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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61화 (61/180)

제61화. 막간의 레이드 (2)

거대 라트리비스의 비늘은 두껍고 단단해서 낮은 등급의 무기로는 상처조차 입힐 수 없다.

재래식 무기는 기본적으로 통하지 않는다.

녀석의 몸을 감싸고 있는 무형의 막이 어지간한 물리 공격은 모두 튕겨내기 때문이다.

핵과 같은 강력한 대량살상무기는 예외다.

하지만 핵을 사용하면 그 지역이 초토화되고 한동안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공간으로 변한다.

몬스터 한 마리 잡자고 핵을 쓰는 건 파리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불태우는 짓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격 수단은 헌터의 공격 스킬뿐이다.

이것이 그동안 몬스터를 헌터가 잡아 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헌터에도 등급이 있었다. 이런 긴급 상황에서는 특히 상위 랭커들이 빛을 발한다.

검호 백윤성.

그도 활약상이 기대되는 네임드였다.

“…….”

하지만 이번만큼은 백윤성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거대 라트리비스에게서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이 느껴진 탓이었다.

‘이번 녀석은 까다롭다.’

본능적인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지간히 쉬운 레이드 몬스터는 혼자서도 때려잡지만, 저놈은 격이 다르다.

전리품에 욕심이 나긴 해도,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였다.

한편, 반대편에 있던 누군가는 경쟁심리에 의욕을 불태우는 중이었다.

“어떻게 발라먹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전요한은 눈앞의 거대 라트리비스를 노려봤다.

녀석의 독이 지닌 살상력은 가공할 만하다.

호박 같은 눈에도 상대를 얼어붙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데, 양쪽 다 자신에겐 무의미했다.

“거대 라트리비스와 처음 눈이 마주친 자는 엄습하는 살기에 오한이 저리고 무릎을 떨곤 하죠.”

옆에 있던 멜리사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경쟁할 것처럼 참여하긴 했으나, 사실 그녀는 왠만하면 나서지 않을 생각이다.

여기까지 온 목적은 오로지 전요한의 실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제가 초심자인 줄 아세요? 저런 걸로 쫄았으면, 지금 어떻게 살아 있겠어요.”

이 정도쯤은, 산책 나왔다고 생각하고 여유롭게 처리해도 전혀 어렵지 않다.

대미궁에서 죽을 고비를 수백 번 넘기며 전요한은 한 마리의 맹수가 되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인간이 아닌, 수라의 것이었고 감각 또한 문명 세계가 아닌 야생 세계에 속했다.

가늘게 떠진 검은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독사의 눈과 마주쳤다. 전요한은 떨지 않았다. 오히려 놈을 잡아먹을 듯이 두 눈에 살의를 내뿜었다.

“슬슬 나설 때가 됐네. 먼저 공격 안 갈거면 제가 합니다.”

전요한이 아르티나를 들어 올리며 거대 라트리비스를 향해 도약했다.

4성급의 성유물답게, 한층 날카로워진 검신이 맹수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녀석의 몸을 물어뜯었다.

분노한 거대 라트리비스가 입을 벌려 수차례 냉기를 쏟아냈다.

하지만 전요한은 날렵하게 몸을 놀려 사각지대로 몸을 피했다.

사각지대는 바로 거대 라트리비스의 몸이었다.

전요한은 미끌미끌한 녀석의 몸뚱아리를 타고 침착하게 등반을 시작했다.

놈이 몇 차례 몸을 크게 뒤흔들었지만 전요한이 중심을 잃는 일은 없었다.

리듬을 타며 마치 검무를 추듯 호쾌하게 빈틈없이 녀석의 머리까지 달려 나갔다.

전요한이 목적지에 닿았다.

아르티나가 푸른 기운을 발하며 거대 라트리비스의 정수리로 파고들었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갈라진 틈에서 역한 냄새가 새어 나왔다.

전요한은 아르티나를 비틀어 거대 라트리비스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다음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가 물러서자 다른 헌터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저 녀석 좀 봐!”

