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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64화 (64/180)

제64화. 학내 활동 (1)

“뭐, 뭐야 갑자기?”

갑작스러운 결투 신청에 채린은 흠칫하며 물러섰다.

먼저 자세를 잡는 메이에게서 흉흉한 기운이 느껴진다.

“네가 얼마 전에 「각성」을 한 이능력자라고 들었어. 그런 상대와 맞붙어 볼 기회는 흔치 않지.”

메이는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녀가 먼저 돌격해오자, 채린은 황급히 마력역장을 전개했다.

그러고는 빙벽을 세우며 공격 마법 시전을 위한 시간을 벌고자 했다.

스겅!

하지만 메이가 조금도 틈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핏빛으로 물든 사이드가 단번에 빙벽을 갈라버린 후, 금방 목전으로 날아왔다.

“으윽!”

채린은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마법사로서는 결코 허용해선 안 되는 안전거리가 있다.

상대가 그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어, 어떻게 하지?’

주위의 마력역장이 생성하는 빙결지대만으론 메이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채린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최초로 각성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절망 속에서 날아오르길 원했던 마음.

동경하던 이에게 손을 뻗어 닿고자 했던 열망이 아직도 가슴 한편에 사그라들지 않는 불씨로 남아 있었다.

숨겨진 잠재력에 다시금 눈을 뜨자, 기적은 거짓말처럼 재현되었다.

“…응?”

눈앞에 펼쳐지는 요정의 날개를 보고 메이가 당황했다.

이변이 일어나기 전에 승부를 내려 했지만, 매서운 돌풍이 그녀를 날려버렸다.

“이게 바로, 4성급의 마법사가 지닌 마력역장인가….”

뒤로 물러나듯 착지한 메이가 중얼거렸다.

그녀로서는 아직 감당하기 어려운 혹한이 무시무시한 서릿발을 휘날리며 그 위세를 키워가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의 능력에 비하면 별것 아니야. 그저, 예전보단 더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뿐이지.”

“그 상태는 얼마나 유지 가능해? 실질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를 기준으로.”

메이는 포기했는지 사이드를 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어느덧 그녀의 눈동자엔 선망의 빛이 감돌아 있다.

“잘은 모르겠어. 길어야 3~4분 정도일까나?”

“…단지 시작일 뿐인가 보네. 「각성자」의 수준에서는.”

앞으로 더 혹독한 성장을 거듭해야만 유지 시간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5성, 혹은 6성의 경지에 닿아 있을 터.

현재로서는 4성까지가 한계지만, 「각성자」의 존재는 기존의 척도가 조만간 깨질 것임을 암시했다.

“글쎄. 그 아이라면 5성 이상까지 도달할 수 있으려나.”

전요한.

일찍이 대미궁을 공략했다고 알려진 그는 언제나 더 높은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함께 얽혔던 일들을 떠올리니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진다.

채린이 말없이 얼굴을 붉히고 있을 때였다.

“참으로 신비한 날개로군요. 전생에 요정들의 여왕이라도 되었던 걸까요?”

연보라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실비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글생글 웃는 그녀의 표정에 채린은 위협감을 느꼈다.

“저, 저기 그게… 가볍게 서로의 능력만 확인하려던 거였어요.”

허락받지 않은 채 이능력을 발현하여 소동을 일으키는 건 명백한 학칙 위반이다.

일전에 벌칙으로 방과 후 청소를 한 적이 있는 터라 더욱 난감해진 채린이었다.

하지만 실비아는 의외로 자비롭게 둘의 격돌을 눈감아줬다.

“부디 악의 없는 장난이었길 바라요. 안 그러면 교화 담당 교관인 메르첼이 여러분을 소환할 테니까요.”

“봐, 봐주시는 건가요?”

“최근에 불미스러운 일이 자주 일어나서 이번만은 특별히. 뜻밖의 성과를 낸 제자라서 기특하기도 하고요.”

실비아는 채린이 각성에 성공한 것을 칭찬해 주었다.

전 세계적으로도 그 정도의 경지에 도달한 이능력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아직도 4성급의 이능력자는 많지 않은가 봐요?”

원래 상태로 돌아온 채린이 다른 각성자에 대해 물었다.

