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가시 면류관 (6)
“그쪽이야말로 단단히 각오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제가 준비한 연회는 그리 만만하지 않으니까요.”
말을 마친 라틴젤이 마치 지휘하듯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모여든 마인들이 일시에 아군 진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키아아아!”
의식을 잠식당한 결과, 마인이 되어버린 생존자들.
그들의 잘못이라곤 말하기 어려웠지만, 이쪽도 인정사정 봐줄 여유는 없었다.
“우선은 방어에 신경 쓰도록 하죠. 저 상위 악마들은 전요한과 반마가 된 여생도가 처리해줄 겁니다.”
시르케가 「영혼의 방벽」을 펼치며 말했다.
옆에 있던 채린은 걱정이 되는지 가슴에 손을 모았다.
“정말 둘이서 가능할까요? 저희들의 원조가 없으면 열세에 놓일지도 모르는데….”
그녀가 줄곧 눈을 떼지 못하는 상대는 전요한이었다.
왜인지, 최근에 자주 함께 해왔던 그에게만 자꾸 시선이 간다.
“동료니까 서로 믿는 거예요. 저에게도 당신들을 대신해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희를요?”
“네, 전요한은 곁에 있는 사람들을 잃는 걸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니까요.”
비록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었으나, 그에겐 소중한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던 과거가 있다.
그 결과, 악마들을 극도로 증오하게 되었고 자신보다 약한 자는 동료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랬던 당신도 이쪽 세계에서는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나 보군요.’
언제나 강한 척해도, 한편으로는 어린아이처럼 여린 구석이 있었다.
끝없이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순수함.
그런 모습은 100년이 넘게 살아온 자신의 모성애를 가끔씩 자극하곤 한다.
절실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번엔 쉽지는 않을 겁니다. 상대가 무려 질투의 죄악이니까요.’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기가 지구의 여신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차원이란 사실이다.
비록 직접 나서고 있진 않지만, 위기의 상황에선 무언가 구원의 손길을 건네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시르케는 정신을 집중했다.
“저는 3가지의 술식을 동시에 유지하고 있어서,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진 못합니다. 그러니 철저한 보호를 부탁드립니다.”
어느 하나라도 중간에 풀리면 곤란한 술식들이었다.
모두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영혼의 방벽」.
한유나가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해주는 「영혼의 거울」.
에테르 정령 군주가 주위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주는 「영계의 소환계약」.
어지간한 실력의 마법사도 이 같은 수준의 마법을 동시에 유지하긴 어려웠다.
“니야아아아옹!”
사악한 존재들이 밀려오는 게 느껴지자, 캣시가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그와 동시에, 형형색색의 전투 스킬이 전장을 수놓았다.
콰과과과광–!
아카데미 학부의 일원들도, 관리국의 정예 요원들도 하나가 되어 마인들과 맞서 싸웠다.
한편, 전요한은 승부를 내기 위해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마계 공작이라곤 해도, 너 머리 굴리는 일에만 자신 있잖아. 그러니까 맞대결을 자꾸 피하는 거 아니야?”
긍지 높은 마계 귀족으로선 흘려듣기 어려운 도발이었다.
“맞대결이라, 뭐 틀린 말은 아니군요. 저는 천박하게 치고받는 것보단 고상하게 전장을 관조하는 걸 더욱 선호하는 편이니까요.”
라틴젤은 싱겁게 웃으며 받아넘겼다.
한낱 인간의 조롱질에 넘어가는 것또한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이다. 마치 벌레의 말에 일희일비하는 것과 같다.
가볍게 몇 보 뒤로 공간도약을 한 후, 베르길리우스에게 역할을 넘겼다.
“저는 관찰자로서 상황을 주시해야 합니다. 당신에게 영예로운 선봉장으로 활약할 기회를 드리지요, 데스나이트.”
“크윽…!”
졸지에 앞으로 내몰린 베르길리우스가 이를 갈았다.
‘비겁한 녀석, 계획대로 안 되었다고 나를 방패막이로 삼다니!’
같은 진영에 속해 있는 마족이긴 하나,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녀석이었다.
