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가시 면류관 (5)
가려진 본모습을 비춰주는 영계 마법, 「영혼의 거울」.
신비로운 영체의 물결이 주위를 맴돌자 한유나는 의식이 혼미해졌다.
“아아….”
마기에 잠식당해, 망각하고 말았던 기억의 단편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 소중한 감정들과 마주할 때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도대체 왜….”
자신의 본모습에 의심을 품게 되니 두려움이 생겨났다.
눈앞에 있는 모든 존재가 위협적으로만 느껴진다.
보호본능이 발동하자 한유나는 저항하듯 연이어 공격을 해왔다.
콰과과광–!
흔들리는 심리를 반영하듯 인근 일대에 뇌전이 내리쳤다.
“머릿속이 혼란스럽지? 마족으로서의 네가 아니라, 인간 한유나였던 시절이 떠올라서.”
마지막 일격을 막아낸 전요한이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순간적인 틈이 생겨난 것을 이용해서 주위에 혹한을 일으킨다.
“너, 무슨 짓을…!”
“잠시 잠들어 있어줘. 저 악마들을 상대한 후에 다시 올게.”
빙결의 마법검, 아르티나가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살을 엘 듯 날카로운 칼바람이 한유나를 완전히 감쌌다.
이후 양손에서부터 조금씩 얼어붙기 시작하는 한유나.
그녀는 그만두라며 살결을 덮는 얼음에서 빠져나오고자 버둥거리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순순히 당해줄 것 같아? 나는 너희들의 오지랖 따위는, 바란 적도 없다고!”
처음 눈을 떴을 때, 자신을 반겨줬던 존재는 단 하나였다.
마계 공작, 라틴젤.
산호색 머리칼의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었다.
이제 너는 새롭게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과거에 있었던 일 따윈 기억해낼 필요도, 생각해볼 여유도 없다고.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언제나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그래서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찾다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헌데 마주하게 된 진실은 그와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사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조금만 기다려줘! 반드시 구해줄게, 유나!”
“다시는 무력하게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얼어붙는 한유나를 향해 채강윤과 율리안이 외쳤다.
이미 한계에 도달했지만, 두 사람은 사력을 다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여전히 모두가 자신만을 바라보는 현실 속에서 한유나는 중얼거렸다.
그렇게 진절머리 날 정도로 상처 입혔는데.
신음을 내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깔깔거렸는데.
하나같이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이 행동하고 있다.
“그야, 너는 저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학생회장이니까.”
전요한의 마지막 말이 흔들리는 마음에 쐐기를 박았다.
자신의 정체성이기도 했던 한 단어에 한유나는 모든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아….”
그동안 의미를 알지 못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구해 주겠다고, 지켜 주겠다고 하는 말에 동요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다들… 기다려주고 있었구나.”
의식을 잃은 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오랜 방황 끝에 드디어 살아 있는 것의 의미를 찾게 되었으니까. 한유나는 이를 악물었다.
‘모두를 지켜야 해.’
오직 그것만이, 마족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자신에게 새로이 주어진 사명이었다.
한유나가 다시 한번 생명을 갈구하자, 얼어붙었던 육체는 일시에 자유를 되찾았다.
콰득!
혹한으로 생성되어 가는 얼음 덩어리가 수많은 파편으로 쪼개진다.
“얌전히 잠자고 있으라고 했지?”
“그럴 순 없어.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늦잠 잤으니까.”
아군이 되겠다고 선포한 한유나는 서서히 뒤를 돌아봤다.
마계 공작 라틴젤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벌써 반항기가 온 건가? 어린 나이인 만큼 충분히 그럴 것 같았는데 말이야.”
무슨 목적에서인지 라틴젤은 전투에 일절 개입하고 있지 않았다.
한껏 여유로움을 과시하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전요한이 인상을 썼다.
“무슨 수작을 또 부릴 셈이냐? 네 계획은 전부 물거품이 되었을 텐데?”
