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과거의 인연 (4)
“반인반수의 괴물이군요. 지능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한 번씩 휘두르는 강력한 공격이 무식하게 강하니 주의해야 해요.”
한눈에 정체를 파악한 시르케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평소처럼 마법을 시전하려 했으나, 공허한 느낌만이 감돌 뿐이었다.
“어라…?”
머릿속의 술식이 완성되지 않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곧,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어째서 마력이 예전 수준으로 되돌아간 거지?’
이 정도면 상급 마법은 무리고, 기껏해야 중급 마법 중 일부까지만 해낼 수 있었다.
그마저도 감당하기 어려워서 함부로 남발하지 못한다.
“야아아옹.”
어느새 어깨 위로 올라온 캣시가 교태로운 울음을 냈다.
이윽고 녀석에게서 푸른 기운이 전해지자, 시르케는 눈을 깜박였다.
“마법의 위력을 한 번 증폭해 주겠다고요?”
이 흑묘종은 자신이 살았던 에테리아 대륙의 고대 생명체였다.
오래전에 멸종했다고 들었는데, 이런 곳에 살아남은 개체가 있을 줄은 몰랐다.
“좋아, 그럼 부탁해요!”
같은 대륙 출신이라 그런지, 캣시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시르케가 술식을 준비하는 동안 전요한은 미노타우르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호오, 주제에 네놈도 강화 버프를 받고 온 거냐?”
검붉은 기운이 마치 갑옷처럼 신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대미궁에서 자주 본 암흑 무장.
아마도 베르길리우스가 걸어준 가호로 보이는데, 지금의 자신에겐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크롸롸롸!”
미노타우르스는 도발을 당한 것이 기분 나쁜지 곧장 돌격해 왔다.
쿵쾅 하는 굉음과 함께 지면이 울렸고, 채린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시, 시간이 촉박해.”
즉발성 마법만으로는 놈을 막기엔 역부족인 것처럼 보였다.
얼어붙은 그녀를 이수연이 잡아끌었다.
“방해만 될 것 같으면 옆으로 나와. 괜히 휘말려서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깐.”
어차피 두 사람은 마법사 포지션이었다.
후열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화력 지원만 해주면 된다.
그녀들이 제대로 자리 잡자 전요한은 마음 놓고 미노타우르스를 상대했다.
“흐익! 자칫하면 저도 당해 버린다고요!”
여전히 손아귀에 붙잡혀 있는 소악마가 울상을 지었다.
단지, 한 손만으로 이 같은 전투에 임하겠다니.
이쯤에서 풀어주는 편이 좋지 않겠냐며 눈물로 간청해본다.
“어림없는 소리! 너는 만일에 대비한 내비게이션이야!”
단번에 묵살해버린 후, 전요한은 날아오는 철퇴를 피해냈다.
묵직한 타격음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큼지막한 구덩이를 만들어낸다.
“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데!”
이번만큼은 쉽지 않을 거라며 소악마가 상황을 비관했다.
하지만 녀석의 기대와 달리, 전요한은 가볍게 뛰어올라 측면에 유효타를 먹였다.
“크롸!”
암흑 무장이 손상을 입자 미노타우르스는 붉은 두 눈을 번뜩였다.
흉포한 철퇴가 다시 한번 높이 들려지던 때였다.
“거기까지입니다, 추악한 반인반수! 당장 제 눈앞에서 사라지세요!”
마침내 술식을 완성한 시르케가 승리 선언을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허공에서 생성된 화염이 소용돌이치며 미노타우르스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움직임을 구속하는 동시에 불태워 버리는, 「플레임 토네이도」.
저항조차 못 한 채 서서히 잿더미로 화하는 미노타우르스였다.
“뭐, 뭐야?”
“위력이 대단하네. 우리의 마법은 별 타격도 주지 못했는데.”
채린과 이수연이 경이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마법사였던 시르케에 비하면 두 여인은 그저 초심자 수준에 불과했다.
“이, 이럴 수가…. 저 무지막지한 놈을 간단히 쓰러뜨리다니.”
