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질투의 죄악 (2)
“나약해 보이는 게 잘도 그런 능력을 손에 넣었구나!”
스반힐트가 귀찮다는 듯 채린을 흘끔 바라봤다.
본래의 능력대로라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존재가 소멸되었을 터다.
하지만 여기는 지구.
다른 차원의 법칙으로부터 적지 않은 간섭을 받는 중이었고, 강림한 방식조차도 불완전했다.
화신으로서의 가능성을 품은 각성자를 쓰러뜨리려면, 어느 정도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하하, 이거 곤란하게 보이는데? 콧대 높은 너라도 서릿발에 발목이 묶여서 애간장이 탈 줄은 예상 못했지?”
비틀거리며 호흡을 고르던 전요한이 꼴좋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모욕을 당했다고 여긴 스반힐트는 화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성가시게 되었을 뿐, 네놈들을 쓸어버리는 일쯤이야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스반힐트의 주위로 검붉은 마기가 치솟아 올랐다.
심상치 않은 기세로 거세지더니 몰아치는 혹한마저 잠식해 버린다.
“……!”
정신을 집중하던 채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나 몰아세우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다시 우위를 점하는 모습이 아득한 격차를 실감하게 한다.
‘그래도 질 수 없어!’
전요한에게 닿기 위해 더욱 앞쪽으로 손을 뻗었다.
밀려나는 혹한이 반항하기 시작하자, 스반힐트의 시선은 완전히 채린에게로 옮겨졌다.
“여흥을 위해 구경꾼들은 조금 내버려 두려 했는데, 계속 방해가 되니 어쩔 수 없구나!”
검은 구체가 다시금 손아귀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전요한을 멈춰 세웠던 무시무시한 파괴력의 암흑 마법.
시르케의 수호 결계도 그 위력 앞에선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전부 말소시켜 주마! 어차피 살려둘 가치는 없었으니까!”
스반힐트는 검은 구체를 날리기 위해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때, 내면의 무언가가 그녀의 행동을 강하게 제지하며 속삭였다.
- 그만둬.
한유나의 목소리.
그녀는 육체의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상황에서도 의식을 완전히 놓지 않고 있었다.
“크윽…!”
머리를 짓누르는 고통에 스반힐트가 신음했다.
인간이었던 시절의 한유나가 떠올리는 과거의 기억들이 그녀를 구속하기 시작한다.
- 질투는 상처 입은 마음을 더 아프게 할 뿐이야.
눈앞에 환영처럼 한유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스반힐트는 썩 꺼지라며 손을 휘저었다.
“방해하지 마라! 하찮은 인간 계집애가!”
그저 자신의 강림을 위해 바쳐졌던 산 제물에 불과했다. 감히 고귀한 권능자의 행사를 방해하려 들다니.
한유나를 무시한 후, 검은 구체를 수호 결계가 있는 쪽으로 집어 던졌다.
콰광―!
폭발음과 함께 가공할 진동이 주위를 휩쓸었다.
실로 가공할 일격이었으나 시르케는 필사적으로 견뎌냈다.
“으윽!”
극심하게 흔들리던 수호 결계가 안정을 되찾는다.
하지만 다음 공격이 이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전요한은 그전에 확실히 승부를 내기로 결심했다.
“행패를 부리는 건 거기까지다, 질투의 죄악!”
다채로운 영력이 전신을 휩싸고 돌며, 검 끝에까지 치솟아 오른다.
이윽고 다시 한번 후광이 드러나자 스반힐트는 분개했다.
“포기를 모르는구나! 그 건방진 태도를 확실히 교정해주마!”
칠흑의 채찍이 검붉은 마기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정말로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듯, 맹렬한 기세가 느껴진다.
휘이이익!
예측하기 어려운 물결을 치며 채찍이 날아왔다.
전요한은 피하는 대신 그것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접촉한 부분으로부터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이 몰려왔으나, 기절해 버리기엔 아직 일렀다.
“뭐, 뭣이?”
채찍에 당했는데도 전요한이 제정신을 유지하자 스반힐트는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저 녀석에겐 「질투」의 권능이 먹혀들지 않는단 말인가.
