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과거의 인연 (5)
“신기하네. 무슨 내비게이션도 아니고.”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흑진주를 보며 이수연이 말했다.
“일종의 회귀 본능을 이용한 것입니다. 환요석은 마족의 유지가 담긴 잔재인 만큼 불온한 사념에 쉽게 이끌리죠.”
시르케는 전직 대마법사답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가 죽기 전에 도달했던 마력 등급은 SS.
마법 문명에 기반한 이세계의 기준으로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달리 사용할 방법은 없나요? 무언가 전투적인 용도로요.”
마법과 관련한 분야엔 박학다식해서 그런지 채린도 거의 스승처럼 모시는 분위기다.
그녀가 질문하자 시르케는 입가에 검지를 올렸다.
“음… 흑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실전에선 그다지 무쓸모일지도요. 하지만 이걸로 저주 따위에 걸린 사람들을 구할 수는 있어요.”
“그건 어떤 원리인가요?”
“뭐, 간단히 말해서 저주를 건 술식이 역방향으로 작동하게 하는 거죠.”
그 말은, 게이트 밖에 있는 한유나도 속박으로부터 풀어줄 수 있단 의미였다.
물론, 그렇게 되면 그녀는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잘 버텨줬으면 좋겠는데.’
흑진주의 뒤를 따르며, 전요한은 내버려두고 온 이들을 걱정했다.
각자의 실력은 나쁘지 않지만, 개인적인 감정이 겹쳐지면 아무래도 판단력이 흐려진다.
쉽게 끊어질 수 없는 과거의 인연.
자신이 시르케와 재회했듯, 그들도 죽었다 생각한 한유나와 마주쳤다.
맞서 싸워야 할 적이 되었다는 점에서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거의 도착한 것 같아요. 무언가 형용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느껴지네요.”
앞장서던 시르케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마법 주문을 영창하며 허공에 지팡이를 휘둘렀다.
“오감을 현혹하고 이지를 어지럽히는 기만자여, 여기 초승달 성좌의 신도가 고하노니 눈먼 모두의 앞에 진실을 드러내라!”
시르케는 쓸데없이 분위기를 잡을 때엔 마법 영창이랍시고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곤 했다.
자신의 스승에게서 배운 영향 탓이라는데, 전요한은 썩 내키지가 않았다.
“내 앞에서 3구절 이상의 영창을 하다 허무하게 죽은 마법사가 많았지.”
“전부 풋내기들이었죠. 때로는 마법의 위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런 어구가 필요해요.”
재회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둘은 벌써부터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소모적인 설전을 벌이고 있을 때, 무형의 마력 파동이 모두를 밀치며 발산되었다.
“이건 마치 던전 게이트가 등장할 때의 현상 같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던 이수연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곁에 있었던 채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위력이 약한 편이지만, 느낌은 비슷했어요.”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이건 차원 통로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위장된 공간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점차 회갈색으로 물들어가는 전방의 광경.
황량한 지대에서는 어떤 생명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가 놈의 성역인 모양이군. 기분 나쁜 마기가 사방에 진동하고 있어.”
온몸에 달라붙는 불쾌한 촉감.
감각이 곤두서 있던 전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하,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네요.”
마력 실에 묶여 있는 소악마가 간단히 구속을 풀어냈다.
악마의 둥지에 진입하자 이전보다 영향력이 훨씬 강해진 것이다.
“뭐, 여기까지 왔으니 넌 이제 필요 없어.”
“이런, 섭섭한 말씀을. 저는 당신들이 베르길리우스 님에게 닿을 때까지 떠나지 않을 겁니다. 아, 물론 그전에 전멸하고 말 테지만요.”
자유로운 상태가 된 소악마는 조금 말이 많아졌다.
이윽고 안개가 자욱해지기 시작하더니,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치잇. 또 수작을 부리는군.”
귀찮아질 것을 예감했던 전요한은 이를 악물었다.
얼마 후, 주위 풍경이 어두운 미궁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인물들을 생성해냈다.
