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54화 (54/180)

제54화. 가시 면류관 (4)

“무슨 일이시죠? 지금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는데.”

한유나가 곤란하단 눈빛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에게 임무를 내린 건 마계 공작 라틴젤.

엄밀히 따지자면 베르길리우스보다 서열이 높은데, 이런 식으로 방해하는 건 무례했다.

“너 따위가 마무리를 짓는다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 보이느냐?”

어이가 없어진 베르길리우스는 눈을 부라렸다.

마계 후작인 자신도 치명상을 입고 후퇴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깟 녀석들이나 쓰러뜨리고 우쭐대다니.

허공을 향해 원망스럽게 쳐다보자, 배후에 있던 라틴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의외로군요. 설마 당신이 인간들에게 패배하기라도 한 건가요?”

“심상치 않은 놈이다. 그놈에겐 무언가 특별한 힘이….”

베르길리우스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이었다.

활성화된 던전 게이트로부터 공략조 일행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여어, 네 부하들도 내팽개치고 잘도 도망치던데?”

선두에 서 있던 전요한이 조롱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수치심에 아무 말 없이 몸을 부들부들 떠는 베르길리우스.

이를 지켜보던 라틴젤의 표정이 어둡게 변해 갔다.

“마계의 상위 귀족이 이런 식으로 모욕을 당하는 날이 오다니, 참으로 수치스럽군요.”

베르길리우스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더라도, 이러한 결과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남작, 백작에 이어서 변경백인 후작까지 참패하다니.

마치 그 다음은 자신이란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수치스러우면 마계로 되돌아가서 혀나 깨물고 죽지 그래? 여기는 너희들의 놀이터 따위가 아니다!”

전요한은 안색이 나빠진 라틴젤에게도 도발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상황이 악화될 것을 우려한 이수연이 미간을 짚었다.

‘아무리 그래도 분위기는 고려하는 게 좋을 텐데.’

주위에 채강윤과 율리안이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전투를 치렀다는 증거.

모르긴 몰라도, 저 마계공작은 상당한 전력의 소유자였다.

“하하, 실로 오랜만이군요. 당신처럼 어리석고 당돌한 자를 상대하는 것은.”

라틴젤이 곤란하다는 듯 한 손으로 안면을 가렸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왠지 모르게 조금 더 즐거워진 듯한 웃음이다.

수치스럽다며 표정을 굳혔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

가만히 지켜보던 시르케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족은 사고방식이 이상하군요. 본인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존재가 나타나서 기쁜 건가요?”

“오랜 세월을 무료하게 지내다 보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예상을 뛰어넘는 변수란 그토록 중요한 법이죠. 아아, 고작해야 3~400년밖에 살지 못하는 하프 엘프 따위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겠군요.”

라틴젤은 흥분했는지 유독 말이 많아졌다.

하지만 자신만의 유희를 즐길 준비는 아직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제대로 시작해 봅시다. 당신들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 마계공작의 이름으로 직접 시험해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라틴젤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것이 향한 쪽은 다름 아닌, 한유나.

라틴젤은 그녀에게 더욱 강한 권능을 불어넣었다.

“꺄아아아악!”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마기가 주입되자 한유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을 본 채강윤과 율리안이 쓰러진 채 손을 뻗었다.

“유, 유나…!”

“괜찮아? 정신 차려!”

두 사람은 지독한 꼴을 당했음에도 여전히 한유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해온 탓에 더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켜보고만 있을 거야? 비록 모르는 사이긴 하지만, 같은 아카데미 생도였는데.”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던 채린이 무언가 대책을 요청해왔다.

전요한은 대답 대신 시르케를 쳐다봤다.

역시 이런 일은 시르케가 맡아주는 편이 낫다.

“후우, 오랜만에 만났다고 제대로 부려먹는 건가요? 좋은 결말이 예상되진 않지만, 그래도 최선은 다해보죠.”

일행의 시선이 집중되자 시르케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품속의 흑진주를 꺼내 허공에 띄워 보였다.