소악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시르케를 바라봤다.
위력이 증폭된 것이라고 해도, 그만한 수준의 원소 마법은 애초에 구사하기 어렵다.
“과연, 시르케. 역시 내 동료다워. 다시 만나니까 존재감이 남다른걸?”
고개를 돌린 전요한이 아낌없는 칭찬을 건넸다.
“후우… 당신이 암흑 무장을 반파시켜 준 덕분입니다. 그건 그렇고, 전리품 분배는 어떻게 할 생각인 거죠?”
한숨을 쉬던 시르케의 시선이 수북이 쌓인 잿더미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전요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응? 그거야 기여도에 따라 비율로 나누면 되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만약 제가 그 비율에 이의를 제기한다면요?”
“그렇다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결투다! 이기는 쪽이 결정권을 갖는 거야!”
몇 차례의 곤란한 질문에 간단명료한 답변만이 되돌아왔다.
파티의 운영 방식을 확인한 시르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제가 알던 전요한이 맞나 보네요. 못 본 사이에 주위에 여자가 늘었군요?”
“왜, 질투하는 거야?”
“그럴 리가요. 저처럼 지적인 하프 엘프는 당신 같은 호색한 따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랜 친구를 대하듯, 친밀한 대화가 이어졌다.
다정해 보이는 모습을 바라보던 채린은 무언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유대감을 느꼈다.
‘겉보기엔 다투는 듯하지만, 서로를 아끼는 마음은 같아.’
수년 동안 서로에게 목숨을 의지하며 싸우면 안 맞는 관계도 돈독해지는 걸까.
상대의 존재로부터 위안을 얻는 두 사람이 부럽단 생각이 들었다.
“해후는 그쯤하고, 대책부터 세우는 게 어때? 이대로라면 계속 공격만 당할 텐데 말이야.”
팔짱을 낀 채 구경해온 이수연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시르케는 동의한다며 구체적인 정황을 물었다.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탓에 현재 상황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군요.”
묻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
지난 시간의 격차를 메우는 것이 그녀에겐 최우선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면….”
거목에 기대어 있던 전요한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향기로운 꽃내음을 실어 나르며 모두를 몰입하게 했다.
* * *
“전부 듣긴 했습니다만, 여전히 믿기 어렵군요.”
시르케는 적잖이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녀가 무릎 위의 캣시를 쓰다듬는 동안, 전요한은 눈앞에 떠오르는 무언가를 응시했다.
‘운명 카드로군.’
미래시가 없었던 예전엔 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시르케]
호밀밭의 소꿉친구(★★★).
당신의 오래된 벗이자 정신적인 동반자입니다.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혹여 당신이 실수로 길을 잃었을 땐 곁에서 어려움을 분담해 줍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뢰할 수 있지만, 가치관 차이 등의 이유로 남은 여정을 함께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면, 여러모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소꿉친구라.’
실질적인 나이 차는 많이 나는 편이었다.
하프 엘프의 수명은 아무리 짧아도 300세 정도.
그래서일까.
시르케는 동갑처럼 보이지만 자신보다 100살이 더 많았다.
물론, 서로 허물없이 대한다는 점에서는 딱히 의미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널 다시 잃기는 싫은데.’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내용이지만 이별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전요한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시르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고민을 하는 건가요?”
“응? 아무것도 아니야.”
“제 결정을 듣고 싶으신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이 살던 세계에 이전부터 호기심이 있었거든요.”
대미궁을 공략했더라도, 에테리아 대륙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애쓸 생각은 없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던 하프 엘프는 아직도 어디엔가 묶여 있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
변함없이 지식을 탐구하며 세상의 일면을 직접 경험하고 싶어 하는 모험가였다.
“그래? 다행이네. 기적처럼 재회했는데 떠난다고 할까 봐 겁이 났거든.”
“당신이 입 발린 말을 계속하는 걸 보니, 상황이 정말로 어렵긴 한가 보군요. 이건 어떻게 보면 대미궁에서 직면했던 위기의 연장선일 수도 있겠습니다.”
