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과거의 인연 (1)
“어떻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라틴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공간이동」으로 날려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전요한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다.
“당장 그만두세요!”
마법진으로 술식을 완성한 메르첼이 외쳤다.
이후 황금빛의 십자가들이 허공에서 무더기로 쏟아져 내렸다.
무시하기 어려운 위력의 신성 마법.
빛 속성하고는 상극인 라틴젤이 결계를 펼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크윽, 괜한 방해를….”
뜻대로 되지 않아서 위기감을 느낀 건 결코 아니었다.
단지, 이해할 수 없었을 뿐이다.
일개 인간 따위가, 마계의 귀족 중에서도 서열이 높은 자신의 능력을 무력화하다니.
자존심이 상한 탓에 짓궂은 장난을 치려던 것도 그만두게 되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가지고 놀기 어려운 장난감이군.’
지구의 여신이 내렸다는 은총이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주의 깊게 한참 살펴보니 분명히 느껴지긴 한다.
폭격을 막아내며 고민하던 라틴젤은 기존의 계획을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이럴 바에는 깜짝 선물을 먼저 공개하는 편이 낫겠어.’
두 교관을 놔두고 다른 생도들부터 날려보낸 이유가 있었다.
곧 있으면 관리국의 그 사냥개도 나타날 테니 타이밍은 적절해 보였다.
“이쯤에서 물러나 드리지요. 실은 여기서 더 괴롭히며 묶어둘 생각이었는데 말이죠.”
애초부터 제대로 개입할 생각 따윈 없었다.
상위 귀족인 자신이 나약한 인간들을 상대로 전력을 다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현재 수행 중인 임무도 배후 교란뿐이었다.
“너는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한다! 비열한 악마!”
공간도약을 해온 율리안이 한쪽 손아귀에 푸른 불꽃을 일으켰다.
제5원소 에테르.
빛, 어둠과 함께 상위 속성으로 평가되는 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오호, 인간이 아무런 가호도 없이 영력을 사용하다니. 흥미롭군요.”
이면 공간으로 숨으려던 라틴젤이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율리안의 공격 마법을 간단히 무력화시켰다.
스르르륵.
맹렬하게 날아오던 푸른 불꽃이 허공에서 맥없이 사그라진다.
“어, 어떻게?”
“다행히 아직 위협이 될 만한 수준은 아니군요. 그럼 이만.”
라틴젤은 비릿한 미소를 남긴 후 검은 틈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자 채린이 옆에 있던 전요한의 어깨를 흔들었다.
“큰일이야. 너랑 나 말고는 전부 흩어져 버려서 던전 공략을 하기 어려워졌어.”
같은 조원으로 선발된 우등생들은 「공간이동」에 의해 각자 외딴 곳으로 날려졌다.
그들을 전부 모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터.
하지만 전요한은 오히려 잘된 것이라 생각했다.
‘많은 인원을 데려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
괜히 동행시켰다가 발목을 잡거나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물론, 학생회장인 채린도 모자란 점이 많지만 그녀에겐 투자가치가 충분했다.
[채린]
잠자는 숲속의 마녀.
곤경에 빠진 상태여서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녀를 구원하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나중에 마음을 얻고 나면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줍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걸?’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데리고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본인의 의지가 워낙 강하고, 운명 카드의 내용도 심상치 않아서 결정을 바꿨다.
어느 정도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는 도박.
본격적인 행동에 앞서 전요한은 일단 채린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관리국 요원들도 현장에 나와 있으니까 누구든 장시간 고립되는 일은 없을 거야.”
“그, 그러겠지?”
“지금 중요한 건 던전 공략이야. 정예 인원만으로 시도해보는 게 어때?”
“정예 인원이라고?”
갑작스러운 제안에 채린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주위엔 전요한과 두 교관뿐.
대체 어떤 식으로 편성할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건 위험한 생각이야. 흩어진 생도들을 찾아야 해서 우리는 함께 들어가 줄 수 없어.”
짐작한 대로 메르첼이 반대표를 던졌다.
