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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52화 (52/180)

제52화. 가시 면류관 (2)

심해의 마물, 베히모스.

녀석은 거대한 초식 공룡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치 코뿔소와 같은데, 등줄기를 따라 나 있는 골판이 인상적이었다.

“재해 등급의 마물이로군요. 녀석이 발산하는 독기에 당하지 않게 조심하세요.”

유심히 관찰하던 시르케가 주의를 줬다.

채린은 긴장한 표정으로 전요한을 쳐다봤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주위에 구축해둔 방벽도 곧 무의미해질 텐데.”

방금 전에 보여준 파괴력이라면 시간문제였다.

이수연도 동의하는지 결단을 내릴 것을 요청해왔다.

“이대로 있으면 당하기만 할 거야. 그나마 여유가 있을 때 뭔가 시도해야 해.”

베히모스는 걸리적거리는 빙벽을 아직 다 부수지 못한 상태였다.

녀석을 상대하기에 앞서, 전요한은 상태창을 확인해봤다.

[전요한]

기본 성급 : ☆☆☆

보유 특성 : 환생자 (3회차)

종합 능력치 : 90 (+125)

특화 소질 : 성장가속, 마력재생, 절대면역, 미래시

보너스 스탯까지 합치면, 이제 종합 능력치는 215에 달한다.

국내 서열 1위라고 하던 채강윤보다 10스탯 정도가 높은 셈.

하지만 상위종인 베히모스와 일대일로 맞서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최소한 250은 넘어야 하는데.’

괜히 재해 등급의 마물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출현하는 것만으로 주위에 기현상을 일으키고, 막대한 피해가 생겨난다.

일반인은 다가서기만 해도 의식을 잃고 쓰러질 정도였다.

‘광역기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해야겠어.’

일전에 「개안」을 한 상태인 만큼 일반적인 공격에 당할 우려는 적었다.

반응 속도나 움직임은 검호의 수준으로 충분히 빠르지만, 범위 공격이 문제였다.

범위 공격은 미리 예상해서 벗어나지 않으면 여지없이 휩쓸리고 만다.

“고민할 시간 없습니다.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일단 들이받고 보세요, 비스트.”

시르케가 어서 전열을 제대로 맡아달라고 재촉했다.

비스트.

마치 한 마리의 야수처럼 전장에서 날뛴다고 하여 대미궁에서 붙여진 칭호였다.

“생각 없이 들이받은 건 아니었는데. 전부 생각이 있어서 했던 행동들이었다고.”

전요한은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빙벽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베히모스에게로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너를 쓰러뜨려야 내 평판이 나아질 것 같다!”

이렇게 된 이상, 속전속결이 정답이었다.

성장치가 아직 모자란 시점에서 승률을 높일 수 있는 전략은 단지 그뿐.

심연의 마물, 베히모스에게도 약점은 있다.

“설마 정말로 혼자서 덤벼들다니! 당신,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군요!”

허공에서 구경 중이던 소악마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낱 인간 따위가 심연의 두려움에 맞선다니, 그저 어이없는 일이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검푸른 독기가 스며들어 내장을 전부 녹여버릴 터.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전요한이 놈의 앞발에 아르티나를 내리꽂기 전까진.

“어엇?!”

검격이 제대로 먹히자, 소악마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고통스럽게 죽기는커녕, 맹렬한 기세로 선공을 해보이는 모습이다.

“역시 성장치가 낮아졌어도 영력은 제대로 다룰 줄 아는군요.”

시르케가 만족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전요한은 검존의 경지까지 올랐던 검사.

마력 SS등급의 대마법사였던 자신과 비등한 존재였다.

아무리 종합 능력치가 낮아졌다고 해도, 이만한 활약 정도는 해줘야 정상이다.

“재해 등급의 마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수준의 영력이라니! 그렇다면 최소 에테르 S등급은 되는 셈인가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사실에 소악마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에테르 S등급이면, 검호라고 불리는 자들만큼이나 강하단 이야기다.

물론, 아직은 모자란 점이 있겠지만 그 점은 다른 동료들이 메꿔줄 수 있었다.

“나도 도와줄게!”

“다른 녀석들은 내게 맡겨!”