“검호 백윤성도 함부로 접근 못 하고 있었는데, 혼자 미쳐 날뛰고 있잖아?”

“아카데미 생도복을 입고 있는 게 더 놀랍네. 아직 실전 경험도 적단 이야기잖아?”

모두의 시선은 다시 거대 라트리비스에게로 향했다.

움직임이 예전만큼 민첩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비명을 질러댔다.

돌격할 거라면 지금이 기회.

헌터들의 예리한 무기가 사방에서 거대 라트리비스의 몸을 찔러댔다.

비늘이 찢어지고 누런 속살이 검푸른 액체와 함께 그 사이로 튀어나왔다.

마침내 거대 라트리비스의 움직임이 멎었다. 공격이 중단되었고, 헌터들은 뒤로 물러나 대기하며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곁에서 행동을 함께 하던 멜리사가 말했다.

그녀는 멀리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헌터들을 보며 혀를 찼다.

이 정도로 쓰러진다면 4등급의 레이드 몬스터일 리 없었다. 중상위급으로 분류되는 만큼 특별한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런 녀석을 만만히 여기면 곤란했다.

스르르르.

잠시 후, 거대 라트리비스가 바닥의 모래를 쓸면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퇴색한 비늘이 한 차례 벗겨지면서 녀석의 몸이 다시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뱀이 허물을 벗는 건 재생을 의미했다. 즉, 거대 라트리비스는 목숨이 무한이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부활하며 상대가 지칠 때까지 버틴다. 녀석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으려면 평범한 방법만으로는 안 된다.

더욱 골치 아픈 건..

치이이익!

녀석이 번식을 한다는 것이다. 위험을 감지하고 생명에 위협을 느낄 수록 놈은 더 많은 알을 낳는다.

사방에 흩뿌려진 알은 고작 삼사 분 만에 부화하고, 그렇게 태어난 여러 마리의 새끼 라트리비스들은 어미의 허물을 먹으며 빠르게 성장한다.

들판을 수놓은 새하얀 알들을 보며 헌터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의 불안한 감정을 느낀 전요한이 낮게 웃었다.

‘그래,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알을 깨뜨리며 새끼 라트리비스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스산한 소리들이 들판을 뒤덮으며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먹이를 향한 갈망, 피를 갈구하는 울부짖음이었고 듣는 이에겐 공포감과 일체가 된 내면의 비명이었다.

거대 라트리비스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입에서 흔들리는 방울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질렀다.

허물을 벗은 방울뱀의 소리가 강렬해지듯 녀석의 울음 또한 이전보다 굴곡 있고 짙은 색을 품었다.

전요한과 멜리사는 녀석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 울음소리는 자신과 대적 중인 헌터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거대 라트리비스가 자신의 허물을 먹고 성장하는 새끼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먹어 치워.”라고.

* * *

“거대 라트리비스는 허물을 벗을 때 주변에 무색무취의 독기를 발산해요. 전투가 끝났다고 방심하다간 영문도 모른 채 당할 수 있는 거죠.”

대기 시간 동안 멜리사가 현재 순간의 위험성을 설명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외에 또 있나요?”

“반토막 나거나 해서 머리와 꼬리가 분리되면, 거대 라트리비스는 체세포 분열을 하듯 두 개체로 분화하기도 해요. 그 과정에서 몸집이 작아지긴 하지만 자라난 새끼들을 잡아먹으며 금방 본래 모습을 되찾죠.”

참으로 괴이한 재생력이었기에 상위 랭커라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했다.

물론, 약점은 있다. 절멸시킬 수 있는 타이밍이 있지만 최소한 한 번은 쓰러뜨려야 그 기회가 찾아온다.

그래서 거대 라트리비스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유형의 몬스터로 분류되고 있었다.

“뭐, 싱겁게 끝나버리는 녀석은 아니라 다행이네요.”

다만, 사전에 브리핑이 없었던 것치곤 패턴이 귀찮았다.