라틴젤을 놓친 탓에 투덜거리던 율리안도 다가오며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서너 명만으로는 아무래도 어렵다. 아까 그놈같이 골치 아픈 악마가 내부에 있다면 어쩔 생각이지?”
눈앞에 있는 건 분명히 악마형 던전 게이트였다.
학내에서 성적이 뛰어났던 우등생들이라 하더라도 교활한 간계에 당할 수 있다.
율리안은 예전에 희생되었던 수제자인 한유나를 떠올렸다.
‘그런 악몽이 재현되어선 안 돼. 절대로.’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을 생각이었다.
최대한 안전을 중요시하려는 율리안의 뒤쪽으로 채강윤이 나타났다.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스승님.”
그는 누군가와 한바탕 싸우고 왔는지 복장이 더러워져 있었다.
“뭐지?”
“놈들에게 붙잡혀 있던 생존자가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마인화」하는 바람에 전투를 치르고 왔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였던 30대 남성이었다.
어디선가 갇혀 있다 풀려난 것으로 추정되고, 신원 확인 결과 최근의 실종자 중 한 명이었다.
“우리를 방해하려고 의도적으로 한 명씩 내보내는 건가.”
“무언가 위험한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단서는 저안에 있겠죠.”
채강윤은 던전 게이트의 너머를 응시했다.
여차하면 자신도 뛰어들겠다는 듯이 의욕적인 눈빛이다.
“함께 가면 괜찮겠네. 너, 별명이 사냥개라며? 악마들의 잔향을 잘 추적할 거 같아.”
“…대신 린은 빠질 거다. 바깥 상황도 이렇게 위험한데 함부로 들여보낼 수 없어.”
한 단계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해도 목숨이 우선이었다.
게다가, 예정된 실전 평가는 상위 악마의 방해로 제대로 진행될 것 같지 않다.
채강윤이 하나뿐인 여동생의 안전을 최우선시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 잡담이나 늘어놓고 있을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찌릿 하는 전류와 함께 이수연이 나타났다.
그녀는 누구에게 당했는지 한쪽 어깨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무슨 일이에요?”
의아해진 전요한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마인화한 생존자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더라도, 관리국의 정예 요원에겐 그다지 위협은 되지 않을 터.
만약 부주의했던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 새로운 강적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당해버렸어. 반인반마(半人半魔)의 모습을 하고 있는 생도였는데, 전력이 수준급 이상이야.”
이수연은 갑자기 조우했던 정체불명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카데미 생도복을 입고 있었단 말에 메르첼이 미간을 찌푸렸다.
“죄악과 협력하는 제자가 아직도 더 있었나요? 말세로군요.”
교화담당 교관으로서 타락하는 생도들이 늘어나는 건 크나큰 실책이었다.
“겉모습이 어떻게 생겼었지? 여기로 데려온 우등생들은 많지 않으니 외견만으로 금방 식별할 수 있을 거다.”
율리안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는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그에겐 천리안이 있었지만, 얼마 전까지 라틴젤에게 집중하느라 제대로 주위를 살피지 못했었다.
“음… 분홍색 머리칼을 포니테일로 묶은 여자애였어.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양말이 특징이었는데….”
이수연은 부상을 당한 와중에도 침착하게 상대의 외형을 설명했다.
분명, 이번에 선발된 상급생 중엔 없었던 존재.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몇몇의 표정이 점점 어둡게 변해 갔다.
“설마… 유나?”
채강윤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두 교관이 가능성을 극구 부정했다.
“말도 안 돼요. 오래전에 죽었던 아인데.”
“사체를 찾지 못하긴 했지만, 분명히 숨이 끊어졌다고 들었다. 그건 틀림이 없어.”
한때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학생회장.
그녀에 대한 기억은 영원히 과거 속에 묻어둬야만 할 것 같았다.
어디선가, 힐난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여기에 있었군요. 놓친 줄 알고 제 자신을 책망하는 중이었습니다.”
방금 전에 이수연이 언급했던 존재였다.
