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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60화 (60/180)

제60화. 막간의 레이드 (1)

“…그렇다면 이번에도 요한 군이 활약해준 것이로군?”

관리국 국장, 유명학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네, 옛 동료라고 하는 하프 엘프도 엄청난 전력이었습니다.”

이수연은 침착하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미 문서로 보고를 올렸긴 하지만, 워낙 중요한 내용이라 확인 절차를 밟고 있었다.

“흥미롭군. 대미궁에서 죽었다던 이세계의 인물이 소생한 채로 발견되다니.”

“전요한이 거짓말을 한 것 같진 않습니다. 그녀는 정서희를 통해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알았네. 이만 물러가게.”

고개를 끄덕인 유명학이 나가도 좋다며 손을 내저었다.

이수연은 공손하게 인사한 후 문밖으로 모습을 감췄다.

“「첫 번째 시련」은 무사히 통과한 모양이군.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네.”

홀로 남겨진 유명학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대재해급의 사건들을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했다.

똑똑.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국장실 내부로 등장했다.

“저를 찾으시다니, 어지간히도 중요한 일인가 보군요.”

멜리사.

북유럽 출신의 비밀 요원으로,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4성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는 외부에 알려져선 곤란한 임무를 막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자네처럼 각성을 할 수 있게 된 아카데미 생도들이 둘이나 생겨났다네.”

“한국 지부에서요? 그것 참 놀랄 만한 일이로군요.”

“신임 교관으로 가서 잠시 그들을 맡아주지 않겠나? 최근의 사건들로 인해 아카데미는 인력 부족 상태라네.”

평상시엔 유능한 인재를 훈련시키기만 하는 양성기관이었다.

그런데 「불온한 존재」들이 전요한과 주위 인물을 노리는 바람에 상당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저보고 실비아처럼 보모 역할이나 하라는 건가요?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북유럽에서는 아이들을 엄격하게 키운답니다.”

같은 출신의 실비아도 무자비한 대련으로 악명 높았다.

그녀가 순애에 가까운 애정을 퍼붓는다면, 멜리사 자신은 좀 더 이성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굳이 자네가 몰아붙이지 않아도, 그들은 가혹한 시련 위에 놓일 것이네. 어디까지나 만일을 위한 것이니 휴식기가 주어졌다 생각하게.”

“국장님께서 그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 자라면, 저도 만나 볼 필요성은 있겠군요. 부디 「하운드」보다는 나은 인재이길 바랍니다.”

하운드는 국내의 최고 전력인 채강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관리국의 사냥개.

하지만 그도 죄악의 세력과 정면으로 맞부딪치면서 한계를 드러냈다.

세계적인 전력급의 멜리사가 최근 바빠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길 바라네, 힐데.”

장신의 멜리사가 머리를 꼬는 모습을 보며 유명학은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브룬힐데.

각성했을 때의 모습이 신화 속의 발키리와 닮았다고 붙여진 칭호다.

그녀가 전요한과 함께 하면 과연 어떤 결과를 이루어낼까.

기대감을 키워가는 유명학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 * *

“당신의 세계는 정말 흥미진진한 것들로 가득하군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것저것 검색해보던 시르케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어렵지 않게 누리고 있었다.

“아카데미엔 대형 도서관이 있으니까 심심하면 가봐. 이제는 네게도 충분한 권한이 있잖아?”

전요한은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가 말하는 권한이란, 시르케가 관리국으로부터 부여받은 영주권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저는 이쪽 세계에서는 북유럽 출신의 고아로 되어 있는 거군요? 던전 재해 때문에 가족을 잃었는데 우연히 이능력을 각성하게 된 17세 소녀.”

“뭐, 나이는 신경 쓰지 마. 네가 하프 엘프라 어리게 보여서 그런 거니까.”

더욱이 아카데미 생도로 위장한 채 지내려면 미성년자인 편이 유리했다.

“아무튼, 따뜻한 수프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아침에 뭘 먹는진 잘 알고 있겠죠?”

