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과거의 인연 (2)
“여기는…?”
눈을 뜬 채린이 주위를 둘러봤다.
경이로울 정도로 울창한 원시림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악마족의 근거지치고는 생명력이 넘치네. 뭔가 분위기가 다크해야 하는 거 아냐?”
고개를 갸웃하던 이수연이 이의 제기를 했다.
그녀는 곧장 양피지 하나를 꺼내서 간단한 술식을 발동시켰다.
초급 수준의 회복 마법.
경미한 부상 정도는 몇 분 이내로 완전히 치료할 수 있다.
“굳이 따지자면, 여기는 외속 영지입니다. 차원 간의 경계에 남아 있는, 과거의 파편이죠.”
혼란을 덜기 위해 전요한이 간단하게나마 설명을 해줬다.
그러자 채린은 잘 모르겠단 표정으로 돌아봤다.
“과거의 파편?”
“오래된 전승에 의하면, 어떤 차원은 멸망해서 유리 조각처럼 쪼개지기도 했대. 그게 온전히 남아 있다가 발견되면 던전이 되는 거지.”
쉽게 말해서 여기는 멸망한 세계의 잔재였다.
중립 지대나 다름없는 곳이라, 상위차원의 존재들이 점거하여 근거지로 활용할 수 있었다.
최약체인 인류의 입장에선 소멸시켜버리는 편이 좋은 개미굴.
이대로 방치하면 지구를 침공하는 전초기지가 되어버릴 터였다.
“차원 간의 경계를 허무는 개미굴이라. 제법 그럴 듯한 표현이네.”
관리국 요원인 이수연도 신박하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것이 쏟아져 나오는 던전을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한 전문가는 있었지만, 개미굴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아무튼, 조심하는 편이 좋아요. 예전의 모습대로 방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위장에 불과할 겁니다.”
이곳을 지배하는 악마는 어딘가에 숨어서 모든 정황을 훔쳐보고 있을 것이다.
주변 탐색부터 해봐야겠다 생각한 전요한은 선두로 나섰다.
“어디로 가게?”
“우선은 이정표로 삼을 만한 걸 찾아야지. 그래야 방향 감각이 생기니까.”
멸망한 세계의 일부이니 어쩌면 유적의 잔해 같은 게 남아 있을지 모른다.
전요한이 먼저 성큼성큼 걸어 나가자, 채린은 말없이 가슴에 손을 모았다.
‘부디 조심하길 바라.’
언제나 무언가를 위해 무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당연한 일인 양 행동할 땐, 왠지 모르게 걱정이 되곤 한다.
“녀석의 말대로 해. 멋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나름 노하우가 있는 모양이니까.”
부상 치료를 마친 이수연이 등을 떠밀었다.
채린은 얼떨결에 전요한의 바로 곁까지 다가갔다.
“혹시 대미궁에도 이런 환경의 층계가 있었어?”
“응, 비교적 어렵지 않은 곳이었는데 몇몇 자원을 두고 이종족 간의 분쟁이 심했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엘프‧수인‧드라고니안의 삼파전.
인간은 나약하다며 무시당했고, 어딜 가든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그 정도로 혹독한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구역으로 먼저 들어가서 원시 생명체들을 사냥했지. 생각보다 먹을 만한 게 많았어.”
사슴이나 멧돼지 대신 거대 뱀과 공룡을 잡아먹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녀석들 중 하나가 수풀을 가르며 눈앞에 나타났다.
스슥–
상대적으로 약한 편에 속하는 라무스였다.
물소처럼 생겼는데, 덩치가 제법 커서 위압감이 있다.
“그르르.”
라무스는 자신의 영역에 침입자가 생겨나자 위협적인 행동을 해왔다.
곤란함을 느낀 채린이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괘, 괜히 안 건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
일행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던전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악마형 던전이니, 배후에 숨어 있는 마족을 때려잡거나 공간을 유지하는 근원을 파괴하면 된다.
“글쎄. 공략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식량을 마련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한편, 이수연은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경험이 풍부한 관리국 요원답게 만일의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다.
전요한의 생각도 그녀와 같았다.