같은 편이라도 언제든 버리는 패로 쓸 수 있는 놈에겐 어떻게든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최후의 방책을 실행에 옮겼다.
‘역시 그분이 일찍 강림하게 하는 편이 좋겠어.’
「질투의 죄악」, 스반힐트.
그녀가 불완전한 형태로라도 현현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터였다.
라틴젤은 산 제물을 최대한 끌어모으려는 모양이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여겼다.
‘그릇으로 사용한다던 게 바로 저년이었지.’
베르길리우스의 시선이 한유나에게로 향했다.
현세의 인간 중에선 그나마 자질과 잠재력이 뛰어난 편.
얼마 전 반마로서 각성하기도 했으니, 주인님의 의식을 담아내기에 저만한 그릇이 또 없었다.
“요망한 반마! 너부터 혼쭐을 내주겠다!”
치명상을 어느 정도 회복한 베르길리우스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녀석이 대뜸 방향을 틀어서 한유나가 있는 쪽으로 달려들자, 전요한은 순간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뭐야, 만만한 상대부터 노리겠다는 건가?”
하지만 지금의 한유나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질 상대가 아니었다.
마계 후작이라곤 해도, 차원 이동으로 인한 간섭을 받고 있고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다.
“요망한 반마라니! 너, 그거 성희롱이야!”
이 중에서 가장 만만하게 보였다는 생각에 한유나가 화를 냈다.
비록 꼭두각시로 놀아나긴 했지만, 지금이라면 마계 후작이더라도 잘만 싸우면 승산이 없진 않으리라 여겼다.
곧이어 찌릿 하는 전류와 함께 격렬한 뇌전이 베르길리우스를 덮쳤다.
“흥, 이깟 솜털 같은 공격 따위 얼마든지 받아낼 수 있다!”
호언장담한 베르길리우스가 마검 미스텔테인을 들어 올렸다.
검신을 타고 치솟은 진홍색의 마기가 내리꽂히는 뇌전을 전부 흡수해 버린다.
“나는 스반힐트 님에게 총애받는 마계의 데스나이트, 베르길리우스 아르게티누스 본 카르네아렐리 되르멩 녹세리아멘티다!”
실로 장황한 자기소개였다.
하지만 그에 걸맞게, 다음 일격은 멀쩡한 상태의 한유나를 한 번에 나가떨어지게 했다.
“꺄아아아악!”
여태껏 느껴 보지 못했던, 아득한 격차에 한유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힘겹게 뇌창으로 받아내긴 했으나, 맞부딪치는 위력에서 한껏 밀려 지상으로 추락해 버린다.
콰광–!
자욱한 안개와 함께, 상당한 규모를 갖춘 크레이터가 형성되었다.
“이런, 아직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기엔 한참 멀었나?”
뒤따라 붙던 전요한이 걱정스레 아래쪽을 바라봤다.
생전에 뛰어난 아카데미 생도였다고는 해도, 잠재된 반마로서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보아하니 한동안은 일어나지 못하겠군. 그렇다면….”
남은 일은 가시 면류관을 한유나의 머리에 씌우는 것뿐이었다.
베르길리우스가 뒤돌아보자, 라틴젤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런 속셈으로 그녀를 먼저 노린 것이었군요. 목숨을 부지하려는 계책치곤 너무 졸렬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라틴젤이 변경백의 이기적인 행동을 비꼬았다.
자신이 이루려는 것은 스반힐트의 완전한 강림.
그렇게 해야만 지구의 여신도 더는 뒤로 숨지 못하고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이제 너하고는 결별이다, 라틴젤! 이 난장판을 봐라! 네놈이 배후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구경만 하는 바람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거다!”
베르길리우스는 모든 실책을 라틴젤의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뒤로 물러나서, 전요한과 그의 맞대결을 부추겼다.
“2대 1은 피한 셈이니 좋은 건가? 잘 모르겠지만 이 기회에 승부를 보자고, 마계공작!”
전요한은 마족끼리의 내분을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그가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자, 라틴젤의 표정이 처음으로 험악하게 변했다.
“하아, 정말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요. 하여간 주제도 모르고 중요한 순간에 뒤통수를 치는 자들이 문제입니다.”