고개를 돌린 시르케가 자연스럽게 아침 식사를 요구해왔다.

그녀는 아직 모르는 게 많다면서 밖으로 돌아다니는 걸 꺼려 하는 중이다.

“수프? 그거야 기숙사 식당에 가면 종류별로 많이 있는데.”

“제 입맛에 맞는 걸로 가져와 주세요. 함께 곁들일 만한 빵도 있으면 좋겠고요.”

시르케는 일방적으로 말한 후 다시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요한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이세계인으로서 적지 않게 불편함을 느낄 것인 만큼, 최대한 편의를 봐줘야 한다.

그녀가 되도록 여기 오래 머물러 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끼이익.

문밖으로 나오자 저만치서 걸어오는 정서희의 모습이 보였다.

용무가 있어서 찾아온 것 같은데, 마침 잘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부사감님, 밥 먹으러 가죠.”

“네? 조금 이른 시간인데요?”

“주위가 한가하니까 오히려 좋죠. 민감한 이야기도 하게 될 것 같은데.”

아직 저번에 발생한 사건의 후속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다.

상급생의 실전 평가는 무효로 결정 났고, 피해를 입은 생도들을 위해 며칠간의 휴식기가 주어졌다.

그래서인지 외박을 하는 이들이 많아서 기숙사 식당은 더욱 조용했다.

“…오늘 메뉴는 김치찌개네요.”

“왜요, 맛있는데.”

식판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은 전요한이 아무렇지 않게 수저를 들었다.

그가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자, 정서희는 질렸단 표정을 짓는다.

“대미궁에 갇혀 있을 때, 한국 음식이 그렇게 그리웠어요?”

“당연하죠. 서희 씨도 이상한 레시피가 판을 치는 문화권에서 한번 살아 볼래요?”

특히 대미궁은 먹을 게 부족하기도 해서 해괴망측한 음식이 많았다.

전요한이 몇몇 요리명을 언급하자 정서희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그만해요. 밥맛 똑 떨어질 것 같아요.”

“어쨌거나, 하고 싶단 말이 뭐예요?”

“얼마 전에 각성을 하면서 4성으로 성급이 올라가셨다고 들었어요. 대체 비결이 뭐예요?”

정서희의 용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녀가 빠른 성장의 비결을 묻자, 전요한은 조금 난감해졌다.

“음… 자신을 극한의 상황으로 계속 몰고 가면서 절실하게 바라면 됩니다.”

“뭐예요, 그게. 팁이 아니라 정론에 가깝잖아요.”

실망한 정서희가 삐친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그때, 뒤쪽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최근에 소문이 떠들썩한 그 인물인가요?”

고개를 돌려보니, 붉은 머리칼을 길게 기른 장신의 여인이 서 있었다.

에메랄드와 같은 녹색의 눈동자.

오뚝하게 솟은 콧대와 가느다란 턱선.

북유럽형의 미인답게, 강인하면서도 매력이 넘치는 모습이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앞으로 전요한 당신을 실전에서 지도할 임시 교관입니다. 이름은 멜리사. 들어는 봤겠죠? 대검류를 활용한 진영 파괴가 특기죠.”

멜리사는 첫 등장부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월드 랭킹 1위의 실력자다.

국내 서열 1위인 채강윤보다도 훨씬 강하고, 최초로 4성에 돌입한 업적이 있었다.

“대검류라, 어떻게 싸우는지 구경해보고 싶네요.”

“호기심이 동한 거라면, 실비아처럼 검술대련을 해줄 수도 있습니다만?”

멜리사는 은근히 전요한의 승부욕을 건드렸다.

하지만 전요한은 귀찮은지 고개를 저어보였다.

“괜찮습니다. 최근에 일이 좀 많아서 피곤하거든요. 뭔가 보상이 주어지는 임무라면 모를까.”

“공개 레이드를 말하는 건가요? 확실히, 거기에선 기여도에 따라 전리품이 분배되니까 활약하는 재미가 있긴 하죠.”

아카데미에서 주로 지내는 생도들로선 누리기 어려운 일이었다.

