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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62화 (62/180)

제62화. 막간의 레이드 (3)

전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녀석의 속셈을 알았다. 새끼들을 이용해 자신의 움직임을 묶어놓을 생각이었다.

물론 남은 새끼들까지 상대한다고 전요한이 밀릴 리는 없었다.

굳이 멜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수많은 개체 수를 줄였고, 그 증거로 살덩어리들과 검푸른 액체가 주위에 낭자했다.

하지만 라트리비스들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 자신들의 숫자를 앞세워 어떻게든 진영을 뚫고 지나가려 했다.

그중 일부가 전요한의 바로 뒤까지 접근했다. 사방에서 밀고 들어왔기 때문에 헌터들도 녀석들을 모두 처리하는 것은 무리였다.

라트리비스들이 스산한 울음소리를 내며 전요한에게 달려들었다. 전요한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기척만으로 놈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아르티나가 라트리비스들의 몸을 두 동강 냈다.

새끼들이 시간을 끄는 동안 거대 라트리비스가 전요한을 향해 냉기를 뿜어냈다.

빈틈을 노린 기습 공격이었다. 전요한은 공중으로 도약하면서 그 공격을 여유롭게 피했다.

전요한이 서 있던 자리가 급속도로 냉각되며 얼음으로 뒤덮였다.

거대 라트리비스의 속성 마법은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마력 역장으로 불어닥치는 한파가 놈에게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전요한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맞을 일도 없는 데다, 움직임을 제한하려 해도 그에겐 절대면역이 있었다. 위력이 강해지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불필요한 변수는 배제한다. 그것이 전요한의 철칙이었고 그를 살아남게 해준 비결이었다.

전요한이 다시 등반을 시작했다. 거대 라트리비스가 몸을 들어 올려 방해했지만 전요한에겐 절벽도 평지나 다름없었다.

마치 경공을 펼치듯 놈의 몸뚱어리 위를 빠르게 타고 올라갔다. 녀석이 아무리 격하게 움직여도 그 흐름에 동화하며 중심을 잡았다.

물아일체의 경지. 바깥 사물과 내면세계의 경계가 사라지며 객관과 주관이 하나로 통일된다. 물질과 정신이 합일하여 육체에 거하는 순간, 전요한은 거대 라트리비스가 되고 거대 라트리비스는 전요한이 된다.

전요한의 걸음이 정상에 닿았다. 아르티나가 혹한을 휘날리며 녀석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고, 전요한은 그 상태로 하산을 시작했다.

베지 않고 가른다. 살덩어리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블링처럼 놈의 몸에 무늬를 새겨 넣는다.

소용돌이치듯 마법검을 휘저으며 비늘 아래 있는 속살을 헤집고 내려간다.

정교한 작업임에도 전요한은 어렵지 않게 그 일을 해냈다. 녀석이 몸뚱어리를 흔들어댈 수록 더욱 굴곡 있고 기묘한 무늬가 새겨졌다.

거대 라트리비스의 몸에서 내려온 후 전요한은 아르티나를 한 차례 휘둘러 검푸른 액체들을 떨쳐냈다.

마치 유명한 화백이 일필휘지로 그림을 완성한 후 가볍게 붓을 들어 올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놈은 죽었나?

아니다. 전요한은 녀석에게 치명상을 입혔지만 그렇다고 숨통이 끊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적당히 완급 조절을 하면서 지속가능한 데미지를 주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관리국 국장에게 들었던 대로 제법이네.’

전요한의 활약을 지켜보던 멜리사가 수긍했다.

확실히, 4성급의 이능력자는 되는 수준.

「각성」까지 하면 자신과 호각으로도 싸울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마지막 관문이 남았어. 끝을 맺을 때까진 평가를 아껴둘 거라고.’

이제 슬슬 때가 되었다.

놈이 똬리를 틀며 승천하는 용처럼 고개를 하늘로 향하면 적절한 타이밍에 녀석의 머리를 잘라내면 됐다.

전요한이 노리는 것은 아마도 그 순간일 터다.

그런데 녀석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고개를 높이 들어 올리긴 했으나 몸을 휘감아서 체내의 에너지를 움직이려고는 하지 않았다.

“으음?”

불길한 예감이 전요한의 본능을 자극했다.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그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대 라트리비스가 방울뱀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전요한은 그것이 무언가를 부르기 위함이라는 걸 눈치챘다.