물론, 이런 정보 쯤이야 휴대폰으로 레이드 커뮤니티에서 검색해볼 수는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곧 난장판이 되겠네요.”

다시금 라트리비스 웨이브가 시작되었다. 산호초처럼 푸른 뱀들이 자기들끼리 뒤섞이면서 포위망을 형성한 헌터들에게 엄습해왔다.

던전에서 흔히 겪는 웨이브와는 명백히 달랐다. 시간 차를 두고 몰려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총력전을 펼쳐 왔다.

거대 라트리비스가 방울뱀 같은 소리를 내며 새끼들에게 실시간으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레이드 현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도 나서야 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이대로는 피해자가 생겨날지도 모르겠어요.”

말을 마친 멜리사는 대검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앞으로 돌격하면서 새끼 라트리비스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녀의 별명인 발키리처럼 용맹한 그 모습은 모두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우와, 저 여자 누구야?”

“서양인으로 보이는데, 엄청나게 잘 싸우네.”

멜리사의 활약에 헌터들은 사기가 이전보다 훨씬 진작되었다.

그녀에게 지지 않기 위해, 전요한도 한껏 능력을 과시했다.

어느덧 라트리비스들의 개체 수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고, 그나마도 데미지를 입어 움직임이 둔해진 상태였다.

또한, 라트리비스들의 시체가 쌓여가면서 장점도 생겨났다.

일종의 장애물이 되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수비하기가 용이해진 것이다.

“제가 새끼들을 마저 처리할 테니, 놈하고 먼저 맞서 보는 게 어때요?”

대검을 휘두르던 멜리사가 은근슬쩍 맞대결을 권했다.

“뭐,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전요한은 거대 라트리비스와 마주한 채 눈싸움을 벌였다.

이미 여러 차례 격전을 벌여서 녀석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푸른 비늘에 물어뜯긴 듯한 자상이 나 있었고, 그 사이로 끈적끈적한 액체들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때려눕힐 수 있었다. 하지만 전요한은 기다렸다.

지금 녀석을 제압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잠시 쓰러져 있다가 허물을 벗으면 상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기묘한 몸뚱어리다.

단순히 재생만 하는 게 아니라 번식까지 한다. 두 번째로 낳는 알의 수는 처음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요한은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기다리면 된다. 제압하지 말고 최대한 괴롭히면서 거대 라트리비스를 초조하게 만들면 된다.

상대가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녀석은 최후의 공격을 시도한다.

바로 그때가 놈을 절명시킬 수 있는 유일한 타이밍이다. 체내의 모든 에너지를 입으로 끌어모으는 순간, 녀석의 재생력은 극도로 약화된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긴 하지만 전요한은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그만한 재주도 없으면 스반힐트와의 싸움은 물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니.

‘놓치지 않는다. 절대로.’

전요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두 야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상대가 틈을 보이기만을 기다렸다.

차가운 바람이 그들의 사이로 스쳐지나갔다.

제법 긴장감 어린 장면이었지만 전요한은 별 감흥이 없었다.

애초에 적수가 되지 않는다.

저 알 수 없는 재생력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승부가 났을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건 시간을 최대한 끌기 위해서였다.

아니, 시간을 끈다기 보단 행동 변화를 유도한다는 게 더 정확했다.

놈을 궁지에 몰아넣은 다음 그 상황을 녀석에게 각인시켜야 했다. 자신의 현재 패턴이 무용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도록.

하지만 아직 멀었다. 녀석은 충분히 자극을 받은 상태였지만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려고는 하지 않았다.

극심한 데미지를 입더라도 기다렸다가 재생하면 되니까. 아직 궁지에 몰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요한은 한기가 감도는 아르티나를 세워든 채 천천히 거대 라트리비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거대 라트리비스가 고개를 들어올리며 방울뱀 소리를 냈다.

소집 명령이었다. 새끼 라트리비스들이 하던 것을 중단하고 일제히 어미의 곁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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