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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45화 (45/180)

제45화. 분쟁지역 (4)

“의외로 쉽게 정체를 드러내는군.”

율리안이 싱겁다는 반응을 보였다.

라틴젤의 등장은 한참 후일 것이라 생각한 탓이었다.

“뭐, 잘됐죠. 배후의 존재를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었으니까요.”

상대해야 할 적이 나타나자 메르첼은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역할은 제자들이 던전을 공략할 수 있도록 곁에서 이끌어주는 것.

실전 평가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두 교관이 먼저 나서자 라틴젤은 흥미 없단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이 제 적수가 될 거라 생각합니까? 그쪽의 무리에선 나름 강해 보이지만, 잘 모르겠군요.”

마계의 귀족 중에서는 가장 서열이 높은 공작의 지위였다.

실질적인 무력이 낮은 두뇌파라곤 하지만, 제대로 된 「각성」도 못 하는 자들에게 당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변수가 있다면 단 하나.

앞서 스반힐트의 권속을 둘이나 쓰러뜨린 전요한이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면 헛수작질은 그만하고 정면으로 붙어 보지 그래?”

전요한이 대열에서 이탈하며 도발하는 시늉을 했다.

다른 마계 귀족이 보았으면 화가 날 법도 했으나, 라틴젤은 코웃음을 쳤다.

“품위 없기는. 정면 대결이란 건, 최소한 수준이 비슷한 자들끼리 벌이는 법이죠.”

“지금 네가 더 잘났다고 말하려는 거야?”

“후후, 글쎄요. 우선은 살아남아서 자신의 가치를 직접 증명해 보시죠.”

전요한을 계속해서 깔보던 라틴젤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기이한 진동과 함께, 반구형의 암흑 결계가 인근 일대를 뒤덮었다.

“뭐, 뭐지?”

“설마 함정인가?”

“우리를 여기에 가둬두려는 속셈인가 봐!”

곁에 있는 생도들이 당황하며 수군거렸다.

갑자기 형성된 암흑 결계로 인해, 시야가 어둑해지고 지급받은 통신기 또한 먹통이 되어버렸다.

“악마의 구속이네.”

기현상의 정체를 확인한 전요한이 중얼거렸다.

무언가 알고 있다는 반응이라서 채린은 다급히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악마의 구속? 그게 뭔데?”

“말 그대로 구속이야.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게 울타리를 친 셈이지.”

이만한 규모의 암흑 결계가 술식 없이 유지되려면 보통 매개체가 필요했다.

아마도 숨겨진 장소에 순도 높은 마정석 따위가 놓여 있을 터.

하지만 그것을 파괴하는 일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뭐, 관리국에서 도와주겠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쯤은 대충 예상했을 테니까.”

말을 마친 전요한이 씨익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미행 중이던 요원들이 건물 뒤에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벌써 도움을 요청하는 거냐, 전요한?”

먼저 다가온 채강윤이 힐난하듯 말했다.

그의 등장에 채린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오, 오빠?”

만일에 대비해 관리국 요원들이 뒤를 봐줄 거란 말은 들었다.

그런데 친오빠까지 현장 관리를 맡고 있었을 줄은.

고마움에 더해서 적지 않은 부담감이 느껴졌다.

“저놈들 때문에 던전으로 진입하지도 못하고 있잖아? 우리가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지.”

뒤이어 나타난 이수연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는 찌릿한 전기를 온몸에서 생성해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적극적으로 조력하는군요. 이능력 관리국이라고 했던가요? 조금 귀찮아지긴 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적대자들의 증원에도 라틴젤은 여전히 여유를 과시했다.

다만, 그의 시선은 전요한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요주의 인물이라고 여기는 만큼,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전부 관찰하는 것이다.

“교관님, 저희를 게이트 앞까지 인솔해 주세요. 아무래도 이쪽의 전투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어 보이네요.”

지리멸렬한 전투가 예상되자, 전요한이 기다렸다는 듯이 제의를 했다.

율리안과 메르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게 우리 역할이다.”

“여러분이 저들과 싸우느라 힘을 뺄 필요는 없겠죠.”

제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교관들이었다.

그들이 먼저 전의를 불태우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죄악의 사도들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어둑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

그것은 다름 아닌, 움직임을 속박하는 저주였다.