수라의 길을 오랫동안 걸어온 그는 맹수들의 울음소리에 담긴 의미를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알에서 태어난 새끼들은 모두 죽었다. 따라서 녀석이 부르는 존재는 그것들이 아니었다.

전요한이 감각을 확장하여 인근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살폈다.

확실히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덩치도 컸고 몸놀림 또한 날렵했다. 마치….

‘이 녀석처럼.’

전요한의 이성이 드디어 본능을 따라잡았다. 상황을 파악한 전요한은 인상을 쓰며 눈앞의 거대 라트리비스를 올려다봤다.

‘그새 자기 복제를 했군.’

거대 라트리비스는 두 종류의 번식을 한다.

녀석의 알에서 탄생하는 새끼는 비록 같은 종이기는 하나 등급이 두 단계나 낮다.

따라서 알을 낳는 행위는 엄밀한 의미의 번식이나 자기 복제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것은 여왕개미가 자신의 수족이 되어줄 일개미를 생산해내는 작업에 불과하다.

녀석과 똑같은 개체는 알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새끼로 태어나고 허물이 아닌, 어미의 알을 먹고 성장한다.

처음에는 몸집이 작지만 성체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지금 이쪽으로 오는 것은 바로 그 개체였다. 이를 본 현장의 지휘관은 즉각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을 느꼈다.

[여기는 통제관. 길을 열어라.]

[알겠다.]

[라져 댓.]

노련한 분대장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

기존의 포위망 한쪽 방향을 개방했고 그쪽으로 멀리서 다가오는 불청객을 맞이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헌터들이 웅성대며 흙먼지가 일어나는 저편을 바라봤다.

그들은 슬슬 깨닫고 있었다. 자신들이 오늘 이곳에서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 * *

거대 라트리비스는 자신의 뒤를 이을 새끼를 잘 낳지 않는다. 이유는 알려진 바가 없다.

몬스터들의 습성을 관찰하여 논문을 쓰고 싶어 하는 학자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헌터들은 다행이라 여겼다. 안 그래도 죽이기 힘든 녀석이 번식력까지 왕성하면 골치 아프니까.

새끼도 한 번에 한 마리씩만 낳으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들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거대 라트리비스가 새끼를 잘 낳지 않는 건 던전에서만 적용된다.

녀석이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와 새로운 환경을 접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거대 라트리비스가 필드에 출현한 건 한국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다들 그 가능성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기존의 방식대로 토벌 작전을 진행했고, 녀석이 계속 소생하는 것만 주의하면 별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다.

그 결과, 이번 사태가 발생했다. 공략해야 할 몬스터가 두 마리로 늘었고, 부상자나 사상자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졌다.

레이드 시작 전에 피난 지시를 내려서 주위에 민간인은 없었지만 저랭크 이하의 헌터들이 위험했다.

‘이대로 가면 사상자가 발생하겠군.’

그렇게 생각한 전요한은 기분이 조금 미묘해졌다.

기분 풀이나 할 겸, 가벼운 마음으로 레이드를 나온 건데 상황이 조금 꼬인 기분이다.

거대 라트리비스가 두 마리로 늘어나다니.

알에서 태어나는 새끼들도 두 배로 늘어날 테고, 그 녀석들의 물량 공세는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엔 보상도 두 배가 되겠지.’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스산한 울음소리가 가까워져 오는 걸 들으며, 전요한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거대 라트리비스.

녀석은 어미의 부름을 받고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알을 먹고 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덩치는 어미와 별 다를 바 없었다.

거대 라트리비스가 지근거리까지 도착하자, 마중 나와 있던 1분대의 헌터들이 폭격을 시작했다.

화가 난 녀석이 냉기를 쏟아냈지만 후위의 마법사들이 마력 방벽으로 그것을 막아냈다.

충분히 녀석의 주의를 끌었다고 생각한 1분대장이 후퇴 지시를 내렸다. 그는 분대원들과 함께 뒤도 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거대 라트리비스가 바닥을 끌면서 백호 팀의 뒤를 쫓았다. 모래 먼지가 주위를 뒤덮었다.

따라잡히는 팀원은 없었다. 모두가 2성 이상의 유경험자였고, 평범한 사람들보다 신체능력이 몇 배는 뛰어났다.

잠시 후, 포위망의 빈틈이 메워졌고 헌터들은 양쪽으로 나뉘어 각각의 거대 라트리비스와 대치했다.

“유인 작전이 어설프게나마 성공한 것 같은데요?”

