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과거의 인연 (3)
“이게 전부냐? 나를 징벌하겠다는 놈들치곤 너무 약한데.”
전요한이 여유를 부려 보였다.
그 모습에 동료인 두 여인들마저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쩌다 저렇게 강해진 거죠?”
“일단 소고기를 먹은 탓은 아닌 것 같은데, 이전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용모가 확연히 달라진 상태였다.
우연하게 잠재력이 발현되어서 「개안」을 했다나.
상당한 변화였기에 잘은 몰라도 심적으로 납득이 갔다.
“크윽! 끄, 끝이 아니에요! 스켈레톤보다 강한 마물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허공에 멍하니 있던 소악마가 뒤늦게 역정을 냈다.
녀석은 전요한의 눈앞으로 다가온 후 삿대질을 해댔다.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곳의 주인은 정말 무시무시한 분이에요!”
“누군데? 그게?”
어쩌란 식으로 전요한은 혼자 팔짱을 껴 보였다.
“마계 귀족 중에서도 상위 서열에 속하는 후작, 베르길리우스 님이세요!”
“베르길리우스?”
“변경백이라고 들어봤어요? 일곱 죄악의 군주들이 차지한 대영지 간엔 경계선이 존재해요. 그 국경 지대를 수호하는 마족에게 내려지는 칭호죠!”
쉽게 말해서 베르길리우스는 스반힐트에게 신임받는, 상당한 무력을 지닌 마족이란 뜻이었다.
앞서 쓰러뜨렸던 마족들은 그저 애송이였다는 이야기에 채린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변경백…? 그, 그런 존재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니….”
일개 남작이었던 앨런 테일러도 완전히 현현한 이후엔 아카데미 교정을 날려버릴 뻔했다.
물론, 스반힐트의 권능을 부여받은 상태였다곤 하지만 말이다.
하물며 단순한 백작도 아니고, 변경백이라 불리는 후작은 어떠할까?
현재 인원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대처럼 느껴졌다.
“그럼 게이트 바깥에서 장난질을 쳤던 녀석은 서열이 어느 정도지? 상당히 짜증 났었는데.”
일행이 좌절하는 동안에도 전요한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가 소악마의 등장을 유도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새로운 정보를 획득하기 위함이었다.
“바깥…? 아, 라틴젤 님! 라틴젤 님은 그보다도 높은 공작 지위십니다. 여러분 따위를 상대하기엔 너무 고귀하신 분이라 적당히 구경만 하는 중이시죠.”
“공작이라고?”
이번엔 이수연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변경백의 존재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설상가상이다.
라틴젤의 손가락질만으로 하나둘씩 사라졌던 생도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후후. 이제야 체감이 되십니까? 여러분은 스반힐트 님을 보좌하는 위대한 분들과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군. 잘 들었다. 녀석들까지만 제압하면 우리가 이기는 셈이로군.”
잠자코 듣기만 하던 전요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예상을 뒤엎는 그 반응에 소악마는 순간 황당해했다.
“저, 저기요?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질투」의 귀족들이 당신의 목을 노리고 있다니까요?”
“대미궁의 하얀 마녀보다는 약할 것 같은데? 아무튼, 넌 이대로 안내자 역할을 해줘야겠어.”
말을 마친 전요한이 순식간에 소악마를 붙잡았다.
본래 물리적인 구속이 통하지 않는 녀석이지만, 신체의 기공을 손바닥에 집중시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 영력을 사용하다니. 당신, 평범한 인간 맞아요?”
“닥치고, 여기에서 가장 귀중한 식용 자원이 있는 곳을 말해.”
전요한은 엄중한 표정으로 소악마를 내려다봤다.
이렇게 광활한 공간에서 헤매는 것보단, 베르길리우스의 심기를 건드리는 편이 공략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히, 히익! 나중에 어떻게 되어도 저는 몰라요!”
울상이 된 소악마가 손가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일행은 주위의 식량을 챙긴 후 곧장 목적지로 향했다.