* * *
“이번 층계만 돌파하면 미궁 도시로 갈 수 있다지?”
“응, 거긴 어떤 이종족끼리도 분쟁이 금지된 중립 지역이래.”
앞서 걷고 있던 두 수인족 사내가 떠들어댔다.
전요한은 바로 곁에서 따라 걷고 있는 엘프 소녀를 내려다봤다.
“…엘리아.”
저도 모르게 그만 이름을 내뱉고 말았다.
엘리아가 고개를 돌리며 해맑게 웃어보였다.
“응? 나 불렀어?”
이런 지옥 속에서도 너는 순수함을 지키고 있었구나.
주먹이 불끈 쥐어졌지만, 뒤따라서 힘겹게 웃었다.
그리고는 마치 확인이라도 해보려는 것처럼 질문을 던졌다.
“올해가 몇 살이라고 했지?”
“열네 살. 성인이 되려면 아직 멀었어.”
대미궁에서는 매일 정산되는 보상으로 시간의 흐름을 측정한다.
7번을 받으면 1주일.
30번을 받으면 1개월.
365번을 받으면 1년.
지금은 1년 하고도 4개월 차가 되는 시기였다.
대미궁을 공략하는 입장에서는 극초반에 해당하는 구간.
어찌어찌 적응은 했어도, 미지의 위협에 대해선 아직 잘 몰랐던 상태다.
“다음 생일에 소원이 뭐라고 했더라?”
“중립 도시에서 토끼 인형을 사고 싶어. 혼자 잠잘 때 무섭지 않게.”
엘리아는 눈치를 보면서도 자신의 바람을 또박또박 말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전열의 사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 멈춰.”
단답형의 명령.
수인족 사내들은 어리둥절하며 이쪽으로 돌아섰다.
“갑자기 왜?”
“무슨 일이야, 리더?”
곧 다가올 비극을 예감하지 못하는 듯, 여전히 표정이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쪽으로 가봤자 중립 도시는 나오지 않아. 그러니까 그만둬.”
“무슨 말이야? 얼마 전에 발견된 지도 조각은 그럼 뭔데?”
“분명히 X자 표기가 되어 있었어. 이번 층계도 거의 끝자락이라 확실하다고.”
수인족 사내들이 그럴 리 없다며 따지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안 좋아지자 엘리아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
차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리듯 진실을 털어놓았다.
“너희를 죽게 만든 건 내 잘못이었다.”
보물 상자에서 발견된 지도 조각이 함정일 가능성까지 생각해야 했다.
대미궁의 악마들은 그 정도로 치밀하게 생존자를 엿 먹이려 한다는 걸 눈치채야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돌아오는 건 공허한 메아리뿐.
처음부터 이들에게 전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 너희를 결코 잊지 않을게.”
곁에 있던 엘리아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어오더니 누군가 속삭였다.
“위선자.”
다름 아닌, 이 개같은 기억을 재현해낸 악마.
녀석이 도발해오자 전요한은 살며시 눈을 치떴다.
“순순히 나와라. 고통스럽게 찢겨 죽고 싶지 않으면.”
여기는 과거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심상 세계였다.
내면의 트라우마를 이끌어내서 정신적으로 무너지게 유도하려는 계략.
하지만 이미 한두 번 겪는 악몽이 아니었다.
촤악‒!
전열에 있던 수인족 사내들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졌다.
선혈이 낭자하는 현장을 본 엘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그녀는 공포에 질린 채 전요한의 다리를 붙잡고 벌벌 떨었다.
무엇이라도 해달라는 간곡한 몸짓.
그럼에도 전요한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저 여자애를 내버려 두는 이유가 뭐지? 그들을 구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음험한 목소리가 물었다.
의아해하는 그 반응에 전요한이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과거는 바꾸지 못해. 그래서 벌을 받고 있는 중이다.”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 죄.
그 나태함을 절실히 깨닫고 고통받는 것 이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너는 결국엔 아무도 지키지 못한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단 오만함에 사로잡혀 모두를 위험으로 이끌고 말지.”