“머, 머리가 아파.”

“다리가 마음대로 안 움직여.”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저주에 걸린 생도들이 이상 증세를 호소했다.

이들은 죄악과 맞서 본 경험이 없어서 암흑 마법에 무지했다.

“흐음. 역시나.”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은 생도는 이러한 상황을 예측했던 전요한뿐이었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장태석에게 눈빛을 보냈다.

“…….”

“…….”

다름이 아니고, 저는 저주 대상에서 예외인 상태이니 가서 방해하라는 의미였다.

만약 거역하면 혈류가 멈추거나 역으로 폭주해서 죽을 터.

어쩔 수 없어진 장태석은 이를 악문 채 죄악의 사도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럼에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자, 송주한이 안경을 고쳐 썼다.

“이런, 내부에 정탐자가 있었던 건가? 의심은 하고 있었는데 제대로 당했군.”

장태석이 죄악의 세력과 협력했단 사실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철저히 비밀로 해둔 후에 이런 식으로 미끼 역할을 맡기려는 목적에서였다.

푸욱!

잠시 가만히 서 있던 장태석이 옆에 있는 사도를 갑자기 단도로 찔렀다.

한 명이 털썩 쓰러지자, 허공에서 내려다보던 라틴젤의 안면이 살짝 구겨졌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정체가 들통났던 모양이군요.”

앞서 라틴젤은 뭔가 불안해하는 장태석의 모습으로부터 이상한 느낌을 받았었다.

한 방 먹었다며 고개를 내젓는 동안, 전요한은 교관들에게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지금이에요. 놈들이 주문을 외우지 못할 때, 포위망을 뚫죠.”

애초부터 죄악의 사도들을 전부 상대할 목적은 없었다.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굳이 그러지 않아도 배후의 관리국 요원들이 대신해줄 일이다.

모든 디버프에 「절대면역」인 자신이 먼저 나서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푸욱!

빈틈을 파고든 장태석에 의해 다른 한 명이 털썩 쓰러졌다.

그때서야 죄악의 사도들은 완전히 주문을 멈췄고, 품에서 초승달 형태의 시미터를 꺼냈다.

“배교도를 응징하라!”

“구원을 믿지 않는 자에게 죽음을!”

계속해서 저주를 방해받을 바에 눈앞의 변절자부터 처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곧 엄습해온 번개 사슬에 의해 그들의 시선은 점차 분산되기 시작했다.

찌리리릿!

검게 타버린 한 명이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이수연의 전격 마법.

이후엔 다른 정예 요원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아아, 결국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건가요? 유감이군요.”

상황을 관전하던 라틴젤은 안면에 손을 얹었다.

난전을 틈타 공략조가 포위망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금 개입하는 건 자존심 상하지만, 그래도 배신자 척결을 미뤄선 곤란하겠죠.”

자신의 계획을 처음부터 어긋나게 하는 짓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틴젤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장태석을 향해 검지를 들어 보였다.

“자, 잠깐! 나는 목숨을 위협받아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숙청하려는 그 움직임에 장태석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한사코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라틴젤이 귀기울여 듣는 일은 없었다.

“뭐, 당신의 사정이 어찌 됐든 관심은 없습니다. 그저 실패한 도구에 불과하니까요.”

검지의 끝자락으로부터 검붉은 광선이 일직선으로 뻗어져 나갔다.

모두를 순식간에 지나친 그것은 가차 없이 장태석의 심장을 꿰뚫어 버렸다.

“쿠, 쿨럭!”

허망하게 당해버린 장태석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토혈했다.

그가 맥없이 뒤로 고꾸라지자, 채강윤은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악마 자식.”

예전에 첫사랑을 무참히 살해했던 악마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채강윤이 고개를 든 채 노려보자, 라틴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호, 당신. 저에게 진득한 적의를 품고 있군요? 과거에 소중한 사람이라도 잃었나 보죠?”

“닥쳐라, 쓰레기.”

화가 난 채강윤은 곧장 라틴젤을 향해 도약했다.

죄악의 사도들은 다른 관리국 요원들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상황.

그가 맡아야 하는 상대는 녀석 말곤 달리 없었다.

* * *

“저 사람들 덕분에 시간은 제법 벌겠네요.”