“확실히, 기존의 예상과 많이 달라진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저에겐 하나의 즐거움이겠죠.”
유구한 세월을 살아가는 마계 귀족에게 있어 가장 싫은 건 따분함이었다.
아무런 이변도 없이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에 영혼은 점차 시들고 메말라간다.
그렇기에 전요한의 존재는 상당한 위협이기도 하지만, 무의미했던 하루에 새로운 색채를 불어넣는 활력소기도 하다.
“그러니 부디 마음껏 날뛰어 주십시오. 무료한 나날들이 계속되는 한, 여러분 같은 인간들은 나서서 한 줌의 즐거움을 위한 희생양이 되어주셔야 합니다.”
라틴젤은 품위 있는 자세로 마족의 철학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배후에서 잠자코 있던 시르케가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단지, 당신 자신의 만족과 저열한 욕망을 위해 나머지는 전부 희생되어도 괜찮단 말인가요? 정말이지 지저분한 사상이군요.”
그동안 시르케는 새로운 술식을 완성한 상태였다.
현재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마법을 연이어 시전하고 있지만, 지친 모습은 그리 내색하지 않았다.
어깨 위에 있는 캣시가 힘을 내라며 푸른빛의 마력을 그녀에게 공급해준다.
“아까도 건방지게 나섰던 하프 엘프군요. 그 마법진은 제가 분산시킨 인간들을 한번에 불러모으기 위한 것인가요?”
라틴젤은 마법진의 형태만 보고도 그 목적을 금방 알아차렸다.
다양한 지식에 통달한 그는 에테르 원소를 기반으로 한 주문술식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정답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빠뜨린 점이 있군요. 제가 불러모으려는 존재 중엔 인간이 아닌 자도 있습니다.”
말을 마친 시르케는 힘껏 지팡이를 내리꽂았다.
그러자 다채로운 물결이 퍼져나가더니, 흩어져 있던 이들을 하나둘씩 소환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되돌아온 거지?”
“나도 몰라. 무슨 특별한 성유물이라도 사용한 건가?”
일부는 아카데미 관련자.
나머지는 관리국 요원이었다.
“어쨌든, 늦기 전에 도착한 것 같아 다행이네요.”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메르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라틴젤에 의해 날려 보내진 아카데미 생도들을 찾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었다.
“교화 담당 교관으로서, 저 또한 악마들을 토벌하는 일에 앞장서겠어요.”
메르첼은 어리둥절하는 아카데미 생도들을 재집결시켰다.
그동안, 이수연도 관리국 요원들에게 서둘러 전투태세를 갖추게 했다.
“뭐 하는 거야? 비상사태니까 어서 플랜 C대로 움직이라고!”
곧이라도 총력전이 벌어질 기세였다.
설상가상으로 잠시 힘을 추스르고 있던 에테르 정령 군주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베르길리우스는 곤란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는군. 스반힐트 님께서 더 이상의 손실은 없게 하라고 하셨는데.”
완전히 침식된 마계 영지에서 전투를 벌였다면, 저들 따윈 혼자서도 우습게 쓸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지구.
최하위 차원이라곤 해도, 적지 않은 간섭을 받고 있어서 마음대로 날뛰기가 어려웠다.
던전 게이트에서 불러낼 수 있는 권속들의 수도 제한되어 있는 처지다.
“뭘 그렇게 초조해하는 겁니까, 베르길리우스? 마계 귀족이 언제부터 인간들을 상대로 벌벌 떨었었죠?”
라틴젤은 힐난하듯 곁눈질했다.
이후 그는 손가락으로 정부요원 한 명을 지목했다.
“잘 보시지요. 저들은 그저 인형에 불과합니다. 수천, 수만 년의 세월을 영위하는 우리와는 달리 금방 생명의 불길이 꺼지고 말죠.”
말을 마치자, 검붉은 광선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순식간에 심장을 관통당한 요원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크윽!”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눈빛으로만 고통을 호소하더니, 그 자리에서 털썩 하고 쓰러진다.
