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가시 면류관 (1)
“흥, 결국은 주인님께서 몸소 나서시는군요! 단단히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예요!”
기세등등해진 소악마가 허공에서 코웃음을 쳤다.
짙은 안개 너머로부터 심상치 않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달그락. 달그락.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데, 지면이 울릴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지는 상황이다.
“어쩌지? 본격적으로 공격해 오려는 것 같아.”
채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우려감을 드러냈다.
그녀가 빙벽을 세워서 대비하는 동안 이수연은 자신만의 함정을 설치했다.
“뇌전으로 만든 트랩인가요? 괜찮은 아이디어입니다.”
잠시 지켜보던 시르케가 칭찬을 해줬다.
전자기장으로 이루어진 원형의 돌기.
만약 밟거나 하면 그대로 감전되는 식의 함정이었다.
“이 정도는 해줘야 관리국 요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지. 위험한 임무가 한둘이 아니잖아?”
“그래도 계속하시는 걸 보니 돈은 많이 받나 봐요?”
“솔직히 목숨값에 비하면 박봉이긴 한데, 업계 기준으론 높은 편이지.”
정확한 연봉은 규정상 가르쳐줄 수 없다고 했다.
이수연이 말을 아끼자 채린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관리국 3과는 평균 연봉이 3억이래. 야근 수당이라든가 경조사비 같은 거 다 합쳐서.”
3과는 내부적으로도 중상위 실력자들이 많은 곳이라 대우가 좋다고 한다.
친오빠에게서 직접 들은 정보.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3억 정도면 10년 하고 은퇴할 만하네. 국가로부터 퇴직연금도 나올 테니까.”
괜히 아카데미 생도들이 관리국 요원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생명이 위험한 임무를 자주 맡긴 해도, 나름 괜찮은 월급에 복리후생까지 좋다.
근속 3년차부터는 수도권의 전용 아파트도 장기 임대해 준다나.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나 참, 전요한 당신도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건 여전하군요.”
뜬금없이 나온 부동산 이야기에 시르케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부터 그녀는 모두가 서 있는 지면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수호 마법이야?”
“네, 어지간한 녀석들은 안쪽으로 발을 들일 수 없어요.”
제5원소, 에테르를 근간으로 하는 「영혼의 방벽」이었다.
적들에게 포위당하거나 했을 때, 시르케가 자주 사용하는 방어 수단.
원소 마법이나 다루던 채린과 이수연은 신기하단 반응을 보였다.
“이건 대체 원리가…?”
“제대로 따라 할 수만 있다면, 관리국의 전력에 많은 도움이 되겠어.”
훈련 교관인 율리안도 에테르를 다룰 수 있지만, 이만큼의 응용술식은 해내지 못한다.
“제가 있었던 세계에서도 흔치 않은 마법이었죠. 다만, 마력이 예전 같지 않은 관계로 오래 유지하진 못할 겁니다.”
시르케는 되도록 전투를 일찍 마칠 것을 권장했다.
수호 마법이 해제되고 나면, 그때는 진영도 유지하지 못하고 난전을 벌이게 될 터였다.
“그거야 내게 맡겨두면 될 일이야. 적장의 목은 내가 벤다.”
자신감을 드러내며 전요한이 앞으로 나섰다.
이전과는 달리 초라한 행색에 시르케의 눈빛이 살짝 매서워졌다.
“당신도 대미궁에 있을 때보단 약해진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상대는 분명 후작의 위계에 해당하는 마족이라고 했습니다.”
“아아, 물론 생각해둔 상대법은 있어. 내겐 특별한 재능이 있잖아?”
“불리한 간섭은 무엇이든 무효화시키는 「절대면역」 말이군요. 확실히, 그거라면 승부수가 될 수 있겠습니다.”
시르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요한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빈틈을 만들어냈던 방법.
그녀가 개인적으로 흥미를 지니고 있는 능력이기도 했다.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예전의 나하고는 또 다르거든.”
전요한은 씨익 웃어 보였다.
