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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53화 (53/180)

제53화. 가시 면류관 (3)

타닥타닥!

전요한이 먼저 신속하게 거리를 좁혀갔다.

지면에 깔려 있는 어둑한 기운이 다리를 휘감았지만, 아무런 피해조차 주지 못했다.

「절대면역」.

불리한 간섭은 어떤 것이든 무효화하는 특별한 능력이 그에겐 있다.

“그런다고 내가 당황할 것 같으냐!”

군마에 타고 있던 베르길리우스가 장검을 뽑아 들었다.

감히 필멸자 따위가 드높은 마계의 예식을 무시하다니. 그는 전요한이 통성명을 받아주지 않는 것에 화가 난 상태였다.

카랑!

양쪽의 검격이 첨예하게 맞부딪쳤다.

단순히 충돌하는 것이 아니고, 주위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킨다.

“너무 무모한 거 아닌가요?”

미처 말리지 못한 채린이 가슴에 손을 모았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시르케는 고개를 저었다.

“도박수이긴 하지만,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그에겐 남다른 능력이 있으니까요.”

아마도 지금까진 보여준 적이 없을 것이다.

고작해야 검호의 수준에 막 들어선 상태니까.

하지만 시르케가 기억하는 전요한은 그 정도에 연연할 기량이 아니었다.

“기대했던 것보단 별것 아니구나. 드락실까지 쓰러뜨렸다고 하길래 「화신」급의 전력인 줄 알았더니.”

1합을 겨룬 베르길리우스가 코웃음을 쳤다.

잘 쳐줘봤자 「기인」.

자신의 소질을 일정한 경지까지 끌어올린 것에 불과했다.

“그러는 너도 마계의 후작치곤 별로 대단하지 않은걸? 스반힐트가 인재 보는 눈은 별론가 봐? 좋은 장비도 차고 있을 텐데 이것밖에 안 돼?”

장검을 맞댄 채 마주하고 있던 전요한이 씨익 웃었다.

그의 도발에 베르길리우스는 다시 발끈했다.

“가소로운 인간 같으니. 네가 내뱉는 말들이 죽음을 재촉하는 줄 모르느냐?”

질투의 죄악, 스반힐트에게 신임받는 귀족으로서 이런 모욕은 참기 어려웠다.

통성명은 제치고서라도 변경백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야 할 터.

전요한을 뒤로 밀쳐낸 후 번쩍 장검을 들어 올렸다.

“그동안 내가 지나온 전장의 시체를 쌓으면 이 지구를 뒤덮고도 남을 것이다!”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을 온통 죽음으로 물들이는 그에게 붙여진 칭호, 데스나이트.

진홍의 마검, 미스텔테인이 주인의 의지에 반응하며 울부짖었다.

무려 5성급의 성유물이었으나 전요한은 쫄지 않았다.

“지금이야, 시르케!”

후방에 믿음직한 마법사 동료 한 명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주문술식을 완성한 시르케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위력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제법 긴 마법 영창을 시작했다.

“어둠의 지배를 거부하는 자여, 영혼의 존귀함을 잃지 않는 자여. 황혼이 저물고 대지엔 절망과 악몽이 가득하니, 그대와 내가 함께 힘을 합쳐….”

저번에 외웠던 것들보다 중간중간에 들어가는 수식어구가 많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수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게 정말로 효과가 있는 건가….”

마법 영창은 지구에선 아직 흔하지 않은 방식이었다.

채린도 의문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말없이 지켜만 봤다.

얼마 전에 시르케가 시전했던 마법은 심연의 마물을 확실히 소멸시켰던 탓이다.

‘잘 들어뒀다가 나중에 나도 따라 해봐야지.’

아카데미 교습 시간에 시도하면 중2병이라고 소문이 날 테니,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시르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

채린이 고민하는 동안 마법 영창은 전부 외워졌다.

“…지상의 염원과 밤하늘의 이상을 더하여 고하노라, 혼돈을 몰고 온 심연의 악마는 영원히 그 모습을 감출지니!”

고루한 지팡이가 새롭게 펼쳐진 마법진에 내리쳐졌다.

