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57화 (57/180)

제57화. 가시 면류관 (7)

“이걸로 끝이다!”

전요한이 승리 선언을 했다.

그리고는 빙결의 마법검에 최대한의 마력을 부여한다.

콰드드득!

냉혹한 빙결이 라틴젤의 상처 입은 육체를 잠식해 들어간다.

“이, 인간 따위가!”

분개한 라틴젤이 눈을 크게 떴다.

마기를 순간적으로 방출시켜 전요한이 멀리 나가떨어지게 만든다.

“그래 봤자다!”

전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달려들려고 했다.

그때, 성유물을 양손에 쥔 채 유유히 도망치는 소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가시 면류관」.

저것이 멋대로 사용되도록 내버려두면 곤란하다.

“치잇, 귀찮게 됐네.”

한발 늦게 소악마의 뒤를 쫓았다.

녀석이 향하는 곳은 얼마 전에 생겨난 크레이터였다. 한유나가 추락한 지점으로,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봐, 조심해!”

거리를 좁혀가던 전요한이 주의를 주었다.

이윽고 한유나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자, 소악마는 순간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느, 늦었나?”

잠시 맥을 못 추리는 틈을 타서 가시 면류관을 씌우려고 했었다.

그렇게만 되면, 「질투의 죄악」은 최상의 산 제물을 매개로 지상에 강림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이밍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진 상황.

소악마가 주저하자 배후에 있던 베르길리우스는 가시 면류관을 빼앗았다.

“망설일 거라면 내놓아라! 내가 하도록 하지!”

저번엔 조금 방심했다가 치명상을 입었다.

하지만, 이번엔 결코 호락호락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베르길리우스였다.

“이런 식으로 시간만 길게 끌수록 곤란한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곤란해진 한유나가 다가오는 전요한을 향해 물었다.

그녀는 반마(半魔)로 변해버린 육체를 다루기 어려운지, 여전히 헐떡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왜, 두려워? 이대로 패배하기라도 할까 봐?”

“솔직히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목숨이니까. 하지만….”

한유나의 시선이 저만치서 고전하는 일행에게로 향했다.

기억이 완전히 돌아온 이후에도 그들에겐 한 마디의 말조차 건네지 못한 상태다.

‘더는 나 때문에 모두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

만약 눈앞의 악몽을 끝내야 한다면 그 역할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어야 했다.

마음속으로 다짐한 한유나가 전의를 불태우며 베르길리우스에게로 돌아섰다.

그때, 그녀의 어깨 위로 손 하나가 올려졌다.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좋게 마무리 지어줄 테니까.”

“…응?”

한유나는 무심결에 뒤돌아봤다.

그녀를 향해 전요한이 씨익 웃어보였다.

“저 녀석들하고 못다 한 말 전부 마치고 홀가분하게 이별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이미 한 번 죽은 한유나를 되살릴 방법은 없었다.

그녀가 지금 제정신으로 여기에 존재하는 건 오로지 시르케의 영계 마법 덕분.

만약, 육체를 지탱하는 마기의 원천이 사라지거나 영계 마법이 시전 중단되면 그대로 존재가 사라지게 될 운명이다.

그렇다면 가능한 후회 없는 최후를 맞이하게 해주는 편이 바람직할 터.

한유나가 모두의 기억 속에서 항상 웃을 수 있게 해주기 위해, 전요한은 다시 마법검을 들어올렸다.

“더는 수작질 부릴 생각 마! 이대로 승부를 내주겠어!”

거듭되는 전투로 슬슬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대미궁에 갇혀 있었을 때부터, 언제나 상식선 이상의 벽을 넘어왔던 탓이었다.

“큰소리치는 것도 거기까지다, 인간 검사! 대체 마계 귀족을 뭘로 보는 것이냐!”

일전에 망신을 당한 바 있는 베르길리우스도 전의를 불태웠다.

그는 마검 미스텔테인을 들어올리며 일격필살의 결전기를 준비했다.

「망령기사의 즉결처형」.

온갖 저주를 머금은 그 일격에 버텨낼 수 있는 인간은 여태까지 한 명도 없었다.

“네놈의 무력함을 절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약아빠진 영혼까지 소멸시켜주마!”