“이번에 늘어난 것까지 전부 합치면, 공식적으로 4명이네요. 재미있는 건 그들 모두가 현재 한국에 있단 사실이에요.”

북유럽계의 실비아, 멜리사.

한국계의 채린, 전요한.

다른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관리국의 전산 기록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사실상 최상급 전력이 국내 지부의 아카데미에 모여 있는 셈.

그만큼 한국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왠지 부담감이 커지네요.”

“조금은 경각심을 갖는 편이 좋을 거예요. 다른 지부에서 메이 양 같은 인재들을 보내오고 있으니까요.”

이곳에 교류 학생이 많아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유독 한국에서만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다수 발생하고 있는 탓이다.

잘못하면 이에 휩쓸려 피해를 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새로운 자극이 될 거라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혹독한 시련을 통해 성장시키겠단 건가요? 앞으로 몇 명이 죽게 되더라도.”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끔찍한 일을 겪었던 채린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까이 가다온 실비아는 그녀를 껴안으며 다독였다.

“안타깝지만, 그게 우리의 사명이에요.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았으니, 인류의 미래를 위해 참고 이겨내 주세요.”

항상 웃는 낯으로 제자들을 매도하던 모습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당황한 채린은 눈을 크게 뜬 채 말을 더듬었다.

“네? 왜, 왜 갑자기….”

앞으로 숨 막히는 일정이 잡혀 있단 사실을 알지 못한 탓이다.

실비아는 그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대신, 조만간 개최되는 요리 경연대회를 언급했다.

“참, 함께 참여할 친구들은 구했나요? 이런 활동은 좋은 추억거리가 될 테니 절대 놓쳐선 안 돼요.”

“그런 거라면 평소처럼 하은이하고 주한이를….”

“교우관계가 너무 좁아요! 이번엔 평소 친하지 않던 애들하고 하도록 해요!”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은 채, 실비아가 멋대로 참여 인원을 정해줬다.

그 명단을 들은 채린이 아연실색하며 입을 벌렸다.

“에엣?”

“학생회장인 만큼 훈련 교관의 조언을 잘 들을 거라 믿어요~”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실비아가 윙크를 했다.

* * *

“그러니까, 이쪽 세계의 별미를 직접 만들어 볼 기회란 말인가요? 흥미롭군요.”

기대된단 표정으로 시르케가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눈앞엔 다양한 식재료들이 놓여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묵은지 등갈비찜을 만들어볼 거야. 준비는 됐지?”

전요한이 주위를 둘러봤다.

함께 경연대회에 참여하기로 한 생도는 채린, 시르케, 메이.

지도 교관은 정서희였다.

“이번에도 김치가 들어간 음식이라니. 저를 얼마나 더 학대할 생각이에요?”

김치찌개에 질려 있던 정서희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시르케와 메이는 흥미롭단 반응으로 바라봤다.

“대미궁에 갇혀 있을 때 심심하면 언급하던 식재료군요. 확실히, 붉은 양념이 잘 배어든 것이 특색 있어 보이네요.”

“한국의 전통음식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입맛에 맞을진 모르겠지만.”

한편, 채린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색이다.

재벌가의 자제로 태어난 탓에 그녀는 요리 경험이 거의 없었다.

“우선, 린은 대파와 고추를 썰어줘. 식칼에 손이 베이지 않도록 조심해.”

“으, 응….”

고개를 끄덕인 채린이 어설픈 솜씨로 도마 위의 식재료들을 다듬기 시작했다.

“시르케는 연금술 연구를 한다고 비율을 잘 맞춰 봤지? 적당히 양념을 조절해보자.”

묵은지 등갈비찜엔 설탕과 국간장을 비롯해서 된장, 고춧가루, 다진 마늘 등이 들어갔다.

이들간의 조합이 적절히 어우러져야만, 등갈비찜 본연의 풍미가 우러나온다.

“그럼 나는 뭘 하는데?”

머뭇거리던 메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메이는 각각의 요리 단계에 따라 불 조절을 하며, 전체적인 진행도를 봐줘.”

전요한은 말을 마친 후, 눈앞의 등갈비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손놀림에 지켜보던 정서희가 감탄했다.

“고기를 잘 썰어 내시네요. 대미궁에서는 이런 식으로 직접 요리를 해먹었나 보죠?”

