한 채린이 흘끗 쳐다보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고태훈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네가 계속 반항한다면, 나도 좋은 수가 있어. 어차피 미래를 약속한 사이인데 하룻밤 정도는 괜찮겠지?”
본래대로라면 그는 확실히 마음을 빼앗은 후에 몸도 취할 계획이었다.
안 그래도 이런저런 사고를 많이 친 터라, 더는 구설수에 오르지 않길 바랐으니까.
그런데 채린의 짜증 나는 언행을 계속 받아주자니, 마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하룻밤? 대체 무슨 소리야?”
“잘 알면서 모르는 척하긴. 이따가 무도회가 끝나면 함께 즐기러 가보자고.”
뒤편으로 다가온 고태훈이 기대된단 듯이 속삭였다.
허리 쪽을 더듬거리던 손이 서서히 드레스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뭐, 뭐 하는 짓이야!”
화가 난 채린이 고태훈을 밀쳐냈다.
주위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얼음 덩어리 만드는 거 말고는 아무 능력도 없는 년이….”
처음부터 반항적인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다.
몬스터나 때려잡는 헌터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결혼식을 올리고 난 후엔 때려치우게 하고 집안일이나 하도록 만들 것이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전리품을 길들이기 위해, 고태훈은 저열한 방법을 썼다.
“이번에도 내 손길을 거부하면, 메르키오르 재단 임원의 아들로서 실력행사를 하겠어.”
“실력행사?”
“그래, 아카데마와 관련한 지원금을 절반 삭감하도록 아버지를 설득할 거야.”
아카데미의 지원금 중엔 성적이 부진한 생도를 재교육하거나 기초적인 훈련 설비를 늘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산이 절반이나 줄어들면, 학업 면에서 뒤처지는 신입생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무고한 후배들을 인질로 하는 협박에 채린은 몸을 떨었다.
“그런 비열한 짓을….”
“아직 결정된 사항은 아니야. 네가 조금만 더 순종적으로 응해준다면, 오늘 밤이 지나고 한번 생각을 바꿔 볼게.”
초저녁부터 취기가 올라서 문득 여색을 탐하고 싶어진 고태훈이었다.
돈만 주면 애교 떨며 달려드는 싸구려 창부들보단 이쪽이 낫지.
저 도도한 표정을 치욕스럽게 망가뜨리고 나서 느낄 정복감을 생각하니, 기분이 한껏 설렜다.
“우,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거절할 수 없을 걸? 예산이 삭감된 원인이 네 반항적인 행실 탓인 걸 알면, 생도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최근 학내에서 벌어진 사건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침을 발라놓은 예비 신부에게 자꾸 접근한다는 그 초단기 진급생.
조만간 녀석도 손을 봐줄 겸, 아카데미의 예산 삭감에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숨겨 왔던 본심을 밝히며 입꼬리를 올리는 고태훈.
채린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어, 어쩌지.’
그동안 허술하게나마 핑계를 대며 녀석의 스킨십을 피해 왔다.
하지만 이번엔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변태적인 표정으로 침까지 조금 흘리는 모습이 가관이라면 가관.
오늘 밤 자신에게서 원하는 것이 뭔지 엿볼 수 있었다.
“어느 쪽이 우위인지 확실히 깨달았으면, 더는 거부하지 말라고? 으흐흐.”
다시금 달라붙은 고태훈이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채린의 몸을 더듬었다.
참기 어려운 치욕감을 느낀 채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얘들아, 미안….”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노리개 취급 받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설령, 자신이 비난당하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으응?”
순간적으로 손가락이 얼어붙자, 고태훈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무시하고 계속 스킨십을 시도하기엔 위험한 냉기다.
“건방지게 마법을 써?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의아함은 곧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변했다.
노발대발 화를 내며 품에서 호신용 전기 충격기를 꺼내 든다.
“꺄악!”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전류에 당한 채린이 바닥에 쓰러졌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을 때였다.
“네가 뭔데 린을 괴롭혀?”
배후로부터 누군가가 이의 제기를 해왔다.
뒤돌아본 고태훈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요한.
그럴듯한 집안 배경도 없는 그가 무도회에 참석해 있다.
“어떻게 여기로 들어왔냐? 보안이 허술하진 않았을 텐데.”
“뭐, 인맥을 좀 빌렸지.”
몸을 풀던 전요한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자 서창민이 옆쪽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초대했어. 너도 알겠지만, 우리 아버지가 재단의 이사장이거든.”
메르키오르 재단을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건 서씨 집안이었다.
뒷배가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자, 고태훈은 일단 넘어갔다.
“그런 거였나.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긴 한데, 같은 임원가의 자제로서 존중은 하지.”
“그걸로 끝날 일이 아냐. 넌 내가 좋아하는 애한테 망신을 줬어.”
서창민이 조금 전의 폭행을 걸고 넘어졌다.