시르케는 전직 대마법사답게 현재의 상황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다.
지구의 지배권을 빼앗으려는 질투의 죄악, 스반힐트.
그녀가 하얀 마녀와 무언가 관계가 있을 거란 추측을 충분히 해볼 수 있다.
“네 말은, 우리가 대미궁에 갇히게 된 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란 거야?”
“그래요. 일부러 여러 종족을 집어넣어 놓고 실험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위계 낮은 차원을 하나씩 복속시키기 위한 실험.
마계의 일곱 죄악은 각 종족의 성향과 행동 방식을 오래 전부터 연구해 왔다고 한다.
“그럼 놈들은 지금쯤 각자 다른 차원에 마수를 뻗고 있겠네?”
“아마도요. 어쩌면 제가 살았던 에테리아 대륙도 노려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네요.”
하지만 거긴 뛰어난 영웅들이 많으니 굳이 자신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시르케가 한가로운 소리를 하자 이수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너는 고향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싶지 않은 거야?”
“제게는 고향이 없어요. 어려서부터 떠돌이 신세였고, 굳이 따지자면 이도니아 왕국에 제일 오래 머무르긴 했지만 소속감은 없어요.”
“하지만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건 많잖아.”
“그렇겠죠. 하지만 그건 상대적인 문제 아닐까요?”
지식욕이 강한 시르케에게 있어선, 왕도의 웅장한 성벽과 신전보단 옛 기록을 담은 한 권의 고서가 더 소중하다.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전요한은 그녀를 두둔했다.
“게다가 하프 엘프는 혼혈이라고 차별받기 일쑤지. 태반이 노예로 팔려가거나 이유 없는 학살을 당했다고 하더군. 나는 시르케의 마음을 이해해.”
“당신이 제 편을 들어주는 날이 오다니, 역시 오래 살길 잘했군요.”
시르케는 야생 허브로 우려낸 차를 홀짝였다.
아공간 주머니에 생활필수품이 있어서 이 같은 상황에서도 여유를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예상치도 못한 적들이 자꾸 나타나서 곤란함을 겪고 있었거든요.”
조신하게 앉아 있던 채린이 고마움을 표했다.
그녀는 충격적인 일을 자주 겪은 탓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저 꼬마가 물의를 일으킨 모양이죠? 당분간은 아무 말도 못 할 테니 걱정 마세요.”
시르케가 허공에 동동 매달려 있는 소악마에게 시선을 던졌다.
녀석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실에 꽁꽁 묶인 채, 이쪽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
입까지 완전히 봉해져서 불만이 있어도 토로하지 못하는 상태.
꼴좋다고 생각한 전요한이 손가락으로 녀석을 튕겨봤다.
“……!!”
딱밤을 맞아서 아파하더니 호를 그리며 회중시계처럼 진자운동을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본 채린이 재밌다는 듯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괴롭히는 것 아니야? 이런 상황에.”
전요한의 돌발 행동이 그녀의 불안감을 잠시나마 해소해 주었다.
“이제 장난은 그만해요. 슬슬 놈들의 본거지를 찾으러 가야 하니까요.”
차를 전부 마신 시르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전요한은 기대하는 듯이 눈을 빛냈다.
“오호, 알아냈어? 거기가 어디인지.”
여기서 얼마간 기다렸지만, 베르길리우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르케를 빼앗겼긴 해도, 그녀가 안전한 상태이니 별로 서두르지 않는 낌새다.
“조금 생각해 봤는데, 이런 환경이라면 가능성은 하나뿐이에요.”
“어떤 가능성?”
“왜곡된 공간. 원시림의 일부는 위장 마법 따위로 본모습이 가려져 있어요. 그래서 육안으로는 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죠.”
하지만 전요한이 아까 건네준 흑진주를 이용하면 위장 마법을 와해할 수 있었다.
시르케가 복잡한 술식을 완성하자, 흑진주가 허공에 떠오르며 모두를 인도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