이와 동시에, 허공에서 수많은 영체가 물결처럼 흘러나와 주위를 휘감았다.

“이, 이건 영계 소환술?”

상황을 지켜보던 소악마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에테르 정령군주를 불러내다니.

역시 평범한 하프엘프가 아니었다.

“크윽, 방해하지 마라! 여기가 같잖은 망자들이 넘볼 수 있는 땅 같으냐!”

뜻밖의 방해를 당한 베르길리우스가 손으로 머리를 가렸다.

아무리 그라도 불안정하게나마 현신한 에테르 정령 군주를 무시하는 건 어려웠다.

“어딜 한눈파는 거야? 네 상대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씨익 웃어 보인 전요한이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곤란해진 베르길리우스는 뒤늦게 자신의 권속들을 소환했다.

“빌어먹을 놈들을 해치워라! 이젠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것이다!”

후작으로서의 자존심 따윈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그가 진군 명령을 내리자 어두운 기운 속에서 나타난 언데드들이 파도처럼 숨 쉴 틈 없이 밀려 들어왔다.

“저들을 막아주세요. 그동안 우리가 마계 귀족과 승부를 내겠습니다.”

소환술을 유지하던 시르케가 양옆의 여인들에게 부탁했다.

강력한 정령 군주를 소환한 만큼 그녀는 정신을 집중해야 해서 잡졸들까지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어, 어떻게든 해볼게요.”

“숫자가 너무 많긴 하지만, 이거라도 해야 존재 의의가 있겠지.”

채린과 이수연은 각자의 원소 마법을 이용해 언데드들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빙벽을 세우고, 뇌전 트랩을 설치하는 과정도 무한히 반복되었다.

“크윽, 빌어먹을 마법사 놈들.”

의외로 방어를 잘 해내자 베르길리우스가 이를 갈았다.

마계본진이 아닌 탓에, 그가 동시에 소환할 수 있는 군세의 규모는 상당히 제한적인 상황이었다.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나도 예전보단 훨씬 약해진 거니까!”

아슬아슬하게 베르길리우스의 일격을 피해낸 전요한이 이건 정정당당한 승부라며 손가락질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약해진 거라고?”

“그래, 예전이었으면 벌써 승부가 나도 한참에 났을 거라고!”

대미궁에 군림하던 수많은 악마들을 토벌한 전요한이었다.

그가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자 베르길리우스는 천천히 눈을 가라앉혔다.

“그런가. 어쩐지 신체능력에 비해 기량이 기이할 정도로 탁월하다 했어.”

겉으로 드러나는 전력은 「기인」에 불과했지만, 실제로는 「초인」이었다.

이능력을 얻게 된 결과, 본래의 한계를 뛰어넘어 상위의 존재가 된 이들.

만약 「각성」이라도 하게 되는 날엔 큰일이었다.

이만한 자질을 지닌 자가 「화신」으로서의 가능성을 품게 되면, 그 위력은 감히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승할 터.

지구의 여신이 어떤 은총을 내린 상태인지도 모르겠으니, 지금이라도 전투의 종지부를 찍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일단 칭찬은 해주마, 인간 검사. 너는 내가 진심으로 결전에 응하게 만들었다.”

“흥, 별로 시덥지 않은데.”

“이제부터는 여유를 부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마계 귀족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친히 보여줄 것이니.”

말을 마친 베르길리우스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철갑으로 뒤덮힌 군마가 앞발을 들어 올리며 붉은 눈을 번뜩인다.

히힝!

의미심장한 마기가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후작, 베르길리우스의 모습이 점차 흉악하게 변해가자 전요한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앨런 테일러가 완전히 현현했을 당시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마계 귀족과의 일대일 전투는 아직 이르다.

더욱이 서열이 높은 편인 후작이나 공작은 피하는 편이 상책.

하지만 2번째 환생을 거친 만큼, 이번엔 무언가 달라져야 할 터였다.

‘이번 일격에 확실히 승부수를 내야겠어.’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종합 능력치의 열세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패배한다.

변수를 이끌어낼 만한 성유물도 딱히 없으니, 정면 돌파를 감행해야 했다.

