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질투의 죄악 (1)
“영혼을 잃은 날개여! 밤하늘에 가려진 희망이여! 여기에 그대의 맹약이 함께 하리니, 어둠의 너머로 길 잃은 추종자들을 인도하라!”
시르케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마법진 위에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허공에 푸른 영체들이 생겨나서 주위를 점차 밝히기 시작한다.
“흥, 건방진 잡종 같으니. 네년의 마법 따위로는 내게 대적할 수 없느니라.”
고작해야 중급 수준의 영계 마법에 스반힐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앞으로 손짓하자, 어둠 속에 있던 마물들이 해일이 밀려오는 것처럼일제히 돌격해왔다.
“다른 이들을 부탁해, 시르케!”
“맡겨주세요!”
전요한이 후열을 맡기자 시르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동시에 시전 중인 영계 마법은 이미 3개.
이처럼 3중 영창을 유지하며 수비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공격하는 역할은 오로지 전요한에게 맡겨진 셈이다.
“어딜 함부로 덤벼들려 하느냐. 설마 내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발정이라도 난 건 아니겠지?”
거리를 좁히려는 전요한을 향해 스반힐트가 요사스러운 웃음을 냈다.
그녀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고, 무형의 파동이 허공을 찢으며 날아갔다.
“크윽!”
전력으로 달려가던 전요한의 몸이 순간적으로 붕 떴다.
그는 뒤쪽 방향으로 공중제비를 돈 후 지면에 착지했다.
‘보이지 않는 능력인가?’
발을 묶거나, 특정한 자리에 고정시킬 목적으로 자신에게 직접 작용하는 압력은 분명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절대면역」에 의해 불리한 간섭이 모두 무효화되었을 테니까.
마치 마력 파동처럼 방금 전의 그것은 자신을 강한 충격과 함께 역방향으로 밀어냈다.
‘총탄과 비슷한 방식으로 날려보내는 것이니, 잘하면 피할 수도 있겠군.’
눈을 감고는 전신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환생으로 인해 재구축된 육체는 이런 상황에서 정신이 극도로 예민하게 해준다.
스슥—
무언가가 다가오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 방향과 몸짓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어림없다!”
가까운 거리의 측면을 향해 전요한이 검격을 날렸다.
이후 피륙이 베어지는 절단음과 함께, 거대한 마수가 그대로 고꾸라진다.
“후후. 그래, 이 몸을 불러냈는데 쉽게 죽어선 곤란하지. 끝없는 고통에 절망하면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거라.”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스반힐트는 입술을 이죽였다.
단지 한 명의 인간 때문에 소중한 전력을 피해 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철저히 영혼을 유린하여 빈 껍데기로 만든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수집품으로 받아줄 것이다.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야?”
“물론이란다. 나머지는 전부 죽어도 상관없단다.”
스반힐트가 다른 생존자들을 향해 흘끗 고개를 돌렸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마물들을 막아내며 고전하는 모습이 보인다.
영혼의 방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에테르 정령 군주의 보호를 받고는 있지만.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구나. 나약한 인간들은 금방 망가지고 마니까.”
별 흥미 없다는 듯 스반힐트는 금방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는 마수들을 베어 넘기며 다가오는 전요한에게 다시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너에게 은총을 준 권능자를 부르지 않을 생각이냐? 가장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로 할 때조차, 그녀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는구나.”
무책임하게.
그래서 지구의 여신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래서야 마치, 눈앞의 인간이 혼자서도 충분히 자신과 대적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마계에서 친히 강림한 자신을 욕보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글쎄. 딱히 도움을 요청한 적은 없는데 말이야.”
달려든 마물들을 전부 처리한 전요한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한 그 표정에 스반힐트는 눈썹을 움찔했다.
“그년이 너를 이런 식으로 부려먹어도 괜찮다는 말이냐? 한낱 체스말로 내세워 놓고 방관하기만 해도 탓할 마음이 들지 않는단 말이더냐?”
“자세한 사정은 몰라. 하지만 네가 말하는 여신이, 오랫동안 지구를 관장해온 그녀가 침묵하는 이유라면 웬만하면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아.”