회갈색의 안개를 배경으로 검은 실루엣이 전방에 나타나 있었다.
히힝!
돌격해오는 언데드 군마가 거친 울음을 냈다.
그 기세가 만만치 않았으나, 여유롭게 휘두른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철푸덕.
낙마한 언데드 기병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조금 전의 검격으로 군마와 함께 일도양단이 되어버린 탓이었다.
“대, 대단해….”
후열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채린이 입을 벌렸다.
전요한의 활약은 줄곧 봐왔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유독 더 체감이 되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다들 최대한의 화력을 쏟아낼 수 있도록 준비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정신을 집중한 시르케가 마법사 동료들에게 경고를 했다.
얼마 후, 여기저기서 언데드 기병들이 나타나서 아군 진영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빠각!
빙벽에 부딪친 언데드 군마의 머리뼈에 금이 갔다.
전속력으로 돌진해온 터라, 녀석들은 상당한 타격을 입고 잠시 주춤했다.
“여러 겹으로 둘러싼 바리게이드가 효과는 있군요.”
나름대로 잘 버티는 빙벽을 보며 시르케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채린이 마력 역장을 펼쳐 주위에 혹한을 일으킨 덕분에, 빙벽은 한 단계 더 높은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도 놀고 있을 수만은 없지. 어디 보자. 슬슬 함정에 걸려들려고 하네.”
이제 자신의 차례라며 이수연이 뇌전 트랩을 가리켰다.
겹겹이 쌓인 빙벽으로 가로막힌 탓에, 언데드 기병은 좁은 틈새를 최대한 비집고 들어오려 했다.
뇌전 트랩이 설치된 위치는 바로 그런 길목.
곧이어 번쩍하는 빛의 줄기가 연쇄 작용처럼 일어났다.
“고약해… 언데드의 육체가 타는 냄새….”
비위가 약한 채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코끝을 막았다.
이수연은 미안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돌아봤다.
“거기까진 생각 못 했네.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었어.”
그녀의 전공 분야는 신입이었을 때부터 번개 원소였다.
일반적으로 현세의 이능력자는 단 하나의 원소밖에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이것을 친화성이라고 하는데, 시르케는 딱히 그런 제약에 구애받지 않았다.
“여러분은 본래 마나가 없는 세계에 살아왔을 테니, 마법사로서의 능력이 한계점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일찍이 전요한에게서 지구와 관련한 지식은 대충 들은 바가 있었다.
온갖 생명체로 가득하지만, 마력을 활용하지 못해서 끝내 과학 문명이 들어선 세계.
최하위 차원의 지구는 마법사에게 있어선 은총을 잃은 불모지였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직접 경험해보고 싶어.’
마나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과연 어떤 형태일까.
어렸을 때 그녀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주제들 중 하나였다.
‘검은 유황을 동력원으로 달리는 철갑 마차와 부유석 없이 허공을 나는 비공정… 그 설계도를 반드시 구해낼 거야.’
신문물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시르케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장애물을 활용해서 개체 수는 많이 줄였네. 아직 먼 것 같지만 말이야.”
전요한이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언데드 병사를 베어 넘겼다.
그로부터 얼마 후, 굉음과 함께 주위의 빙벽이 하나둘씩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번엔 뭐죠?”
“공성장비라도 가져왔나?”
채린과 이수연이 서둘러 대책을 마련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수를 다 써버린 그녀들로선 현재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죠. 어차피 빙벽을 한꺼번에 전부 무너뜨리진 못할 테니까요.”
전요한은 인내심 있게 기다리기로 했다.
시르케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상대가 우리 전략에 말려든 거니까 굳이 나서서 싸워줄 필요는 없지요.”
설령 빙벽이 많이 무너지더라도 적당한 위치에 다시 세우면 그만이었다.
중요한 과제는 적장이 무리해서 치고 들어올 때의 빈틈을 노리는 것.
잡다한 권속들을 일일이 쓰러뜨리며 무식하게 나아가면 이쪽이 먼저 지치기 쉬웠다.