“야옹.”

흑진주가 마음에 드는지 캣시가 교태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시르케의 어깨 위에서 줄곧 마력 증폭의 매개체가 되어주고 있었다.

“예전에 번성했다던 마법 생명체인가요? 신마 전쟁을 거치면서 멸종했다고 들었는데, 아직 개체가 남아 있었군요.”

배후로 물러나 있던 라틴젤이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녀석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캣시는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니야아아아옹!”

캣시가 내뿜는 푸른 마력의 불길에 한층 불이 붙었다.

“이번 술식은 복잡해서 조금 시간이 필요해요. 만약 문제가 생기면 나서서 해결해 주시죠.”

“아아, 걱정하지 마. 저런 여자애쯤은 나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으니까.”

전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이후 망설임 없이 양손으로 아르티나를 들어 올린다.

“되도록 유나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아줘!”

“네놈, 멋대로 그녀를 상처 입히면 가만두지 않겠다!”

재차 전투가 벌어질 것처럼 보이자 채강윤과 율리안이 이를 갈았다.

막아서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고통스러운 신음만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 몸도 추스르지 못하면 가만히 지켜보고나 있으라고!”

큰소리 친 전요한이 한유나에게 달려들었다.

한유나는 막대한 마기를 주입당한 부작용으로 고개를 떨군 상태.

그야말로 빈틈투성이인 것처럼 보였다.

“뭔가 이상한데.”

담배를 꺼내 물고 있던 이수연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꼈다.

그녀의 불안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하고 말았다.

티잉!

순간적으로 펼쳐진 암흑 결계가 서슬 퍼런 검격을 튕겨냈다.

그 결과, 뒤로 밀려난 전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벌써 시작한 건가.”

이만한 마기를 부여받으면, 평범한 인간은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하지만 특별한 자질이 있는 자라면, 잠재력이 발현되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콰득.

가녀린 신체의 일부가 기이하게 변형되기 시작했다.

머리 위엔 산양의 뿔이 돋아나고, 등 뒤에선 서큐버스처럼 검은 날개가 펼쳐진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올린 한유나의 표정은 악마 그 자체.

주위를 둘러보다 제 눈앞에 선 전요한을 본 그녀는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나, 너에게 반했어.”

반마(半魔)로 「각성」한 직후의 첫마디는 사랑 고백.

예상치 못한 발언에 전요한은 처음으로 움찔했다.

“지금까지 그런 말을 한 여자들치고 멀쩡한 녀석은 없었는데.”

대미궁의 하얀 마녀도 비슷한 이야기를 지껄였었다.

수천 년간 살면서 봐왔던 인간 사내 중에 가장 매력적이라나.

물론 그런 식으로 어필을 했다고 해서 평화롭게 문제가 해결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서 박수라도 쳐줄 셈이야?”

“흐흥, 아까 공격을 해왔을 때 느꼈어. 주위에 널브러진 녀석들하곤 격이 다른 존재란 걸.”

완전한 모습을 갖춘 한유나가 양팔을 벌려 보였다.

그러고는 마계에 잠들어 있던 성유물 하나를 소환했다.

치지지지직!

순간, 주위가 어둡게 변하며 자전이 내리쳤다.

곧이어 기묘한 형태의 뇌창이 차원 너머로부터 튀어나온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목숨을 앗아갈 것처럼 위압적인 외관.

전요한은 자신이 들고 있던 아르티나와 잠시 비교해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역시 5성급 무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선 나와 싸우기 힘든 모양이지?”

“어머, 무슨 섭섭한 소릴. 너의 사랑을 받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려는 것뿐인데.”

한유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후 한 손으로 뇌창을 움켜잡고는 전요한에게 날아들었다.

상대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 듯 거침없는 움직임.

한 차례의 일격을 막아낸 전요한은 뒤쪽의 일행에게 외쳤다.

“물러나! 지금 당장!”

단순히 물리적인 위협을 가해온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곧, 두 사람이 맞부딪친 지점을 기준으로 원형의 영역이 생성되었다.