채린과 이수연이 뒤이어 전투에 가담했다.

그녀들이 자신의 속성으로 마법을 날리는 동안, 시르케는 새로운 주문술식을 외웠다.

‘솔직히 이게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성장치가 몇십 년 전의 시점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전요한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중급 마법 중엔 최상의 파괴력을 지닌 것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부디 초승달 성좌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 하길.’

모든 마법사들의 인도자, 여신 셀레스티나에게 기도했다.

이 어두운 밤의 시련을 극복할 기적을 내려달라고.

얼마 후, 주위의 마력 입자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자 소악마는 눈을 치떴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요! 안 그래도 검호 급의 상대가 날뛰어서 골치 아픈데!”

“굳이 답변해야 할 이유 따윈 없습니다. 마법사는 복잡하게 설명하는 대신, 직접 보여주는 편이죠.”

슬며시 눈을 뜨자, 베히모스와 사투를 벌이는 전요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나 그러했듯, 그는 자신의 동료들을 지켜내기 위해 가장 큰 위험을 무릅쓰고 있었다.

고독한 투쟁을 떠맡기지 않기 위해, 시르케는 자신에게 현재 허락된 최강의 마법을 발동하기로 했다.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캣시가 푸른빛을 내뿜으며 그녀를 조력해줬다.

“공백의 균형을 유지하는 자여, 빛과 어둠의 틈에서 영혼의 그릇을 채우는 자여. 밤을 이끄는 여신의 이름으로 명하니, 탐욕을 드러내는 추악한 마물의 앞에 그 맹위를 드러내라!”

고루한 지팡이가 청백색의 마법진 아래에 내리쳐졌다.

이와 동시에, 모여든 마력 입자는 마치 울부짖는 듯한 에테르 기류로 화하기 시작했다.

“그, 그건 고난도의 영계 마법?!”

노심초사하던 소악마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한 반응을 보였다.

「진혼의 나선」.

시르케가 시전한 마법은, 심연의 마물마저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위력을 지녔다.

고오오오오!

에테르 기류는 「영혼의 방벽」이 있는 곳을 제외한 전부를 휩쓸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베히모스의 시야를 붙잡고 있던 전요한이 뒤를 돌아봤다.

시간이 없다며 시르케가 다급히 손을 뻗고 있었다.

“어서 돌아오세요! 이건 현재의 당신으로선 극복할 수 없는 위력이에요!”

“응, 알았어!”

베히모스의 머리맡에 올라와 있던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충분한 피해를 주었는지, 녀석은 모습이 엉망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크르르르!”

그동안 당했던 게 화가 났는지 베히모스가 전요한이 떠나려는 걸 놔두지 않았다.

우선은 기다란 꼬리를 휘둘러 다른 일행이 있는 곳을 강타한다.

콰광 하는 굉음과 함께 무형의 결계가 한 차례 흔들렸다.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다른 동료들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거냐?”

인질 전략을 알아차린 전요한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아르티나에 거의 모든 마력을 집중시켰다.

콰드드드득!

베히모스가 다시 한번 강공격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주위의 공기가 일시에 냉각되면서 기다란 꼬리가 끝자락에서부터 얼어붙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르르!”

“어디 한번 몸부림 쳐봐, 그럼 이만!”

씨익 웃어 보인 전요한은 반쯤 굳어버린 베히모스의 양쪽 뿔을 놔줬다.

그러곤 높이 도약하여 단숨에 일행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괜찮겠습니까? 마나를 그렇게 많이 써도.”

“뭐, 별문제 없어. 알고 있잖아? 재생력이 빠른 편인 거.”

「마력재생」은 전요한이 지닌 보유특성 중 하나였다.

얼핏 보기엔 흔한 소질 같지만, 2차례의 환생을 거치면서 효율이 말도 안 되게 좋아졌다.

‘한두 시간 정도면 완전히 회복되겠군.’

실질적인 전투를 벌여야 한다면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다시금 마력이 채워지는 걸 느낀 전요한은 전방을 바라봤다.

나선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베히모스가 이쪽을 향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마족의 수하들과 함께 사라져라. 멍청한 놈아.”