“생존에 필요한 자원은 기회가 있을 때 마련해두는 편이 좋죠.”
배후의 악마가 언제까지 자신들을 내버려 둘지 모르는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악마는 약한 존재도 바로 죽이지 않고 최대한 괴롭히며 즐기는 성향을 지녔다.
지금은 여유롭게 지켜보고만 있으나, 상황이 역전될 것 같으면 본격적으로 개입해올 터였다.
스르르르!
빙결의 마법검, 아르티나에서 냉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가파른 성장을 해온 덕분에 이끌어낼 수 있는 위력이 한층 증가한 상태다.
“그르르!”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라무스가 은색의 뿔을 들이민 채 돌격해왔다.
전요한은 후열에 있던 동료들에게 피할 것을 지시했다.
“결계 따위로 막을 생각 따윈 하지 말아요. 엄청 강력하니까.”
단순히 몸집이 거대해서가 아니었다.
원시 생명체는 상당한 마력을 보유한 존재.
신체 부위를 일시적으로 강화하거나, 원소 마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라무스의 경우 은색 뿔을 경화시켜 들이받는데, 웬만한 금속은 전부 꿰뚫을 수 있었다.
“알겠어, 피할게.”
“저런 걸 받아낼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고.”
채린과 이수연이 황급히 양옆으로 흩어졌다.
전요한은 그녀들이 안전한 것을 확인한 후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럼 어디 상대해볼까.”
라무스의 약점 같은 건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돌격해올 때의 파괴력은 괴랄하지만, 그 직후의 무방비 상태가 공략 포인트.
보통은 무섭다고 멀리 도망치는 바람에 기회를 못 잡는데, 대미궁을 공략한 고인물은 달랐다.
휘익!
정면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간발의 차로 피해냈다.
감각과 민첩 스탯이 상당한 수준으로 상승했기에 가능한 일.
물론, 근력 스탯도 이 정도면 상위 랭커에 속하는 수준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던가.”
중얼거린 전요한이 라무스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등위로 올라타서 아르티나의 빙결 마법을 구사했다.
콰드득!
라무스의 네 발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그르르! 그르르르!”
움직임에 제약을 받자 라무스는 극도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둑 하는 소리와 함께 은색의 양 뿔이 여지없이 뽑혀나갔다.
“그르르….”
마력의 구심점을 잃어버린 라무스가 힘이 빠진 소리를 냈다.
이윽고 예리한 검끝이 녀석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고통 없이 보내주마.”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사냥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털썩 쓰러져버린 라무스.
구경하던 채린과 이수연은 대단하다며 눈빛을 반짝였다.
“엄청 노련하네. 그런 식으로 제압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여기에 머무르는 동안 식량 걱정은 안 해도 되겠는걸?”
두 사람이 던전에서 야생동물을 잡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던전은 흙먼지 가득한 미궁의 형태를 하고 있는 탓이다.
그래서 공략 기간 동안 소비할 식량은 미리 챙겨 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뭐, 이 정도는 기본이죠.”
도축 준비를 하던 전요한이 고개 돌려 엄지를 치켜올렸다.
이후 그는 본격적인 요리를 위한 자원 조달을 요청했다.
“해체 작업은 제가 할 테니, 주위에 식재료로 쓸 만한 것들이 있으면 가져와 주세요.”
열매, 향신료, 곡물, 채소…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풍미를 더해야 더욱 괜찮은 요리가 완성된다는 말에 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임시로 구축한 캠프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일행은 캠프파이어를 하듯 모닥불 주위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네 요리 솜씨, 제법인데? 육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건 합격이야.”
고기 스튜를 우물거리던 이수연이 개인적인 평가를 했다.
다양한 재료들이 적절히 어우러진 식감은 풍성한 미각을 만끽하게 해줬다고 한다.
“나도 맛있었다고 생각해. 현지에서 직접 조달한 식재료라 그런지 모든 면에서 뛰어났어.”
얌전한 자세로 식사하는 채린도 솔직한 칭찬을 해주었다.
머쓱해진 전요한은 두 사람에게 공을 돌렸다.