진홍색 마기를 불태우는 미스텔테인이 한껏 내리쳐졌다.

무려 5성급의 성유물이 뽐내는 최대한의 위력.

설령 막아낸다 해도 온전히 서있지 못할 터였으나, 전요한은 피하지 않았다.

“죽는 건, 너야!”

빙결의 마법검, 아르티나가 요한의 기세에 반응해 울부짖으며 혹한을 일으켰다.

사선을 그리며 올려치는 궤적으로부터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순간 번뜩인다.

“뭐, 뭣?!”

예상치도 못한 이변에 베르길리우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작해야 3성급에 불과했던 무기가 푸른빛을 발하며 형태를 바꾸기 시작한다.

그것은 성급 진화.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극히 드문 확률로 일어나는 기적이었다.

[아르티나]

성급 : ☆☆☆☆

특성 : 빙결의 마법검

이제 4성급의 성유물이 된 아르티나는 더욱 매서운 혹한을 내뿜었다.

여전히 한 단계의 차이가 나긴 하지만, 그만한 격차는 소유자의 역량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하아아아!”

전력을 다하는 전요한의 두 눈에 불길이 일었다.

바로 직후에 맞부딪친 검격은 주위에 용이 솟아오르는 듯한 상승기류를 일으켰다.

“크윽!”

견뎌내기 어려운 외압에 베르길리우스가 신음을 내뱉었다.

정체불명의 권능.

일찍이 지구의 여신이 내린 무형의 은총이 전요한을 다시 한번 날아오르게 하고 있다.

“역시, 그건!”

두 번이나 마주하고 나서야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전요한이 지니고 있던 잠재력의 완전한 형태.

그것은 최하위 서열의 여신을 건드리는 게 오랫동안 금기되어 왔던 이유와도 맞닿아 있었다.

비밀을 알게 된 베르길리우스는 입 밖으로 그에 대해 누설하고자 했다.

하지만 곧 자신을 덮쳐오는 업화의 불길에 의해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아…!”

다채로운 불길에 휩싸인 베르길리우스는 환영을 보았다.

그동안 자신이 걸어왔던, 고독한 길에 대한 단상.

기다랗게 드리워지는 죽음의 그림자가 그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가, 하고.

“이걸로 끝이다, 마계 후작!”

이를 악물고 버텨낸 전요한이 다시 한번 검격을 날렸다.

얼마 후, 베르길리우스의 모습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으로 갈라지더니 그대로 소멸하기 시작했다.

“이런, 그런 식으로 죽어버리면 곤란합니다. 아무리 한심한 당신이라지만.”

저만치 물러나서 몸을 추스르던 라틴젤이 혀를 찼다.

그리고는 자신의 남은 마기를 전부 소모하여 베르길리우스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해주었다.

“어, 어째서….”

“당신이 없으면 마계 영지의 변방을 지키기 어려우니까요. 그럼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기존의 계획은 상당 부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최후의 안배는 아직 남아 있는 상태다.

라틴젤은 반쪽짜리 모습만 남아버린 베르길리우스로부터 성유물을 건네받았다.

“진정한 악몽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밤이 찾아오면 이곳에서 절망을 마음껏 누리시길.”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 채, 라틴젤은 차원의 틈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마계의 성유물, 가시 면류관에 깃든 권능을 이용한 것이다.

전요한은 녀석들을 뒤쫓으려 했으나 기둥처럼 형성되는 암흑 결계에 가로막혔다.

“이렇게 놓쳐 버리다니, 마무리가 좋지 않았네.”

적대적인 상대와 결판을 맺지 못하는 건 여러모로 꺼림칙했다.

언제 다시 나타나서 수작질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로 인해 최종보스 격인 존재가 나서게 된다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전요한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뒤따라왔던 한유나가 생기 없는 눈을 한 채, 허공의 가시 면류관을 응시하고 있다.

“…….”

비록 일시적으로 자아를 되찾았다고는 하나, 죄악의 권능에 대항할 정도는 못 되었다.

마계 공작, 라틴젤보다도 더 강력한 구속력을 행사하는 장력이 주위에 펼쳐져 있다.

“이런, 앞으로는 더 위험해질 것 같네요.”