채찍에 휘감기는 순간, 이성을 잃고 심신이 속박되어야 할 것이거늘.
“네놈의 영혼은 대체….”
“이쯤에서 승부를 내자고!”
한 차례 피를 토해낸 전요한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채찍의 탄성을 역이용하여 단번에 스반힐트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 * *
‘대체 어떤 유형의 은총이 내려진 것이야?’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전요한을 보며 스반힐트는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가호를 받지 못한 인간은 이렇게 대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터.
풀리지 않는 의문에 휩싸여 있던 그녀는 전요한의 후광이 형체를 갖춰 가는 걸 보았다.
“아아, 그건…!”
온몸을 갑옷처럼 뒤덮고 있는 한 쌍의 날개.
천사의 것도, 요정이나 악마의 것도 아니었다.
마치 제단 위의 신성한 불길처럼 타오르는 그것은 끝없는 환생의 상징.
지상의 온갖 번뇌를 소각시키며 모두를 낙원으로 이끈다는 신수(神獸)의 것이었다.
불사조(不死鳥).
생명력이 고갈되어 한 줌의 재가 되더라도, 며칠 후엔 다시 정화의 불길로 되살아나는 업화와 불멸의 화신이다.
‘나의 권능이 먹히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구나.’
지구의 여신이 저 녀석에게 불어넣은 가호는 다름 아닌, 「업의 전승」.
얼마나 오래전부터 시련을 내리며 구원자로서의 길을 걸어오도록 했는진 알 수 없었다.
본인의 기억에 남아 있진 않을 테지만, 적어도 수어 차례의 윤회를 반복하며 영력이 성장해왔을 터.
비록 인간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그 위계는 신의 사자나 다름없다.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구나. 네가 지닌 영혼의 색채.’
스반힐트의 두 눈에 수집욕으로 인한 불길이 일었다.
저만한 가치를 지닌 존재는 지구의 여신 따위에겐 과분하다.
불사조를 새장에 집어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한쪽 날개를 꺾어서 지상에 머무르도록 만들 필요성이 있었다.
치지지직!
여태까지 관측된 바 없는 규모의 마기가 한 점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그 심상치 않은 흐름에 마물들도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거대한 심연의 소용돌이가 스반힐트를 중심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얼어붙는 혹한도, 푸른 물결의 영력도 더는 그녀를 막지 못한다.
“자아, 어서 날아와 내게 안기거라!”
지척까지 다가온 전요한을 향해 스반힐트가 외쳤다.
진정한 정체를 알아냈으니 이제는 약점을 노려 포획할 차례.
희귀한 컬렉션을 수집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파괴적인 수단도 아끼지 않으려 할 때였다.
- 아니, 그런 식으로는 무엇도 손에 넣지 못해.
자취를 감췄던 한유나가 환영처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남은 힘을 다해 스반힐트가 저지르려는 짓을 방해했다.
“그만둬라, 인간 계집!”
일시적으로나마 암흑 결계에 균열이 생겨나며 스반힐트에게 빈틈이 생겨났다.
전요한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혼신의 검격을 휘둘렀다.
전신을 휩싸고 있던 날개가 마침내 펼쳐지며 신수로서의 영력을 실어낸다.
이후 암흑 결계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주위는 온통 업화의 불길에 휩싸였다.
심연의 소용돌이가 잠시 주춤하던 찰나의 순간.
푸욱!
아르티나의 검 끝이 가슴을 관통했다.
스반힐트는 눈을 홉뜨며 선혈을 왈칵 쏟아냈다.
“쿨럭!”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 전요한에게로 향한다.
전요한은 그녀를 붙잡은 후 그대로 지상에 내리꽂았다.
콰광―!
최후의 결전은 그렇게 해서 막을 내렸다.
추한 몰골로 쓰러진 스반힐트가 이를 악물었다.
“크윽!”
한유나의 방해를 받은 탓에 심연의 소용돌이는 구심점을 잃고 흩어지는 중이었다.
더는 맞붙어봤자 능욕만 당하게 될 터.
그녀는 분한 표정으로 후일을 기약했다.
“이 빚은 다음에 반드시 되돌려주겠다! 그때는 방심 안 할 테니 두고 봐!”