분홍색 머리칼의 포니테일.
학생회장의 붉은 완장.
검은색의 니삭스.
왠지 모르게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이쪽을 전부 적으로 간주하는 듯했다.
“정말로… 유나야?”
채강윤은 놀라서 눈을 의심했다.
분위기는 많이 다르지만, 생전의 복장과 외모가 완전히 똑같았던 탓이다.
“아니, 그렇지 않은 것 같네요. 예전에 어땠는지 잘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전혀 다른 존재일 겁니다.”
전요한이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마기에 잠식당한 꼭두각시였다.
의식적으로는 가사 상태고, 지난 행동 패턴과 사고방식을 반복할 뿐.
주인으로 섬기는 악마의 지시에만 따르는 빈껍데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저 아이를 공격할 수 없어. 어떤 일이 있어도.”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메르첼이 입술을 깨물었다.
율리안도 전의를 잃었는지 손아귀의 푸른 불꽃을 소멸시킨다.
“멀리서 지켜만 봤을 뿐, 바로 곁에서 지켜주지 못했다. 이건 무책임했던 나에 대한 징벌이겠지.”
지난 일을 떠올리며 자책하는 두 교관.
하지만 누구보다도 혼란스러워하는 건 채강윤이었다.
“어째서… 악마의 하수인 따위가 된 거야?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했던 네가….”
인정할 수 없는 사실에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채강윤이 앞으로 걸어 나오자 한유나는 무감각하게 응대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네.”
“정말로 이제는 아무런 기억도 없는 거냐?”
“응, 그런데 그게 뭐가 중요해? 너희는 전부 여기서 죽게 될 텐데.”
한유나가 서 있는 발밑에 암흑 마법진이 펼쳐졌다.
얼마 후, 허공에서 다크 스피어가 무더기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메르첼이 신성결계를 생성한 덕분에 일단 버틸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한계에 직면하는 건 시간문제다.
“일이 왜 이렇게 꼬이는 거야? 아직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는데….”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채린이 무력하게 중얼거렸다.
전요한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우리가 나서야 하는 건 이제부터야. 따라와.”
“어, 어디로 가게?”
“잘 생각해봐.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부터 해야겠는지.”
따지고 보면 이건 전부 악마들의 농간질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녀석들의 근거지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
확실한 선택지가 놓여 있는데 우물쭈물 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나도 돕겠어.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이라도 전력이 필요할 테니까.”
어깨의 부상을 붙잡고 있던 이수연이 공략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그녀도 현재로선 정면 돌파를 시도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쪽의 문제는 다른 이들에게 맡겨두면 될 터.
던전 내부에서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니, 잘만 하면 늦기 전에 되돌아올 수 있었다.
“괜히 방해만 되는 거 아니에요, 옆집 누나? 상처가 아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텐데.”
“신경 꺼. 관리국에서 지급받은 치유 수단이 있다고.”
“그럼 셋이서라도 함께 들어가죠. 저쪽 일엔 개입해봤자 별로 좋은 소리 못 들을 것 같으니까요.”
말을 마친 전요한이 먼저 던전 게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곧바로 채린이 뒤따르려 하자,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지 마, 린. 위험하니까 그냥 내 곁에 있어.”
아까도 던전 진입을 만류했던 채강윤이었다.
한유나의 등장으로 정신이 나가버린 와중에도, 하나뿐인 여동생의 안위는 걱정하고 있다.
“오빠 일이나 신경 써. 나는 이대로 정해진 운명을 기다리지만은 않을 거야.”
동화 속의 공주님처럼 새장 안에 갇혀 사는 건 이제 질색이었다.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다짐하며 채린은 친오빠의 손을 뿌리쳤다.
“제법 과감한 면이 있네. 저 아이도.”
망설이면 내버려 두고 가려던 이수연이 중얼거렸다.
어찌됐든,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뒤돌아볼 필요가 없다.
나머지 일행이 시간을 끄는 동안, 그녀는 두 파티원과 함께 게이트 너머로 몸을 날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