* * *
원시 밀림을 탐험하는 건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수풀 너머로 거대 뱀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고, 허공에서 가느다란 실을 타고 맹독 거미가 내려오기도 했다.
“너, 너무 징그러워.”
이런 쪽으로 면역력이 약했던 채린은 끝내 구역질을 했다.
전요한은 잠시 멈춰 서서 그녀의 등을 도닥여줬다.
“재벌가에서는 애완용으로 거미 같은 거 안 키워?”
“거미는 무슨! 그런 취미 따위는 없어. 귀여운 고양이라면 모를까.”
“고양이라. 생각해보니 이런 환경에 서식하는 희귀종이 있기는 한데.”
캣시라고 불리는 흑묘종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원래부터 있던 종은 아니고 애묘가였던 한 모험가가 차원 너머로 퍼트린 거라나.
아무튼 잘 길들이기만 하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녀석이었다.
“검은 고양이? 혹시 저런 아이를 말하는 거야?”
흥미롭게 듣던 이수연이 신전의 잔해 쪽을 가리켰다.
작은 돌담 위에 황금색의 눈만 보이는 흑묘종이 앉아 있었다.
“어라, 정말로 나타났네요.”
전요한은 확실하다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는 녀석을 향해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이거 먹이로 줄게. 맛있겠지? 우리 친하게 지내자.”
“…야옹.”
캣시는 평범한 길고양이처럼 육포를 낼름 받아먹었다.
하지만 그 후엔 태도가 돌변하여 빛의 속도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니야아아옹!”
붙잡을 테면 붙잡아봐라.
녀석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 녀석이….”
난데없는 도발에 발끈한 전요한이 시합 직전의 육상 선수처럼 상체를 숙였다.
순간 허벅지와 종아리에 근육이 부풀어 올랐고, 그 추진력은 심히 엄청났다.
콰과과과곽–!
마치 거대 공룡처럼 족적을 남기며, 전요한은 추격전을 벌였다.
손아귀에 붙잡혀 있던 소악마가 정신이 얼얼한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너, 너무 빠르잖아요!”
세상이 요지경인 것처럼 눈이 빙그르르 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한 모습이었으나 전요한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괜찮아, 넌 무슨 짓을 해도 안 뒈지잖아.”
주인으로 섬기는 베르길리우스가 있는 한, 소악마가 소멸할 일은 없다.
그렇게 숨 막히는 추격전이 이어진 끝에, 전요한은 거목이 있는 장소까지 도착했다.
“니야…옹.”
“하핫. 벌써 지쳤냐? 얼빠진 고양이 녀석.”
탈진 직전 상태로 비틀거리는 캣시를 보며 전요한이 씨익 웃었다.
신비한 능력을 지닌 흑묘종이라 해도, 자신을 제치기엔 역부족이다.
“하아아악!”
위기감을 느낀 캣시가 꼬리와 함께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녀석은 마지막 힘을 다해, 거목에 박혀 있는 무언가의 위로 도약했다.
“저건…?”
의기양양한 표정을 한 채 다가가던 전요한의 걸음이 멈췄다.
푸른 호수처럼 투명하게 내부가 비치는 마법 수정.
그 안에 익숙한 모습의 하프 엘프가 잠들어 있었다.
“…시르케?”
전요한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여러 차례나 깜박거렸다.
하지만 볼살까지 꼬집어봐도 눈앞의 존재가 예전의 동료와 똑같이 생겼단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죽었던 거 아니었어?”
하얀 마녀의 독기 어린 저주를 버티지 못하고 끝내 숨이 끊어졌다.
곁에서 눈을 감은 그녀를 품에 안고 직접 확인까지 해봤다.
그런데 이런 장소에 외롭게 잠들어 있다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녀를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전요한이 아르티나를 들어 올렸다.
티잉!
정면에서 검격을 날렸으나 마법 수정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소악마가 안심했단 듯이 세 치 혀를 놀렸다.
“역시, 당신도 깨부수지 못하는군요. 이건 주인님께서 아끼시는 최고의 보물입니다.”