노골적인 질타를 받자 고태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좋아하는 애라고? 이봐, 린은 내 약혼녀야. 네가 짝사랑을 하든 말든 이건 우리 둘이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주위의 다른 인물들은 수군거리기만 할 뿐, 일절 간섭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의장의 아들이라고 나서는 것이 고태훈의 눈엔 보기 좋지 않았다.
“단지, 약혼일 뿐이지 아직 혼인한 사이는 아니잖아? 실제로 사이도 좋지 않고 말이야.”
하지만 서창민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전요한이 시킨 것도 있지만, 그 역시 채린이 막 대해지는 걸 평소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좋아하던 여자애가 질 나쁜 녀석에게 한 대 얻어맞았는데, 사내로서 나서고 싶은 게 당연했다.
비록 고태훈 대신 정혼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지켜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한결같다.
‘파장이 조금 커질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부담이 전혀 안 되진 않는지, 서창민의 시선이 옆쪽으로 향했다.
전요한.
이제 녀석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줄 차례였다.
“창민이가 말한 대로, 린은 네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컬렉션 따위가 아냐! 상대 마음조차 배려해주지 않으면서 정혼자를 자처할 권리는 없어!”
말을 마친 전요한이 곧바로 현란한 발차기를 날렸다.
턱을 얻어맞은 고태훈은 사색이 되어 테이블 쪽으로 나가떨어졌다.
와장창창! 하는 소음과 함께 위선적인 무도회의 분위기가 보기 좋게 깨졌다.
“크윽….”
엉망진창이 된 채 쓰러진 고태훈이 신음을 흘렸다.
녀석을 뒤로한 채, 전요한은 웃으며 아래쪽으로 손을 뻗었다.
“자, 기죽지 말고 일어나. 이렇게 저급한 무대 따위로는 너의 가치를 빛낼 수 없으니까.”
“…응.”
채린이 얼굴을 붉히며 전요한의 손을 붙잡았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서 도와주는 그의 모습이 지금 이 순간만큼 눈부신 적은 없었다.
‘너는 정말로 내가 어렸을 때부터 기다려 왔던 ‘그 사람’인 걸까.’
아직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고 신비한 꿈이었다.
그곳에서 자신은 눈보라 치는 숲속에 홀로 잠들어 있는 요정이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봄을 기억한 채.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찰나에 어디선가 한 사내가 다가왔다.
- 드디어 찾았다.
이상하게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자였다.
알 수 있는 건, 단지 혹한 속에서도 가슴 따뜻한 마음의 온기가 느껴졌다는 사실.
아득한 그리움에 살며시 눈을 떴을 때, 그가 손을 내밀었다.
- 조금 늦었지만, 약속을 지키러 왔어.
반드시 구해주러 오겠단 약속.
이번 생이 아니라면 다음 생에라도 찾아내겠다는 결의만으로, 사내는 저주받은 「빙해의 숲」을 단신으로 헤쳐 온 것이었다.
온몸에 남아 있는 수많은 상처는 그가 무릅써야 했던 위험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끝내 대답을 듣지 못했다.
- 나와 함께 나아가자. 이번에도 함께.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망설이다 그의 손을 붙잡았다는 것뿐.
‘구원받았다’라고 처음 느낀 감정이었기에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것이 만약 전생, 아니 꿈속에서의 경험에 불과할지라도 함께 공유하는 기억이라면….
‘언젠가 그 사람은 반드시 날 찾아와서 당시와 같은 말을 해줄 거야.’
그렇기에 채린은 기대했다.
눈앞의 사내가 기억 속의 대사를 내뱉어 주기만을.
하지만 그것을 얌전히 기다리기엔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갔다.
“분위기 좋은 건 아는데,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일단 자리를 피하자고.”
서로 마주 보는 두 남녀를 향해 서창민이 헛기침을 했다.
고개를 돌리니, 험상궂게 생긴 보안 직원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저 녀석들하고까지 마찰을 벌이면 왠지 내일 아침 뉴스에 나올 것만 같네.”
전요한이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채린을 공주님 안기 한 후,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뒤는 맡기마, 창민아!”
그렇게 해서 무도회의 불청객은 화려하게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서창민이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아버지한테 혼나는 일만 남았네.”
그래도 고태훈에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니 기분만은 나쁘지 않았다.
* * *
“이번엔 대형 사고를 치셨더군요.”
사무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정서희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전요한은 무안한 표정을 지어 보인 후, 소파에 앉았다.
“뭐, 따지고 보면 잘못은 고태훈이 했습니다. 약혼녀라고 해도 그렇게 멋대로 뺨을 때리면 안 되죠.”
“요한 씨는 제삼자잖아요. 끼어들더라도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했어야….”
상위 계층만 참여하는 무도회에서 난리를 피웠으니, 그 여파가 상당할 것이다.
관리국의 일개 요원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
정서희가 상부에 경질당하는 걸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띠리링.
사무실의 전화기에서 수신음이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