배후를 뒤돌아본 전요한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까진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너무 쉽게 보내 주는걸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후미에서 뒤따르던 메르첼이 의문을 표했다.

그녀의 말대로, 라틴젤에겐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어찌 됐든, 우리에겐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밖엔 없다.”

율리안도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인내심 있게 모두를 이끌었다.

조금만 더 가면 던전 게이트.

소중한 제자들을 무사히 내부로 진입시킬 수 있었다.

“던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제가 다 알아서 할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느새 선두로 나온 전요한이 자신 있다며 엄지를 세워 보였다.

“너의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궁금하군.”

“글쎄요. 굳이 알 필요까진 없으실 것 같은데요.”

“후우. 널 보면 예전의 채강윤이 생각나서 질색이다.”

옆에서 함께 달리던 율리안은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지금은 원수 같은 사제 지간이 되어버린 녀석과 비슷하게 느껴지다니.

현재 가장 아끼는 제자인 채린의 안전이 심히 불안해졌다.

“왜요, 제가 걱정되기라도 하시나보죠?”

“말장난은 그만하지. 지난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진 않으니까.”

계속되는 전요한의 놀음질에 율리안은 정색했다.

그가 무엇보다도 꺼리는 건 채린을 비롯한 제자들의 죽음.

만약 한 명이라도 억울하게 당해버린다면 뼈아픈 고통으로 다가올 터였다.

“지난 악몽이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재현해 드리고 싶어지는군요.”

던전 게이트가 거의 가까워지고 있던 때였다.

내버려 두고 온 라틴젤이 다시 한번 눈앞의 허공에 나타났다.

“네놈이 어떻게?”

제자들을 멈춰 세운 율리안이 경계하며 물었다.

“어떻게라니. 참으로 이상한 질문이군요. 저는 위대한 분의 수족이자 마계의 공작. 이만한 거리의 공간도약 정도는 쉽게 해낼 수 있습니다.”

라틴젤은 별것도 아니란 듯이 너스레를 떨어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전요한에게로 옮겼다.

“제가 이쯤에서 가로막을 거란 사실은 당신이라면 충분히 예측했을 테지요? 여기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마족에 대해 잘 알고 있으신 분이니까요.”

전요한에 대한 정보라면, 충분히 조사해두고 온 터였다.

범상치 않은 동료들과 함께 하얀 마녀의 대미궁을 공략한 인간.

그 사건으로 인해 마계는 한번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아직까진 사건의 진상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마족이 드물긴 하지만 말이다.

‘스반힐트 님께서 비밀로 하라 명하지 않았다면, 곧장 일곱 죄악의 표적이 되었을 텐데.’

운이 좋은 건지 다른 죄악들은 전요한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대미궁이 붕괴하면서 그와 관련한 단서를 전부 집어삼킨 탓이다.

‘하지만 너무 좋아하진 마라. 너의 악몽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미처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계획은 완벽했다.

우습다는 듯이 전요한을 내려다보던 라틴젤은 손가락을 튕겼다.

“어어?”

허공에 몸이 떠오르던 정하은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놀란 율리안이 라틴젤을 추궁했다.

“네놈, 하은이를 대체 어떻게 한 거냐?”

“별것 아닙니다. 단지, 결계가 쳐진 공간의 외딴 곳으로 보내버렸을 뿐이죠.”

말을 마친 라틴젤이 재차 손가락을 튕긴다.

그러자 이번엔 송주한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 이럴 수가….”

순식간에 친구들을 잃어버린 채린의 동공에서 지진이 났다.

보다못한 메르첼이 후미에서 신성 마법을 구사하려 했다.

“막아야 해요. 이런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요.”

하지만 라틴젤의 손가락질이 그보다 훨씬 빨랐다.

몇 명의 생도들을 외딴 장소로 날려보낸 후 전요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엔 당신의 차례입니다.”

교활한 미소를 짓는 라틴젤.

그는 여유롭게 손가락을 튕겼지만, 기대와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전부냐? 멍청한 놈아.”

해볼 테면 해보란 식으로 서 있던 전요한이 씨익 웃어 보였다.

이후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나 먹어라, 산호 머리.”

정보 수집에 능한 라틴젤조차 간과했던 사실.

전요한에겐 어떠한 적대적 간섭도 통하지 않는 「절대면역」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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