소악마가 주인의 말을 주워듣기를, 잠들어 있는 시르케에겐 상당한 잠재력이 있다고 했다.
그것을 「라이프 드레인」으로 흡수하면 적지 않은 힘을 얻을 수 있다.
다만, 마법 수정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파괴되지 않아서 방치하고 있을 뿐.
아직까진 누구도 봉인을 해제하지 못했다.
“「라이프 드레인」이라고?”
소악마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전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리치 같은 존재가 생명력을 흡수하기 위해 시전하는 암흑 마법이다.
만약 당하게 되면 미라처럼 산송장으로 변해서 목숨을 잃게 될 터.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시르케가 한낱 양분 취급을 받는 건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주인님이 원시림을 관리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다양한 종이 서식하는 환경은 그분에게 회전 초밥 뷔페나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회전 초밥 뷔페는 또 어떻게 알아?”
“아, 그게… 지구의 식문화 보고서를 훔쳐보다가 우연히 읽었습죠. 히히.”
현세에 대해 다방면으로 흥미를 갖고 연구하는 녀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전요한은 좀 황당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든, 시르케는 넘겨줄 수 없어. 내게 있어선 소중한 동료니까.”
“그렇게나 아낀다면 한번 꺼내보시죠. 저 간교한 고양이를 뒤쫓을 정도의 열의로 말이에요.”
캣시는 도망치지 않고 여전히 마법 수정 위에서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기력이 쇠진한 탓도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시르케를 지키려는 모습이 엿보였다.
“설마 너, 걔를 주인으로 생각하는 거냐?”
“…야옹.”
캣시는 긍정하듯 황금색 눈을 껌벅였다.
신비한 능력을 지닌 희귀종이라, 인간의 말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아듣는다.
‘시르케가 애완동물을 데리고 다니는 건 본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시르케의 어떤 부분이 녀석을 매료시킨 것일 터다.
아마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마력 때문이겠지.
시르케는 대미궁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지닌 대마법사였다.
전요한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채린과 이수연이 뒤늦게 나타났다.
“헉헉… 왜 그렇게 빨리 가버린 거야.”
“뚜렷한 족적을 남겨서 추적하긴 쉬웠지만, 다음부터는 미리 이야기를 해줘.”
둘 다 이게 양심 없는 고양이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신비한 장면이 펼쳐져 있다.
머쓱해진 전요한은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여기가 우리의 목적지였어. 가장 귀중한 존재가 잠들어 있는 곳이지.”
대체 어떻게 해야 깨울 수 있는 걸까.
전요한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손을 갖다 대던 때였다.
콰드드득.
결코 부서질 것 같지 않았던 마법 수정의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거짓말 같은 현상에 깜짝 놀란 소악마가 입을 떡 벌렸다.
“말도 안 돼! 이런 식으로 봉인이 해제되는 거였다니!”
잠들어 있던 하프 엘프가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전요한이었다.
이윽고 마법 수정이 파편화되어 무너져 내리자, 그녀는 서서히 눈을 떴다.
“으음….”
곱게 기른 담청색 머리칼.
조금 뾰족하게 자란 귀.
호수처럼 푸른 눈망울.
신비하면서도 청아한 이미지가 일행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정신이 들어, 시르케?”
전요한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시르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자 시르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
전요한의 외모가 「개안」을 통해 역변한 탓이었다.
그녀는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지난 기억을 되짚어봤다.
“이리…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온갖 저주를 퍼부었던 하얀 마녀.
사망 직전의 절망적인 상황이 생각나자 본능적으로 전요한을 밀쳐냈다.
“시, 싫어.”
분명히 죽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살아 있는 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괜찮아, 시르케. 하얀 마녀는 내가 쓰러뜨렸어.”
“전요한…?”
“응, 나야. 이전하고는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다른 동료들은?”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지 시르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스륵. 스륵.
붉은 눈을 번뜩이는 마물이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미노타우르스.
거대한 체격에 의해 그늘이 드리워지자, 일행은 곧장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니야아아옹!”
시르케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캣시가 녀석을 향해 적대적인 울음소리를 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