“이럴 때는 생각보다 침착한데? 너, 전투를 벌일 때면 무조건 돌격 앞으로 아니었어?”
침착한 전략에 이수연이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전요한은 별것 아니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지금은 시르케가 있으니까요. 너무 혼자서만 날뛰면 피곤하지 않겠어요?”
“그 말은 제게 전투의 어려운 부분을 떠넘기겠단 의미군요. 뭐, 예상은 했지만 당신답네요.”
새로운 술식을 외우려던 시르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한쪽 방향으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저쪽에서 먼저 밀고 들어올 겁니다. 다치고 싶지 않다면 미리 대비해 두세요.”
재차 주위 공간을 울리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가로막힌 빙벽에 균열이 점차 심해지더니, 더는 버티지 못하고 큼지막한 파편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심해의 마물, 「베히모스」.
녀석의 거대한 체격을 본 소악마가 킬킬거리며 웃어댔다.
“정말로 끝장났네요! 주인님이 악명 높은 괴마를 소환했어요!”
「베히모스」는 여태까지 알려진 몬스터와는 격부터가 달랐다.
녀석이 사납게 울부짖자, 전요한 일행은 일제히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 * *
“이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으신가요, 국장님?”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던 정서희가 물었다.
그녀의 옆쪽엔 실시간으로 진행 중인 긴급 뉴스가 티브이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일찍이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이 기현상은 현재 지역구의 절반 이상을 잠식한 상태입니다.
현장에서 인터뷰 중인 전문가가 검은 결계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켜 보였다.
반구체 형태의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진입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었다.
“정말 어떤 방법으로도 와해하는 게 불가능한가요?”
전문가를 인터뷰 중인 기자가 물었다.
전문가는 대답 대신, 허공에서 폭격을 시도 중인 전투 헬리콥터를 비춰 보였다.
콰과과광–!
가공할 화력이었지만, 검은 구체는 흠집 하나 없이 건재했다.
“역시나 내부 공간으로의 간섭은 재래식 무기만으론 힘든가 보군.”
턱에 손을 괸 채 지켜보던 유명학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표정.
정서희는 다시 한번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국장님, 저 안엔 악마형 던전 게이트가 있습니다. 아카데미 생도들이 실패할 가능성을 생각해서라도 다른 진입 방법을 시도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관리국은 이 같은 위험에 대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럼에도 유명학은 끝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가능한 방법은 전부 연구해봤네. 적지 않은 수의 요원들이 현장에 있으니 지금으로선 지켜보는 것이 좋겠어.”
“하지만 이 기회를 노리고 악마들이 날뛴다면….”
“처음부터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각오하고 있었네. 이미 알고 있었던 일 아닌가?”
줄곧 티브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유명학이 슬쩍 눈길을 줬다.
질책하는 듯한 분위기에 정서희는 흠칫하며 고개를 떨궜다.
“국장님이 요한 씨를 밀어붙이고 있단 건 눈치채고 있습니다. 단지,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
“물론 그럴 테지. 하지만 조금 더 기다리게. 자네가 알고 있는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까.”
“…네?”
이해하지 못할 말에 정서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
유명학은 어두웠던 기색을 거두고 그녀를 향해 비로소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돌아가서 아카데미의 내부 사정을 지켜보게. 그것이 자네의 현재 임무일세.”
“…알겠습니다.”
이후의 대화가 무의미하다 생각한 정서희는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그녀가 사라지자, 유명학의 시선은 현장 뉴스가 진행 중인 티브이 쪽으로 다시 향했다.
“드디어 「첫 번째 시련」에 도달한 모양이네, 요한 군.”
무사히 시련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기록되어 있는 건 오로지 시련의 내용뿐.
자신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자가 맞는지는 더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게.”
한편으로는 죄악에 타락할까 봐 경계해 왔지만, 내심 전요한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었다.
의문의 고서를 펼쳐서 읽던 유명학은 묘한 웃음을 띠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