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막간의 레이드 (4)
헌터들은 알을 깨고 나오는 새끼 라트리비스들을 보며 경악했다.
이건 거의 재앙급이었다.
사도 요한이 묵시록에서 언급한 세기말의 장면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개체 수가 어찌나 많은지 바닥조차 보이지 않았다.
녀석들은 순식간에 성장했다. 어미가 남긴 허물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작은 몸집을 점차 불려나갔다.
그 모습을 처음 본 몇몇 초짜들이 기겁하며 바리게이트의 뒤로 숨었다.
스산하고 음침한 울음소리가 하늘을 뒤덮었다.
거대 라트리비스들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포위망을 형성한 헌터들이 매우 거슬린다는 눈빛이었다. 어미의 뜻을 알아차린 새끼들이 앞다투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마치 대양의 격한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헌터들은 전율했다.
절망 가득한 목소리로 신을 부르짖는 이들도 있었고, 눈치를 보며 도망치려는 이들도 있었다.
상위 랭커들이 나서서 최대한 라트리비스들의 개체 수를 줄여보려 노력했다.
어미들을 상대하는 건 사실상 전요한과 멜리사 둘뿐이었기에 다른 헌터들은 모두 새끼들을 잡는 데 주력할 수 있었다.
허나, 많아도 너무 많았다.
유명 길드 소속의 마법사들이 제법 활약하고 있긴 했다.
불의 장벽으로 이동 경로를 차단하고, 사방에 불기둥을 생성했으며, 일부 구역을 불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방파제 두어 개만으로는 갯벌을 가득 채우며 들어오는 밀물을 막을 수 없었다.
‘시르케를 데려왔으면 좀 수월했을 텐데.’
이쪽 세계에 적응하라고 배려해준 것이 조금 아쉬웠다.
거대 라트리비스와 대치 중이던 전요한은 문득 옆자리가 허전함을 느꼈다.
‘마법사 포지션이 이래서 필요하다니깐.’
괜히 던전의 공략 구성이 여러 포지션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전요한은 저들이 당하기 전에 속전속결을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캬아아아아!”
줄곧 상대해왔던 거대 라트리비스가 방울뱀 소리를 내며 거칠게 머리를 흔들어댔다.
얼마 후, 멜리사가 맡고 있던 녀석까지 함께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두 놈이 한 명씩 해치우겠다는 생각 같았다.
전요한은 감흥 없는 표정으로 아르티나를 들어 올렸다. 놈이 날리는 냉기를 옆으로 피하며 빠르게 녀석과 거리를 좁혀나갔다.
그때, 뒤에 있던 거대 라트리비스가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그것을 감각으로 느낀 전요한이 비릿하게 웃었다.
‘드디어.’
자신과 새끼를 동시에 공격할 셈이었다. 어차피 새끼는 죽어도 부활한다.
그러니 미끼로 던져준 것이다.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기 위해.
허나, 녀석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요한이 지금까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건방진 녀석.”
전요한의 두 눈이 맹수처럼 번뜩였다.
각성 상태에 돌입한 그는 먼저 달려들었던 새끼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뒤에서 용오름 자세를 취한 채 입을 벌리는 어미를 노리기 위함이었다.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어느 순간 모습이 사라졌다.
지척까지 다가온 전요한이 높이 도약하며 다시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새끼가 어미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어미가 실패할 경우를 준비해 자신도 공격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이봐, 네 상대는 나라구.”
멜리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새끼를 향해 내달렸다. 그녀의 모습이 일순간 사라졌다가 놈의 앞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공격을 시도한 것은 어미 쪽이었다.
녀석의 머리가 용암처럼 붉어지며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체내의 모든 에너지를 일시적으로 끌어올린 화력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조금만 지체해도 눈앞의 거대 라트리비스가 뿜어내는 화염에 직격타를 당할 것이다.
허나, 전요한은 빨랐다. 각성으로 인해 움직임과 반응 속도가 큰 폭으로 상승했고, 그 능력을 수족처럼 다룰 수 있을 만큼 노련했다.