재해 발생으로 인한 긴급 소집이 대부분 면제되는 탓이다.

하지만 수익적인 면을 생각하면, 그곳에 낄 만한 메리트가 충분히 있었다.

기회가 없어서 입맛만 다시고 있을 때, 누군가의 핸드폰에서 문자 도착 알림음이 들려왔다.

“음?”

정서희는 무심코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 긴급 경보 발령. 해당 지역구에 거대 라트리비스(4등급) 출현. 현재 소재지에 있는 헌터들은 전투 장비를 갖추고 집결 바람.

소집 명령이었다.

헌터는 군 복무를 하지 않는 대신, 재해가 발생하면 국가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

다만, 관리국 요원의 경우엔 반드시 참가해야 할 의무는 없다.

“여기 한번 가볼래요? 필참자가 아니라곤 해도 참여 자체를 막진 않으니까요.”

누구든 헌터이기만 하면 공개 레이드에 낄 기회는 주어졌다.

정서희는 부사감으로서 해야 할 업무가 밀린 탓에 가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럼 서희 씨는 여기 남아서 시르케를 지켜봐 줘요. 아직 현대 문명에 익숙하지 못하니까요.”

“알겠어요. 그리고 위험한 일이니 두 분의 동행은 상부에 보고해 둘게요.”

수행 요원의 임무를 맡고 있는 이상, 비밀로 해주진 못한다고 한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멜리사에게로 돌아섰다.

“자가 차량은 있죠? 걸어가긴 좀 빡센데.”

“물론이에요. 제 능숙한 운전 솜씨로 현장까지 모셔다드리죠.”

자신의 활약을 기대하라며 멜리사가 당당하게 웃어 보였다.

* * *

집결지에는 많은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어림잡아 세어 보아도 삼백 명은 족히 넘어보였다.

소집 인원이 거의 다 도착하자 곧바로 이동 명령이 내려졌다.

브리핑 따윈 없었다.

어차피 레이드 몬스터를 포위하고 있다가, 분대별로 공격하면 끝인 탓이다.

대기기간 동안 하품을 하면서 전요한은 포위망 중앙의 거대 라트리비스를 응시했다.

똬리를 튼 거대한 뱀.

그것은 언뜻 보기에 아나콘다같이 생겼으나, 전체적으로 색감이 청색에 가까웠다.

물론 단순한 뱀이 아니었다.

거대 라트리비스는 4등급의 정예 몬스터다.

외형은 6등급인 일반 라트리비스와 동일하지만 여러 특수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단순히 덩치만 크다고 해서 몬스터 등급이 올라가지는 않는다.

“거대 라트리비스의 기본적인 공격 방식은 세 가지가 있어요. 전부 위협적이죠.”

옆에 서있던 멜리사가 패턴을 설명해줬다.

“상대를 휘감아 압사시키기도 하고, 독니로 물어뜯거나 집어삼키기도 해요. 입에서 냉기를 뿜어 상대를 통째로 얼려 버리기도 하고요.”

주의해야 할 점은 놈이 내뱉는 냉기가 광역 마법이라는 사실이다.

미리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녀석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냉기 공격에 당하면 옴짝달싹할 수도 없고, 상태이상 해제 주문이 없으면 꼼짝 없이 당하게 된다.

“생각보다 별것 아닌데요?”

전요한은 한껏 여유를 부렸다.

저런 놈 따위, 대미궁에서 지긋지긋하게 상대해온 탓이었다.

“그 자신감,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죠.”

“기대해도 좋아요. 저는 상상 이상의 남자니까요.”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던 도중이었다.

콰앙! 하고 지면을 울리는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굉음의 근원지는 거대 라트리비스였다.

녀석이 똬리를 풀고 움직임을 재개하자 지휘관이 손을 들어 올렸다.

휘황찬란한 마법들이 거대 라트리비스를 향해 날아갔다.

폭발음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거대 라트리비스가 방울뱀 같은 소리로 울부짖었다.

레이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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