마음만 먹으면 지구 따윈 간단히 없앨 수 있다며 위협하지만, 허세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주전력을 상당히 잃은 탓에 마계 영지가 이전의 위세를 되찾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
적어도 수백여 년간은 다른 차원을 노리지 못할 것이었다.
“한동안 못 볼 텐데, 마지막 대사를 참 저급하게 하네.”
한유나에게 깃들어 있던 스반힐트가 황급히 마계로 되돌아가자, 전요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유나의 머리칼이 원래대로 되돌아오면서, 주위의 어둠이 점차 걷혀간다.
“유나!”
“의식이 되돌아온 거니?”
죄악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나자, 채강윤과 율리안이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리운 목소리들.
전요한의 품에 안겨 있던 한유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다들 오랜만이네….”
이제야 서로 마주 보며 제대로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채강윤과 율리안은 눈물을 훔치며 양쪽에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몇 년 만에 겨우 만났지만, 그것도 잠시.
예정된 영원한 이별이 운명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전부 나의 잘못이었다. 다시 고통 받게 해서 얼굴을 볼 면목이 없구나.”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사죄의 말을 건네는 것 이외에 두 사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괜찮아. 악몽은 전부… 끝났으니까.”
모두를 구속하던 반구체의 결계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덧 푸른 하늘이 보이자 한유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내 몫까지 열심히 살아줘. 더는 자책하지 말고, 모두와 함께 웃으며 행복하게….”
지난 기수의 학생회장으로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도록 당부했다.
가쁜 숨을 내쉬는 한유나의 시선에 다가오는 채린의 모습이 닿았다.
이번 기수의 학생회장.
전투로 엉망이 된 생도복이지만, 붉은 완장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옛날 기억이 나네. 그때는 정말 아무런 걱정도 없이 교정을 나돌아다녔는데.”
사소한 다툼으로 투덕거렸던 일조차 한유나에게 있어선 소중했던 추억들이었다.
스르르 눈이 감겨가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전요한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약속은, 제대로 지킨 걸까?”
일전에 후회 없는 최후를 맞이하게 해주겠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과연 이것이 최선이었는지 의문이 생겨난다.
언제나 한결같던 전요한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며, 한유나는 비로소 머금고 있는 눈물을 흘려냈다.
“응, 고마워. 모두와 제대로 이별을 할 시간을 마련해줘서.”
만약 전요한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곧장 심장을 찔렀다면 그녀는 숨이 붙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죽게 되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이 몇 분간의 대화는 줄곧 절실하게 원해오던 순간이었다.
“그럼 다들 안녕. 다시 만나서 즐거웠어.”
말을 마친 후 한유나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
손발의 끝에서부터 재가 되어 사라져가는 그녀를 보며, 모두는 각자 담아두었던 말을 건넸다.
“이제 편하게 쉬어, 유나.”
“다음 생엔 고통받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
“너는 최고의 학생회장이었어. 함께 했던 시간들을 결코 잊지 않을게.”
어디선가 그윽한 꽃향기를 담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모두의 틈새를 떠돌다가, 상승하는 기류가 되어 하늘로 사라졌다.
“인간의 영혼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그동안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던 시르케가 감상을 늘어놓았다.
대마법사였던 그녀조차 윤회의 섭리에 대해선 제대로 알지 못한다.
신족의 차원인 천상계와 마족의 차원인 마계.
그 간극의 사이에 존재하는 영계는 죽기 전엔 가볼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곳의 원천적인 힘을 빌려와서 다룰 수는 있으나,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여전히 인간의 이지를 넘어선 영역이었다.
“글쎄. 잘은 모르지만 우리가 고민할 필요는 없어.”
전요한은 여전히 한 손에 남아 있는 온기를 느꼈다.
죽기 전에 한유나가 전하고 간 일말의 의지.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단 메시지가 마음을 질책했다.
“돌아가자. 우리가 원래 있었던 곳으로.”
허공에서 군용 헬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리국에서 보낸 검은 차량이 엉망진창이 된 시가지를 배경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놓아줘야 할 아쉬움들을 뒤로하며 전요한은 몸을 일으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