“너무 무시하지 마세요. 저들도 나름의 경력이 있는 헌터입니다.”

전요한의 말에 멜리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후 그녀는 한 가지의 제안을 했다.

“공평하게 한 마리씩 잡죠. 제가 새롭게 온 녀석을 맡겠습니다.”

“먼저 잡으면 그쪽에 끼어들어도 됩니까?”

“마음대로 하시죠. 그럼 시작합니다.”

말을 마친 멜리사가 먼저 후다닥 달려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전요한은 잠시 감상을 늘어놓았다.

‘실비아 교관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이네.’

둘 다 북유럽 출신이고 서로 아는 사이라고 했다.

호전적인 성향은 비슷한데, 멜리사 쪽이 겉으로는 덜 상냥하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실력을 좀 더 알아볼까?’

4등급의 레이드 몬스터를 상대로 페이스 조절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조금 공략 속도를 늦추면서 멜리사의 전투 방식을 눈여겨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생각을 마친 전요한은 아까부터 상대하던 거대 라트리비스에게 달려들었다.

‘조금 여유를 부려 볼까.’

일부러 공략 속도를 늦췄다.

이미 큰 데미지를 입힌 상태였고, 추가적인 공격을 가하면 허물을 벗고 재생할지도 몰랐다.

재생하는 것 자체는 상관없는데 알을 낳는다는 게 문제였다.

거대 라트리비스 두 마리가 동시에 알을 낳으면 녀석들을 포위한 헌터들이 감당해내기 어려울 것이다.

전요한이 시간을 끄는 동안 멜리사는 자신의 상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거대 라트리비스가 멜리사에게 냉기를 내뿜었다. 공기가 얼어붙으면서 생긴 얼음 결정들이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흥!”

멜리사는 코웃음을 치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녀도 전요한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등반을 시작했다.

하지만 움직임이 조금 달랐다. 전요한이 날렵하게 놈과 일체감을 이뤘다면, 멜리사는 노골적으로 적의를 내세우며 발톱을 세웠다.

녀석이 몸뚱어리를 흔들면 구태여 길을 따라 달리지 않고 도약하여 더 상층부로 몸을 날렸다.

마침내 멜리사가 정상을 밟았다. 대검이 주황빛 오러를 발하며 거대 라트리비스의 정수리를 관통했다.

멜리사는 멈추지 않고 녀석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 모습이 마치 뱀의 머리를 물어뜯는 것처럼 맹렬해서 검푸른 액체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작업을 마친 멜리사가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거대 라트리비스가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멜리사는 대검을 허공에 한번 휘두른 후 주위의 헌터들에게 제스처를 날렸다.

다음 상황을 준비하라는 신호였다.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잠시 후, 허물이 벗겨지며 거대 라트리비스가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녀석은 곧장 알을 낳았고 부화한 새끼 라트리비스들이 허물을 먹으며 자라기 시작했다.

헌터들은 멀리서 그것을 지켜봤다.

거대 라트리비스가 허물을 벗으며 내뿜는 독기 때문에 지근거리까지 다가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만큼은 어떤 공격도 취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거대 라트리비스도 그것을 아는지 허물을 벗은 새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몸을 원형으로 만들어 자신의 꼬리를 입으로 물었다.

“뭘 하려는 거지?”

녀석을 제지하려던 전요한은 마음을 바꿔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일반적으로 레이드 몬스터는 패턴이 복잡해질수록 희귀한 전리품을 토해낼 가능성이 높아지는 탓이었다.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하는 건, 고인물인 자신으로선 충분히 감당 가능한 대가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우로보로스인가.”

“다들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우로보로스는 자신의 꼬리를 문 뱀이나 용의 형상을 가리켰다.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온 이 상징은 시간의 순환을 암시했다.

끝없이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거대 라트리비스는 영원으로의 회귀를 시도한다.

녀석이 자신의 꼬리를 물어 온몸에 독을 퍼트리는 것은 일시적인 죽음을 거쳐 새로운 육체로 화하기 위함이었다.

보통 혼자 있을 때는 잘 하지 않는 행동이지만 새끼가 옆에 있어서 패턴이 변한 모양이었다.

또 하나의 허물이 벗겨졌고, 독사 한 마리가 다시 태어났다.

녀석의 알들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헤아릴 엄두조차 안 나는 수의 알들이었다.

들판이 폭설을 맞은 것처럼 흰색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뒤에 있던 루키들의 표정 역시 새하얗게 변했다.

그들의 눈앞에 지옥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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