“그럴지도.”
“네가 향하는 미래에 가치 따윈 없다. 위선적인 욕망을 위해 희생시킨 동료들의 시체만이 늘어갈 뿐이지.”
“큭.”
짧게 웃음을 터트린 전요한의 입술이 한차례 비틀렸다.
잠시 후, 어디선가 날아온 비수가 엘리아의 심장에 처박힌다.
“오…빠….”
엘리아는 마지막까지 전요한을 부르다 숨을 거뒀다.
어둠속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물었다.
“네가 우리에게 대적하지 않았다면, 여자애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
전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용하게 눈을 감은 엘리아의 사체를 안아 들었다.
“네가 원한다면, 여자애는 살아 돌아올 수 있다. 그 선택지를 거부할 것인가?”
“살아 돌아온다라….”
웃기는 말이었다.
이미 앨런 테일러의 최후를 지켜보았고, 그의 딸이 왜 고통받았는지 전해 들었다.
악마가 속삭이는 방법으로는 엘리아를 구원할 수 없었다. 결코.
“내가 이 아이에게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은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마지막 순간에 엘리아가 빌었던 유일한 소망이니까.
그래서 전요한은 그녀의 몫까지 앞으로 나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그것은 위선이다. 순전히 남겨진 자들을 위한, 이미 떠나버린 이들의 마음 따윈 외면하는 자기합리화일 뿐이지.”
음험한 목소리는 궤변에 불과하다며 힐난했다.
자신의 승리를 자신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전요한은 그로부터 조급함을 읽었다.
“엘리아를 위해서라면, 나는 위선자라도 될 수 있어. 왜냐하면 그때 약속했으니까.”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그녀의 몫만큼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맨손으로 조그마한 무덤을 만든 전요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허공의 어딘가에서 붉은빛을 발하고 있는 무언가가.
푸욱!
아르티나의 날카로운 칼끝이 순식간에 그 존재를 관통했다.
경악한 악마가 눈을 부릅뜨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이건 엘리아의 몫이다. 빌어먹을 악마 놈아.”
마음이 내일을 향하지 않으면 미래시는 발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거에 잠시 머물렀던 전요한에겐 악마의 존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속죄의 의식을 치르고 난 이후엔, 모든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한낱 인간 주제에….”
악마는 토혈을 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이후 주위의 풍경이 짙은 안개로 뒤바뀌기 시작한다.
“인간은 네놈들의 생각보다도 훨씬 강해.”
지금부터 그 사실을 직접 증명해보일 터였다.
전요한이 고개를 들자, 허공에서 구경 중이던 소악마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히, 히익!”
베르길리우스의 휘하에 있는 백작위계의 악마를 죽이다니.
트라우마가 상당했던 시절의 정신 공격조차 그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역시 당신이군요. 어쭙잖은 수작질엔 넘어가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가장 먼저 환상을 깼던 시르케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전요한은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없이 그녀를 껴안았다.
“응? 괜찮으신 건가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가 정말로 살아 있나 확인해보고 싶어서.”
따뜻한 온기와 함께 심장의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전요한이 안심하며 놓아주자 시르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당신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그동안 제가 절실히 필요했단 건 잘 알겠습니다만.”
“솔직히 네가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진 모르겠어.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아직 걸어가야 할 여정이 많이 남아 있었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던 전요한은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환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두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흐흑… 엄마….”
“왜 죽어버린 거야. 너만큼은 죽지 않길 바랐는데….”
다들 극복하기 어려운 트라우마가 하나씩은 있는 모양이었다.
시르케가 한숨을 내쉬며 흑진주에 새로운 술식을 걸었다.
“으응? 뭐야?”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두 여인은 멍청하니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무안한 표정으로 말없이 전요한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슬슬 나서려는 모양이네요.”
“아아, 그래.”
무언가 변화를 감지한 시르케의 말에 전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길리우스 후작.
지금까지 배후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던 그가 마침내 출전을 결심한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