전요한이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하여 그대로 놈의 머리를 쳤다.
아르티나가 붉은 빛을 내뿜으며 살덩어리를 잘라냈다. 검푸른 액체가 분수처럼 사방으로 쏟아지며 누런 속살이 내비쳤다.
깔끔하게 절단된 머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재생은 없었다. 완전한 사멸이었고, 색을 잃은 몸뚱어리가 흐물거리며 나자빠졌다.
새끼 역시 똑같은 최후를 맞았다. 대검이 진홍색 불길을 일으키며 일격에 놈을 두 동강 냈고, 녀석도 차디찬 고깃덩어리로 변했다.
영원한 것은 없다. 불사에 가까운 소생 능력을 타고났을지라도 언젠가 끝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 종점을 전요한과 멜리사가 함께 찍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무기에 묻은 이물질들을 털어내며 뒤돌아섰다.
“제법 하시네요?”
“그쪽이야말로.”
누가 상대적으로 우위인지는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려웠다.
양쪽 다 4성급의 이능력자이고, 각성 상태에서 일정 시간을 버틸 수 있다.
“그런데 남은 새끼들은 어떻게 하죠?”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어미가 죽어서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낄 테니까.”
멜리사의 말대로 새끼 라트리비스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지는 중이었다.
기세가 오른 헌터들이 놈들을 일방적으로 살육하는 모습이 만연했다.
전황은 사실상 이긴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
전요한은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라트리비스 사체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지독히도 많은 숫자였다.
“아무튼, 저희가 챙겨야 할 전리품은 어디에 있죠?”
“조금만 기다려. 이렇게 생명력이 질긴 녀석은 조금 시간이 걸리는 편이니까.”
남은 뒤처리는 헌터들에게 맡겨둔 채, 멜리사가 거대 라트리비스 쪽으로 돌아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빛이 감도는 내단 두 개가 놈들의 사체에서 각각 튀어나왔다.
“공평하게 하나씩 나눠 가질까요? 어차피 저희 건데.”
“아니요, 그쪽이 둘 다 가지세요. 저는 이런 거 쉽게 얻을 수 있으니까요.”
멜리사는 선심 쓰듯 웃어 보였다.
자신이 인정하는 상대에게 건네는 순수한 호감.
전요한은 마다하지 않았다.
“이거 개당 시세가 얼마죠?”
“음… 매일 조금씩 변동은 있겠지만 대략 1억?”
“오오, 그럼 2억 번 셈이네요?”
이제 지방의 소도시에 작은 아파트 정도는 살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그런 소박한 꿈을 이루기엔 아직 세상이 평화롭지 않다.
“이따가 돌아가는 길에 쇼핑 좀 해도 되나요?”
“뭐 사게요?”
“골동품 가게 좀 들르려고요.”
이번엔 어떤 게 매입되어 들어왔는지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운이 좋으면 저번처럼 횡재를 할 수도 있겠다.
사이좋게 쓰러진 거대 라트리비스들을 뒤로한 채 전요한은 등을 돌렸다.
* * *
마계의 일곱 죄악이 모이는 암흑 신전.
공백으로 남아 있는 「질투」의 자리를 놓고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지구는 분명 최하위 차원의 불모지라고 하지 않았나?”
「분노」가 먼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마계의 군주 한 명이 어이없게 당한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지구의 여신은 예전부터 일부 권능자들에 의해 존중받고 있었어요. 오랫동안 서열전에 참여하지 않아서 그 존재가 잊혔을 뿐이죠.”
「나태」가 별로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며 「질투」의 성급함을 지적했다.
그녀는 이런 일로 모여서 자신의 시간이 낭비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상대가 무엇이듯 잡아먹어 버리면 그만이야. 아, 물론 나는 다른 차원을 노리고 있어서 별 관심이 없긴 한데.”
「폭식」도 귀찮다며 기권 표를 던졌다.
그녀는 이미 배가 부른 상태라 지구 따윈 안중에도 없다.
“하지만 이로 인해 우리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어. 누군가는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만?”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깨고, 「오만」이 핵심을 말했다.