제아무리 심연의 마물이라 해도 이만한 에테르 마법은 버텨내지 못한다.

녀석이 필사적으로 내뿜는 독기도 「영혼의 방벽」 내부로는 결코 닿지 않았다.

베히모스의 모습이 갈기갈기 찢기며 점차 사라져 가자, 소악마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처음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설마 인간 넷이서 주인님의 권속들을 전부 물리치라고는.

이윽고 주위가 잠잠해졌지만 녀석은 함부로 눈을 뜨지 못했다.

“이봐, 네놈의 주인은 대체 어디 있는 거냐?”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전요한이 소악마를 붙잡았다.

소악마는 몸을 벌벌 떨기만 할 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머, 멍청한 녀석! 네놈들이 문제가 아니야! 네놈들이 여길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바람에….”

녀석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다름 아닌, 그의 주인이었다.

베르길리우스 후작.

강대한 무력을 지닌 데스나이트는 마계에서도 상당히 악명이 높았다.

“점점 다가오네요. 배후에서 전장을 가만히 관망하고만 있었던 존재가.”

정신을 집중하던 시르케가 경계하며 눈을 떴다.

그녀의 말을 시작으로 멀리서부터 지면에 어둑한 기운이 깔리기 시작했다.

「망자의 성역」.

데스나이트가 지닌 권능이 주위를 점차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 * *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군.”

노골적인 참전 의지에 전요한이 씨익 웃었다.

하여간, 마족이란 존재는 처음부터 전력으로 달려들려고 하지 않는다.

위계가 높아서 품위에 맞지 않다느니, 인간은 바로 죽이지 않고 최대한 갖고 노는 편이 재밌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네놈이 나서도 달라지는 건 없다.”

후작 정도가 되는 마족이면 어느 정도의 전력인지 잘 알았다.

대미궁에서도 여러 번 상대해본 경험이 있었지.

지랄 맞은 능력 탓에 고전한 적이 몇 차례 있지만, 패배하거나 전투 도중에 내뺀 적은 없었다.

“여, 역시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거겠지?”

주위를 둘러보던 채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혼의 방벽」 내부를 제외하곤, 어두운 기운이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다.

“물론입니다. 함부로 발을 내딛는 순간, 끔찍한 저주에 걸려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게 될 거예요.”

시르케가 엄두도 내지 말라며 미리 경고를 해줬다.

그 말에 이수연이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네. 대체 얼마나 강한 존재인 거야, 마계의 후작이란 건.”

나름 관리국의 정예 요원인데, 그동안 전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그녀였다.

권속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했던 뇌전 트랩은 전요한과 시르키의 활약에 비하면 장난 수준.

비슷한 무력함을 느꼈는지 채린도 고개를 떨궜다.

“이래서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어. 한심하게 동료의 발목이나 붙잡으려고 들어온 게 아닌데.”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개척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로지 동료의 도움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풀 죽은 모습을 하고 있자 시르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에겐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 분명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순간이 올 겁니다.”

위로해주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잠깐이나마 지켜본 결과, 저들이 지닌 잠재력은 결코 간과하기 어렵다.

괜히 전요한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여기로 데려온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아. 충분히 성장할 계기가 될 테니까 너무 무리하려고만 하지 말라고.”

씨익 웃어 보인 전요한이 다시 아르티나를 들어올렸다.

짙은 안개 속에서 위엄 있어 보이는 기사의 실루엣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엔 이렇게 만나고 마는군, 전요한. 너의 지난 행적은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지척 앞에서 군마를 멈춘 베르길리우스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는 상대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통성명을 시작하려 했다.

“내 이름은 베르길리우스 아르게티누스 본 카르네아….”

“됐고, 네놈도 스반힐트가 보낸 녀석 맞지?”

피곤한 표정을 짓던 전요한이 도중에 말을 끊었다.

졸지에 무례를 당한 베르길리우스는 발끈했는지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본격적인 결전에 앞서 통성명을 하는 건 오래된 관습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리도 무례할 줄이야….”

“이런 말 들어봤냐, 선빵필승이라고.”

말을 마친 전요한이 곧장 베르길리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녀석의 자화자찬을 끝까지 들어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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