전요한은 진지한 눈빛으로 허공 너머의 어딘가를 올려다봤다.
다른 권능자들에 의해 최하위 차원의 불모지라고 비웃음 당하는 지구.
하지만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어떤 부족함도 없이 여신의 축복하에 자생해왔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 위에 군림하며 창조자라고 수호자라고 추앙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단지, 배후에서 은밀히 지켜보며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의 의지를 존중해 주었을 뿐. 모두에게 잊힌 채 대미궁에 갇혀 있던 자신에게도 그녀는 은총을 내려 주었다고 하니, 얼마나 자애심 깊은 존재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 그녀가 직접 나설 수 없는 이유라면 대신 좀 고생해도 괜찮겠다 여겼다.
“그년의 이름조차 모르면서, 어째서 이해하려 드느냐? 비겁하게 숨어서 움츠리고 있는 권능자 따윈 필멸자에게도 버림받아 마땅한 것이거늘.”
지구의 여신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자 스반힐트는 매우 기분이 얹짢아졌다.
신족 계열의 다른 권능자들로부터도 온갖 동정과 경외를 한몸에 받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최하위 차원을 방치해놓고 서열전에도 관심조차 없는 주제에.
그런 부적합자가 이렇게 필멸자에 의해 옹호되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네년의 지구를 생명이 자라나지 않는 지옥으로 만들어주마, 시스티나.”
한때 인간에 흥미를 가졌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저 벌레 같은 존재로만 보였다.
약해빠진 주제에 한데 모여서 이상한 자기합리화나 하는 녀석들.
지구의 지배권을 빼앗고 나면 마지막 여흥으로 전부 생존 게임을 시켜서 자멸하도록 만들 것이다.
유일하게 계속 관심을 끌고 있는 눈앞의 전리품만 제외하고.
“우선은 내 발가락을 핥는 것부터 가르쳐야겠구나. 네놈의 시선은 현재 너무 기분 나쁜 위치에 있어.”
말을 마친 스반힐트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공간이 뒤틀리며 기다란 가시 채찍이 소환되었다.
칠흑의 물질로 이루어진 그것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온갖 저주와 끔찍한 상처를 남길 것만 같았다.
“딱히 민감한 부위를 보고 있진 않았는데?”
“…노예 주제에 고개를 너무 빳빳하게 들고 있단 의미였다. 한 번 말할 때 제대로 좀 알아듣거라.”
전요한의 헛소리에 김이 빠졌는지 스반힐트는 잠시 머리를 짚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표정엔 일말의 자비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쨌든, 충분히 준비가 되었길 바란다. 이 주인님의 특별 교육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말이지!”
휘이익 하는 파공음과 함께 칠흑의 채찍이 휘둘러졌다.
처음엔 별로 길지 않았으나,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끝없이 그 길이가 늘어나며 매섭게 날아온다.
‘피하는 것이 좋겠지.’
어떤 권능이 깃들어 있는지 모르는 만큼, 신중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절대면역이 권능까지 막아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전요한은 눈을 감은 채, 채찍이 날아오는 방향과 앞으로 휘어지게 될 구간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는 이제 이능력자의 범주에서도 지극히 예외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스슥—
높이 도약하여 첫 일격을 피해낸 후 그대로 몸을 비틀었다.
간발의 차로 뒤이은 변칙적인 공격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간다.
“네놈이 감히 피해?”
“예상보다 어렵진 않네. 서커스단에서 묘기 좀 부리는 거라 생각하니까.”
하지만 질투의 권능은 단지 채찍질을 통한 속박과 조련만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대상을 손에 넣지 못할수록, 스반힐트는 더욱 이성을 잃고 극단적으로 변해간다.
“결코 넘볼 수 없는 격차를 깨닫고 굴복하거라! 이 주인님의 눈에 든 이상, 너는 평생 목줄을 차야 할 운명이야!”
어둠 속에서 수많은 검은 손가 쏟아져나오며 전요한을 움켜쥐려 했다.