찌릿찌릿!

여기저기서 스파크가 튀더니, 뇌전이 혈맥처럼 펼쳐지며 모두를 덮쳐 왔다.

“하아, 이런 식으로 또 방해를 받는군요.”

주문 술식을 진행하던 시르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잠시 멈춘 후, 미리 준비해뒀던 지면의 마법진에 지팡이를 내리꽂았다.

스슥–!

곧이어 모두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일시에 사라졌다.

충돌의 여파로 발생한 뇌전은 그들의 뒷자리를 허망하게 내리칠 뿐이었다.

* * *

“광역적인 범위의 공간 도약인가. 이거, 놀라움의 연속이군요.”

허공에서 전황을 관망하던 라틴젤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존의 계획에 상당한 차질이 생겼음에도 여유로운 모습.

곁에 있던 베르길리우스가 그를 다그쳤다.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이라면 녀석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데!”

베르길리우스는 잠시 몸을 피해 아까 입은 치명상을 회복하고 있었다.

에테르 속성의 공격이었기에 망정이지, 신성력에 기반한 것이었다면 여지없이 당해버렸을 터였다.

“너무 재촉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로서도 이렇게 된 판국에 생각 없이 지켜보기만 할 생각은 아니니까요.”

의도가 있음을 밝힌 라틴젤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얼마 전부터 그의 시선은 전요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반마(半魔)로 「각성」해버린 한유나와 사투를 벌이는 중인데, 조금도 뒤처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저 인간이 숨기고 있다는 특별함,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아둬야겠습니다.”

앨런 남작도, 드락실 백작도 그걸 간과하고 있다가 당해버렸다.

심지어 베르길리우스 후작까지.

이렇게 된 이상, 상대의 숨은 전력을 완전히 밝혀낼 생각이었다.

“크윽….”

반박하려던 베르길리우스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뭐라고 말해도 알아듣지 못할 터.

볼썽사납게 패배한 직후라 잠자코 있겠지만, 상황이 더 악화되면 최후의 수단을 쓸 것이다.

“정 걱정이 된다면, 보관 중인 성유물을 제게 넘기시지요. 당신의 몫까지 활약해 드리겠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직접 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베르길리우스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가시 면류관의 권능은 다름 아닌, 「순교」.

자신과 주위의 산 제물들을 희생하여 마계의 상위 존재를 소환하는 성유물이었다.

“물론, 제가 쓰지는 않지요.”

“그렇다면 누가?”

“지켜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충분한 자질을 지닌 이가 있다며 라틴젤은 말을 아꼈다.

그의 진녹색 눈동자에 분투 중인 한유나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넘쳐나는 전력을 자랑하는 중이었다.

“이 정도로 애정 표현을 해도 제대로 응해주지 않을 건가요? 자존심이 상하는 군요.”

“너는 초콜릿 선물 받았다 처음보는 상대랑 혼인신고서 제출하냐?”

무구를 맞대고 있던 전요한이 한유나를 밀어냈다.

여태껏 느껴 보지 못했던 반발력에 한유나는 묘한 미소를 띠었다.

“초콜릿 선물이라. 언젠가 받았던 것 같기도 하네요. 밸런타인데이였던가….”

예전의 기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각성」한 후 이야기를 나눈 탓인지, 과거의 파편이 흐릿하게나마 머릿속에 떠오른다.

별생각 없이 기억을 훑던 한유나는 순간 두통을 느꼈다.

“으윽….”

마음속에 있는 누군가가 환영 속의 거울처럼 눈앞에 비쳐졌다.

그 모습을 본 한유나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울고 있어…?”

문득 아까부터 수작질을 하던 마법사가 시선을 자극했다.

광역적인 공간 도약으로 일행을 배후로 완전히 피신시킨 장본인.

그녀는 허공에 떠오른 흑진주를 매개로 거의 술식을 완성한 상태였다.

자꾸만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던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이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때입니다. 망령처럼 떠돌지 말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되찾으세요!”

시르케가 고루한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