영계 마법을 유지하던 시르케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녀의 주위에서 마인들과 싸우던 채린이 상황을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아까 도망친 마계 공작이 강제로 저 성유물의 권능을 발동시켰어요.”

“권능이라고? 대체 어떤 거지?”

찌릿 하는 전기를 내뿜으며 이수연이 물었다.

시르케는 손가락으로 허공의 먹구름을 가리켜보였다.

“마계를 지탱하는 일곱 기둥. 그것들 중 하나를 여기에 세우는 의식입니다.”

다시 말해, 지난 사건들의 진정한 배후라고 할 수 있는 죄악의 강림이었다.

두두두둑.

눈앞에서 부유하고 있던 흑진주가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한계에 달해 그 형체가 없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채강윤과 율리안이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저게 없어지면 유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다시 꼭두각시로 되돌아가기라도 하는 건가?”

두 사람은 걱정이 앞섰지만 지독한 부상 탓에 한유나에게로 달려가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천천히 가시 면류관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뿐.

“어째서, 막지 않는 거죠?”

채린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바로 곁에 있는 전요한이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고 한유나를 내버려두고 있는 탓이었다.

“그에게도 생각이 있을 겁니다.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시르케도 지켜보는 편이 좋겠단 판단을 내렸다.

이대로라면 죄악의 강림은 어차피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일.

여태까지 마주하지 못했던 심연의 어둠이 모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으으….”

흐리멍덩해진 눈을 한 채, 한유나가 가시 면류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칠흑의 불길에 휩싸인 그것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어서 자신을 집어 들라고.

그냥 머리에 얹기만 하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고.

네가 바라는 모든 소원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스윽–

가녀린 손가락이 가시 면류관에 닿았다.

이윽고 한유나의 머리 위에 「순교」의 왕관이 씌워지자, 주위는 거짓말처럼 어둠에 휩싸였다.

* * *

마치, 칠흑처럼 어두운 공간이었다.

한치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전요한은 중얼거렸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솔직히 죄악의 강림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되도록 막고 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달리 방법이 없다.

“하지만 상관없어. 내심 기대하기도 했으니까.”

질투의 죄악, 스반힐트.

일전에 결전을 선포한 바 있었다.

야욕을 드러내며 평온했던 지구에 마수를 뻗는 그녀의 존재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다.

“강림해라, 마녀. 너 또한 보란 듯이 물리쳐주마.”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전요한은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나를 물리친다고? 그런 망상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 것이냐?”

이윽고 칠흑빛의 기운이 허공에서 내려왔다.

마치 거대한 기둥처럼 보이는 그 아래에 한 여인이 서있었다.

한유나.

아니, 한때는 한유나였던 존재였다.

“하얀 마녀도 죽였는데, 너라고 별다를 바 있겠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전요한은 태연히 대꾸했다.

“이리스를 죽인 건 조금 의외이긴 했단다. 하지만 과연 그만한 업적으로 내게 맞설 수 있을까?”

은발의 여인이 요사스럽게 웃어보였다.

여전히 모습은 한유나인데, 분위기와 눈빛은 완전히 다르다.

전요한은 이제부터 그녀를 스반힐트라고 인식하기로 했다.

“불완전하게 강림한 거 다 알아, 마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네 모습이 그렇게 애매하지는 않았겠지.”

“확실히 그렇기는 하구나. 이 계집애의 육체는 내 의식을 온전히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스반힐트는 불만 섞인 눈초리로 자신이 강림한 한유나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봤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바꾸고는 다시 요사스럽게 웃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단다. 너희들을 전부 죽여버리고 이곳을 나의 식민지로 만들기에는 말이야.”

말을 마친 스반힐트가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중력이 모두의 어깨를 짓눌렀다.

“뭐, 뭐야!”

“크윽!”

감히 고개를 들고 있는 것조차 어려운 외압감.

맥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요원들을 보며 스반힐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아, 덤벼보거라! 누구든 내 발밑에라도 오르는 자에겐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겠다!”

고요했던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빛이 여기저기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림 이후 본격적으로 소환되기 시작하는 스반힐트의 권속들.

상황을 지켜보던 전요한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시르케, 준비됐어?”

“물론입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시르케가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이후 새로운 마법 영창이 그녀의 입안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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