나름 상위 전력에 속하는 일원이었으므로 주위에서는 적지 않은 동요가 일었다.
“저번에 그 공격이야!”
“한 번에 즉사시키다니. 도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
압도적인 전력차에 마땅히 상대할 방법이 없어, 요원들은 난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위기가 점차 어두워지자, 보다 못한 전요한이 앞으로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신 나간 놈처럼 낄낄대다니. 정말로 미쳐버린 거냐?”
“미쳤다라. 당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저는 이곳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 생각이니까요.”
연회의 주최자라도 되는 양, 라틴젤이 환영한다며 양팔을 벌려 보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사방에서 마인들이 주섬주섬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위를 살피던 한유나가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줬다.
“이 지역에서 실종되었던 사람들이야. 라틴젤이 최후의 순간에 산 제물로 바친다고 했어.”
“산 제물? 무엇을 위해?”
의아해진 전요한이 물었다.
한유나는 라틴젤이 들고 있는 성유물을 가리켰다.
가시 면류관.
누군가를 희생하는 대가로 마계의 상위 존재를 소환할 수 있는, 「순교」의 권능이 깃들어 있다.
“저거. 질투의 죄악을 강림시키기 위한 도구야.”
“강림? 그러면 직접 개입하겠다는 말이야?”
“응, 지구에서의 반발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으니까 더는 시간을 끌지 않겠다고 했어.”
상당히 파격적인 결단이었다.
각각의 차원에 군림하는 권능자가 직접 전선에 나서겠다니.
그 자체로도 상당한 간섭을 받을뿐더러, 만에 하나라도 패배했을 경우의 위험 부담이 적지 않았다.
“…짐작했던 대로군요. 역시 질투의 죄악은 서열전을 유발할 생각입니다.”
에테르 정령 군주의 보호를 받던 시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스반힐트가 노리는 건 정면 승부.
이런 식으로 침공을 계속하면 자신의 피해도 적지 않으니, 지구의 여신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게끔 유도하는 중이었다.
“서열전이란 건, 중립 지대의 이공간에서 단판 승부의 형태로 진행된다고 들었어. 어떤 식으로 군세를 출전시킬지는 오로지 권능자들의 결정에 달려 있지.”
한유나는 라틴젤에게서 들었던 정보를 계속 전달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되는지 전요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서열전을 벌이는 편이 더 편할 수도 있겠는데? 괜히 다른 녀석들까지 끌어들여 봐야 발목만 잡을 뿐이야.”
“하지만 지구의 여신은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왜일 거라고 생각하나요?”
함께 이야기를 듣던 시르케가 반문했다.
전요한은 잠시 생각해본 후,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만약 서열전에서 이기고 나면, 더는 최하위 서열이 아니게 되니까?”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지구가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이유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을 정도로 나약했기에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죠.”
하지만 서열이 조금이라도 올라가고 나면, 곧바로 신흥 강자를 견제하려는 경쟁자들이 따라붙을 것이다.
한 번의 위기를 모면하려다가 끝없는 재앙을 불러들이는 꼴.
과연, 지구의 여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숨어 있기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당신이 대신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아무런 조건 없이 은총을 내려준 이유일 테죠.”
말을 마친 시르케는 전요한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어렴풋이 보일 듯 말 듯 한, 정체불명의 가호.
대미궁에서 함께 공략을 했던 때부터 줄곧 관심이 갔던 수수께끼였다.
“쉽게 말해서, 서열전을 치르지 않고 마계의 권능자를 물리치란 거네. 지구의 여신, 생각했던 것보다 가혹하게 굴리는걸?”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후, 전요한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허공에 떠있는 라틴젤을 향해 검 끝을 겨눠 보였다.
“뭔가 했더니, 별 시덥잖은 수작이었군! 각오해라, 빌어먹을 악마!”
자신만만한 도전장과 함께, 눈부신 후광이 전요한의 배후에 생겨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