어디로 도망쳐도 무의미하다는 듯, 동시에 엄습해오는 검은 손을 보며 전요한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
안그래도, 최후의 결전을 위해 체력을 조금 남겨두었다.
주어진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은 상황.
단번이 이것들을 돌파하고 스반힐트에게 치명적인 일격까지 먹여야만 한다.
“어디, 한번 해보자.”
승산이 얼마나 있는진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유나가 가시 면류관에 손을 대려 할 때 만류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그녀에게 작은 희망을 내걸며 전요한은 상체를 숙였다.
“네가 해낼 수 있길 바라.”
전력을 다하는 도약을 위해 양쪽 다리의 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이후 고개를 든 전요한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각성」을 시도했다.
“하아아아!”
눈부신 후광이 비치며 스반힐트가 소환한, 주위의 검은 손들을 전부 사멸시킨다.
그 모습을 본 스반힐트가 황당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뭐, 뭣이?”
마계 후작인 베르길리우스를 패배시켰을 때조차 별로 의심하지 않았었다.
전요한에게 권능자조차 두려워할 무언가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자신의 능력이 허무하게 가로막히는 걸 보고 나니 의문이 샘솟기 시작했다.
“시스티나, 대체 네년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냐.”
날카롭게 눈을 치떠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불안해진 스반힐트는 직접 그 대답을 구하기로 했다.
“이상한 재주가 있다만, 그걸로 끝이란다.”
왼쪽 손아귀에 검은 구체가 형성되었다.
적중할 경우 지역구 하나를 날려버릴 만한 위력을 지닌 암흑 마법.
그것은 순식간에 전요한을 향해 날아왔다.
“어림없어!”
검은 구체가 서슬 퍼런 검끝에 닿았다.
이윽고 대규모의 폭발이 일어나자, 마물들로부터의 방어에 전념하던 시르케가 고개를 돌아봤다.
“괜찮으신 건가요!”
애초에 「영혼의 방벽」 너머로 가있는 전요한을 도와주긴 어려운 상황.
자욱한 안개가 내리깔리자, 채린을 비롯한 모두가 그의 안위를 걱정했다.
“괜찮은 걸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
“죽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 누구도 전요한에게 조력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영혼의 방벽을 넘어서는 순간, 질투의 권능에 사로잡혀 꼭두각시가 되거나 미쳐버릴 테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채린은 마음속으로 자책했다.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재벌가의 여식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과거도, 현재도.
언젠가 다가올 미래도 그녀는 지금처럼 받아들여야만 한다.
‘실은 너처럼 되고 싶었어. 어떤 구속에도 자유롭고, 마음 속의 말을 당당하게 내뱉는 게 부러웠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채린의 시야에 한 사내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화산재 같은 안개 속에서 그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다.
지금까지의 무엇보다도 강대한 눈앞의 존재와 대적하기 위해.
‘지금 손을 뻗으면… 너에게 닿을 수 있을까.’
이대로는 모든 희망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 희망을 자신의 마음속에 불어넣어준 사람은 바로 전요한이다.
그렇기에 채린은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그에게 닿고자 염원했다.
이로 인해 생겨난 사소한 변화.
“…린?”
그것을 처음 알아챈 건, 친오빠인 채강윤이었다.
채강윤의 눈동자에 개화하듯 돋아나는 날개가 비친다.
대체 무엇의 날개인 것일까.
따뜻한 봄이 온 것처럼 움트던 그것은 순식간에 푸른빛을 내뿜으며 좌우로 펼쳐졌다.
“당신도 각성을 하게 되었군요. 조금 의외인 타이밍이긴 합니다만.”
시르케는 작게 중얼거리며 옆쪽의 채린을 바라봤다.
요정처럼 신비로운 날개를 펼친 그녀가 스반힐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후, 소용돌이치는 듯한 혹한이 허공에 생겨나며 스반힐트를 덮쳤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막겠어. 이대로 미래의 가능성이 전부 닫혀버리기 전에.”
각성한 채린이 눈을 뜨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