베르길리우스에 대한 처벌은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라틴젤이 본모습으로 현현하자, 주위에 먹구름이 몰려들며 심상치 않은 기현상이 일었다.
인근 일대를 독성을 띤 안개로 뒤덮었던 베르길리우스와 맞먹는 위력.
두뇌형 전력인 탓에 우락부락할 정도로 외형이 변하진 않았으나, 주위에 미치는 영향력이 제법 컸다.
“드디어 본모습으로 변했군, 상위 악마.”
우위를 점했다고 느낀 전요한이 씨익 웃었다.
그는 「각성」 상태를 유지한 채, 곧바로 라틴젤에게 달려들었다.
“아까부터 제 무력을 얕잡아 보던데, 제 주특기인 「광선요격」에 한번 당해 보시죠.”
코웃음을 친 라틴젤이 공간도약으로 검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그리고는 열 손가락을 들어 올려 서로 엇갈리게 겹쳐 보였다.
“지옥의 고통을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손가락 각각의 끝에서 검붉은 광선이 뻗어나갔다.
라틴젤이 그 각도를 조절하자, 광선이 굴절되면서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날아왔다.
“제법 귀찮은 재주를 지니고 있는 걸? 그래 봤자 안 통할 테지만 말이야.”
겉보기에 매우 어지러운 공격이었으나, 전요한은 어렵지 않게 몸을 비틀었다.
현재 그는 에테르 S등급의 소유자.
한차례 「개안」을 하고 난 이후에 영력이 말도 안 되게 상승한 상태였다.
‘영력은 기존의 능력치엔 반영되지 않는 스탯이지.’
그래서 각자가 도달한 경지에 따라서 에테르 등급이 결정되는 식이었다.
아직 현세에는 제대로 체계화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
참고로 율리안 교관은 에테르 등급이 A등급이고 상대의 공격을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었다.
‘S등급이면 눈 감고도 이런 공격은 피한다.’
뿐만 아니라, 장검 따위의 무기에 한 단계 높은 수준의 검기를 실을 수 있었다.
오러.
그것은 시전자의 영혼을 통해 발현해내는, 극도로 정제된 영력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영혼을 두르는 갑주와도 같다.
“호신강기 같은 무공 따위와는 비교할 만한 수준도 못 되지.”
태산 같은 자신감을 드러내며 전요한은 오러를 불태웠다.
그의 전신과 양손으로 쥐고 있는 검신까지 다양한 색채의 불길이 솟아오른다.
“아직까지도 숨겨두고 있었던 전력이 있나 보군요.”
무엇이든 돌파하려는 기세에 라틴젤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더욱 정교하게 광선요격을 시도했으나, 전요한에겐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하아아아아!”
물결치듯 날아온 검격이 순간 불길처럼 쇄도했다.
당황한 라틴젤은 공간도약으로 여러차례 피했으나, 결국엔 빈틈을 내주고 말았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전의에 사로잡힌 전요한은 눈동자에 불길을 일으켰다.
이윽고 묵직한 절단음과 함께, 주인을 잃은 왼팔이 허공을 날았다.
촤락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마기가 분수처럼 흩뿌려진다.
“크윽!”
졸지에 한 팔을 잘린 라틴젤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이런 부상쯤이야 나중에 회복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왼팔과 함께 떨어져 나간 마계의 성유물, 가시 면류관.
급히 몸을 돌려 되찾으려 했으나 이미 무언가가 그것을 불법 점유한 상태였다.
“히히. 이걸로 주인님에게 칭찬받을 수 있게 되었네요.”
원시림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소악마.
녀석은 베르길리우스의 밀명으로 숨어서 이 순간만을 노리고 있었다.
“건방진 피라미 같으니. 그걸 어서 내놓아라!”
불길한 미래를 예감한 라틴젤의 눈에 핏대가 섰다.
그는 검지를 들어 올려 소악마를 소멸시키려 했으나, 전요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딜 보는 거야. 네 상대는 바로 나라고!”
서리와 칼바람이 휘몰아치며 빙결의 마법검, 아르티나가 라틴젤의 가슴팍에 내리꽂혔다.
“크윽!”
불의의 일격에 당한 라틴젤이 비틀거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