“물론이에요. 뭣하면 책도 한 권 써낼 수 있을걸요?”

이를 테면, 대미궁에서 살아남기 위한 레시피랄까.

하지만 그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소미궁도 출현하지 않은 시점이니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다.

‘슬슬 시기가 되긴 했는데.’

대미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반면, 소미궁은 몇 단계의 층계로만 이루어져서 흔히 볼 수 있다고 했다.

지구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다들 힘내요. 다른 조도 분업해서 제각기 열심히 요리를 만들고 있네요.”

주위의 경쟁자들을 관찰하던 정서희가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뚝배기 불고기, 해물 아구찜, 감자탕 등등 비장의 레시피가 많이 보이는 탓이었다.

“서희 씨는 조원들 지켜보면서 간간히 맛이나 좀 보세요. 먹는 건 잘하시잖아요?”

“무슨 소리예요? 누가 들으면 하는 거 없이 먹기만 하는 돼지인 줄 알겠네.”

뒤에서 지켜보던 정서희가 볼을 부풀렸다.

그녀는 전요한이 없는 사이에 다이어트도 해서 예전의 몸매를 되찾은 상태였다.

“아무튼, 최선을 다해서 한번 입상해 보자고요. 그럼 상금으로 조촐하게 파티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이번엔 대회 상금을 축내려는 건가요? 아직 관리국 국장으로부터 받은 사례금도 다 못 썼는데.”

“시, 시끄러워요! 축내긴 뭘 축낸다는 거예요! 전부 야근 수당을 배달음식으로 받은 건데!”

정서희와 전요한이 투덕거리는 동안, 요리는 서서히 완성되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등갈비찜을 보며 시르케가 놀라움을 표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식욕을 상당히 자극하는 비주얼이군요.”

“그러게. 중화요리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의 별미야.”

메이도 분명 잘 완성된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시식회가 시작되자, 교관들이 돌아다니며 음식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정말 맛이 좋은걸?”

“등갈비의 부드러운 육질과 김치의 조합이라. 이건 어떻게 해도 잘못될 수가 없어.”

“한국적인 음식이기도 하고, 본연의 특색을 잘 살렸어. 좋은 점수를 줄게.”

결과는 대박이었다.

요리 초짜들이 대부분인데 졸지에 우승까지 해버리는 기염을 토해냈다.

물론, 대미궁에서의 노숙 생활에 잔뼈가 굵은 두 명이 활약한 점은 있었다.

“잘 모르는 음식도 간은 잘 맞추네, 시르케?”

“당신이 최상의 레시피를 연구해온 덕분입니다. 고기 육질도 손질이 잘 되었는지 제법 좋더군요.”

전요한과 시르케는 서로 마주 보며 웃어 보였다.

둘은 나머지 조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본격적인 식사에 들어갔다.

“협동해서 만들어낸 음식을 이렇게 나누어 먹다니. 정말 취지는 좋은 학내 활동이었네.”

무언가에 감동한 채린은 얌전히 앉아서 젓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즐거웠던 시간도 잠시.

그녀는 손목시계의 분침이 자꾸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에 그 녀석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집안에서 골라준 정혼자와 주기적으로 만나야 하는 날이었다.

기분 나쁘게 노출 있는 옷을 요구하고, 몸을 더듬는 등의 스킨십을 집요하게 해댄다.

그래서 놈과 만나는 날이면 채린의 기분이 밝아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뜻깊은 시간을 보냈는데, 조금 이따가는 그런 쓰레기에게 모욕을 당해야 하다니.’

식탁 위에 내려진 주먹이 흐느끼듯 떨렸다.

전요한은 그 모습을 보고는 일어나서 다른 조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서창민.

다름 아닌, 녀석에게 개인적인 볼 일이 있어서였다.

“저번에 이야기했던 거, 오늘밤이다. 준비해라.”

“그… 확실해? 오늘 밤인 거.”

의도를 눈치챈 서창민은 탐탁지 않아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전요한의 표정이 무서워진 것을 확인하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 시키는 대로 할게.”

“이따가 밖에서 보자.”

오늘 밤이야말로 채린을 괴롭히는 녀석을 혼내줄 시간이었다.

그녀의 어두웠던 표정을 떠올리며 전요한은 말없이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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