마음속으로 결심한 전요한이 먼저 베르길리우스에게 달려들었다.

“하아아아아!”

얼마전에 마력을 소진해서 여력이 부족한 상황.

하지만 「각성」을 하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상대로인가.”

오로라처럼 빛나는 후광이 전요한에게서 나타나자, 베르길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독특한 색채의 영혼.

하지만 성장치가 미달인지 아직 제대로 된 형상이 구체화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내재한 잠재력이 완전히 개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가능성을 안은 채로 죽어라, 인간검사! 네놈이 살아서 돌아가는 일따윈 없을 것이다!”

베르길리우스가 자신의 우세를 주장하며 마검을 내리쳤다.

붉게 타오르는 마기가 온갖 색의 광채와 뒤얽히며 불협화음을 낸다.

“크읏!”

영혼을 뒤흔들 정도의 강공격에 전요한이 피를 토했다.

마계 후작이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내리친 일격이라, 즉사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곧이어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 전신에 퍼져 나갔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죽는 건, 너야!”

모든 건 에테르 영혼 군주가 허점을 파고들 기회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물결처럼 떠돌며 주위의 마기를 약화시키던 그는 전요한이 버티는 동안 회심을 일격을 가했다.

스걱!

칼바람처럼 지나간 곳에 깊은 상처가 생겨났다.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허리에서 마기가 새어 나오는 걸 내려다봤다.

“이 녀석이…!”

금방 재생할 수 있는 부상이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한가하게 제 몸이나 돌보고 있도록 눈앞의 전요한이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하아아아앗!”

일시적인 「각성」이라서 그런지, 두 눈에 붉은 불길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 한번 검격을 휘두르자, 베르길리우스는 어렵게 방어하려다 뒤로 밀려났다.

“뭐, 뭐냐? 방금 그건?”

알기 어려운 무언가가 전요한에게 기적 같은 힘을 부여하고 있었다.

빙결의 마법검, 아르티나가 형형색색의 불길을 일으키며 목젖을 노려온다.

“심판이다, 오만한 자식아!”

최후의 일격을 찔러넣으며 전요한이 외쳤다.

막강한 내구성을 자랑하는 흑철의 갑주가 대번에 꿰뚫리며 바람구멍을 남긴다.

“허억…!”

헛숨을 삼킨 베르길리우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설마 자신이 이런 식으로 당하게 될 줄은.

아니, 그보다도 놀라운 건 잠깐이나마 형체를 드러냈던 전요한의 잠재력이었다.

“그건 대체….”

베르길리우스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대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전요한을 뒤로 밀쳐냈다.

“이 자식! 아직도 포기하지 않는 거냐!”

마기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던 베르길리우스를 향해 전요한이 외쳤다.

그는 재차 마무리를 지으려 했지만, 언데드 몬스터들이 무더기로 몰려와서 앞을 가로막았다.

에테르 정령 군주도 제 형체를 갖추고 현현하지 못한 탓에, 베르길리우스가 도주하는 걸 막진 못했다.

“전황이 기울었으니 최후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밖엔 없다.”

허공에 차원의 문이 나타났다.

치명상을 입은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권속들을 뒤로한 채 황급히 그안으로 몸을 던졌다.

* * *

악마형의 던전 게이트가 있는 인근지역이었다.

채강윤과 율리안은 숨을 헐떡인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제 한계인가.”

“빌어먹을… 더는 일어설 수 없군.”

두 사람을 굴복시킨 건 다름 아닌, 한유나.

그녀는 마기에 잠식당한 채 마계 공작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왜 진심으로 덤벼들지 않는 거야? 이래서는 몸소 나타난 재미가 없잖아.”

한유나는 이해할 수 없단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전의 기억이 사라진 상태라, 채강윤과 율리안의 반응을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 원한다면 끝을 내줄게. 나도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니까.”

말을 마친 한유나가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그로부터 위협적인 마기가 응축되며 검은 구체가 생성되어 간다.

그때, 던전 게이트에서 베르길리우스가 튀어나와 그녀를 밀쳐냈다.

“비켜라, 아둔한 것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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