그러자 「음욕」이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듯 불쑥 끼어든다.
“그리 한가한 상황이 아닐 텐데? 우리는 현재 많은 권능자들을 적으로 돌리고 있다.”
마계의 노골적인 침공 행위와 영지 확장은 사방에서 반발을 일으켰다.
「질투」가 일시적인 휴면기에 들어간 것도 모자라, 새로운 위험까지 부담하려 하다니.
그러다 손실이 더 발생하기라도 하면, 마계 진영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양쪽 다 일리는 있어. 그렇다면 절충안으로 지구를 분쟁 지역처럼 만들어 버리는 게 어떻겠어?”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탐욕」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제안에 「오만」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직접 건드리는 대신, 다른 차원과의 충돌을 유도하자는 건가. 제법 좋은 생각이군.”
구체적인 방법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다들 여유가 없는 만큼 본격적으로 실행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저들에게 모처럼의 평화를 만끽하도록 해줘요. 가까운 미래에 지구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나태」가 재미있을 거라며 키득거렸다.
다른 죄악들도 동조하기 시작했고, 암흑 신전은 음산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 * *
‘여기라면 괜찮겠지.’
걸음을 멈춘 채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장미 정원.
이 시간대엔 찾는 생도들이 없어서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자주 찾았다.
“공백의 균형을 유지하는 자여, 빛과 어둠의 틈에서 영혼의 그릇을 채우는 자여. 밤을 이끄는 여신의 이름으로 명하니, 탐욕을 드러내는 추악한 마물의 앞에 그 맹위를 드러내라!”
일전에 시르케가 영창한 적 있는 영계 마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자 채린은 눈썹을 움찔거렸다.
‘자, 자신감이 부족했나?’
영계 마법은 수준이 높은 만큼, 무언가 놓친 것일지도 몰랐다.
술식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다 생각하니, 다른 걸 도전하고 싶어졌다.
“오감을 현혹하고 이지를 어지럽히는 기만자여, 여기 초승달 성좌의 신도가 고하노니 눈먼 모두의 앞에 진실을 드러내라!”
이후 찾아오는 정적.
슬슬 뭔가 잘못됐단 느낌이 들었지만, 채린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외쳐봤다.
“어둠의 지배를 거부하는 자여, 영혼의 존귀함을 잃지 않는 자여. 황혼이 저물고 대지엔 절망과 악몽이 가득하니, 그대와 내가 함께 힘을 합쳐….”
지금까지 장황한 문장들을 전부 외우느라 힘들었던 탓이다.
그래도 머릿속에 있는 마법 영창은 전부 시도해봐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지상의 염원과 밤하늘의 이상을 더하여 고하노라. 혼돈을 몰고 온 심연의 악마는 영원히 그 모습을 감출지니!”
어디선가 구해온 지팡이를 시르케가 그랬던 것처럼 지면에 내리쳤다.
그러자 배후로부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거야?”
마치 인형처럼 무뚝뚝한 흑발 적안의 소녀였다.
지켜보던 이가 있었단 사실에 채린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 실은 그게….”
“한국의 마법사들은 그런 식으로 연습하나 보네. 처음 알았어.”
흑발 적안의 소녀는 흥미 없다는 듯 벤치에 기대어 앉았다.
그러고 보니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상대.
다른 국적인 양 말하는 것이 조금 느낌이 이상했다.
“너는 누구야?”
“메이. 중국에서 교류 차원에서 온 전학생이야.”
메이는 간단히 자신의 방문 목적을 말했다.
최근에 전 세계적인 재해가 빈발해짐에 따라, 각국은 서로 인재를 파견하면서 공조 관계를 형성하는 상황.
자신뿐만 아니라, 곧 여러 명의 교류 학생이 도착할 것이었다.
“공조 관계라니, 대체 무슨….”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아무튼, 네가 채린 맞지? 심심한데 한번 붙어 볼래?”
채린의 붉은 완장을 응시하던 메이가 자신의 전용 무기를 소환했다.
사이드.
기다란 낫에서 심상치 않은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