“괜찮은 식자재를 이것저것 많이 가져온 덕분이죠, 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어요.”
식용 버섯을 비롯해서 사탕수수, 감자, 양파, 당근, 밀, 토마토 따위의 채집물이 수확되었다.
물론, 정확히는 그것과 완전히 똑같은 자원은 아니었지만 미각으로 전달되는 맛은 별 차이가 없다.
‘설마 소금까지 구해올 줄은.’
지하 동굴에서 솟구쳐 나온 일부의 암반으로부터 암염까지 발견해냈다.
이 정도의 채집력을 발휘한 것이 단순한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경사인 만큼 그냥 넘기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어도 되는 거야? 우리는 던전을 공략하려고 들어온 거잖아.”
식사를 거의 마친 이수연이 문제 제기를 했다.
채린도 걱정된다는 듯 그녀의 의견에 덧붙였다.
“맞아. 예비 식량을 구할 목적이긴 했지만, 지나치게 시간을 허비하는 기분이 들어.”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겠지만, 설명을 해달라는 눈빛이다.
아직 말해주기 곤란했던 전요한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두고 보면 알 거예요.”
온갖 생물과 식물이 자생하는 원시 밀림에서 생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행과 단합하여 이런 식의 성과를 이루어내는 게 재미있는 구석도 있었다.
그렇기에 충분히 즐기다 보면, 조만간 나타나게 될 터다.
한데 모인 인간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떠드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존재가.
“아주 살판나셨네요? 넓적한 맥반석에 소고기까지 구워 먹고, 조금만 더 있으면 큼지막한 포도로 와인도 숙성해서 마시겠어요?”
예상대로 녀석은 인내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그만 삼지창을 든 소악마.
등 뒤에 돋아난 검은 날개는 앙증맞기까지 하다.
“넌 뭐야?”
전요한은 파리 내쫓듯 손을 휘저었다.
귀찮은 척하며 막 대하는 그 태도에 소악마는 발끈했다.
“아니, 왜 때려잡으려고 해요? 제가 뭐 못할 말이라도 했어요?”
이런 존재는 보통 주인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만 행동하므로, 그 자체만으론 무해하다.
“우리가 소고기 파티 하겠다는데 니가 뭔 상관이야? 한 입 구걸하러 왔으면 썩 꺼져.”
전요한이 그만 방해하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요한에게서 풍기는 기세와 험악해진 분위기에 소악마는 순간 겁을 먹고 뒤로 빠졌다.
“히, 히익. 그게 아니고 너무 안전 불감증인 건 아닌가 해서요.”
“뭐가 문젠데?”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느끼지 못하셨나요? 여기는 마물들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고 있습니다.”
“관리되는 중이라고?”
전요한은 호기심이 동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에 만족한 듯, 소악마는 웃으며 한쪽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소중히 돌보던 식용 자원이 외부인에게 잡아먹혔으니, 곧 철저한 응징이 시작될 겁니다. 지금이라도 부리나케 도망치는 편이 어떻겠어요?”
멀리서 어두운 기운을 지닌 무리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제자리에서 일어선 전요한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너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식용 자원이 뭐지?”
“왜요, 말해주면 가서 바로 차지하게요?”
“응, 그래야 네놈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낼 것 같으니까.”
수풀 너머로 해골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들은 조악한 무기로 일행을 향해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평소에 상대하던 스켈레톤하고는 좀 다른데?”
전격 마법을 날리던 이수연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골 병사들은 하나같이 검붉은 마기를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상태.
그로 인해 웬만한 공격은 제대로 먹혀들지가 않았다.
“히힛, 여유가 점점 사라지는군요. 그러게 뭐 하러 소고기 파티를 벌여….”
고전하는 두 여인을 비웃으려던 소악마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앞에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탓이었다.
두두두둑.
정신을 집중한 전요한이 내리친 검격에 해골 병사 무리가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완전히 환생을 거친 육체라서 검기의 위력부터가 이전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못해도 심연의 재해급 마물과 일대일이 가능한 검호의 수준.
“마, 말도 안 돼.”
소악마의 동공에 지진이 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