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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44화 (44/180)

제44화. 분쟁 지역 (3)

“역시 예상대로군.”

이것저것 조사해본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태석에게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악마들이 무언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

저번과 달리 치밀한 방식으로.

아직 분명하진 않지만 대충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지난 복수를 하려는 걸까요?”

상부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던 정서희가 물었다.

그녀는 혹여 일이 심각하게 커지진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뭐, 그런 목적도 있겠죠.”

“요한 씨 덕분에 날이 갈수록 위험한 일에 엮이는 기분이네요.”

“그 정도는 감수하셔야죠. 제 전속수행 요원이신데.”

전요한은 어쩔 수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따지자면, 먼저 시비를 걸어온 쪽은 죄악의 권속들.

괜히 까불다가 당해놓고 뒤끝이 상당히 심했다.

“아무튼, 그 복학생에 대해 조사해놓길 잘했어요. 휴학 사유가 불분명해서 좀 마음에 걸렸거든요.”

“그러게요. 녀석하고는 던전 공략을 함께 하기로 되어 있었으니, 방치해 뒀으면 어디선가 뒤통수를 맞았겠죠.”

장태석에겐 현재 피의 구속을 걸어둔 상태였다.

관리국으로 이송조치하지 않은 이유는 녀석을 미끼로 써먹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조금 위험하지 않겠어요? 자칫 잘못하면 혼란을 틈타 도망칠 수도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항상 곁에서 주시할 테니까요.”

여차하면 체내의 혈류를 멈추게 하여 즉사시킬 수도 있었다.

괜히 3천만 원을 소모하면서까지 흡혈귀 군주의 권능을 얻은 게 아니다.

“부디 확실히 해두세요. 이번 던전 게이트는 심상치 않은 점이 많으니까요.”

정서희가 관리국으로부터 건네받은 자료들을 가리켜 보였다.

전요한은 이미 읽어봤다며 구구절절한 내용을 생략했다.

“녀석들이 어떤 함정을 파뒀는진 직접 가보면 알게 되겠죠.”

“장태석을 통해서 이쪽의 공략 일정은 대충 알고 있을 거예요. 저도 전력으로 서포트할 테니 힘내세요!”

응원한다는 의미로 정서희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전요한은 잠시 말없이 그녀의 모습을 응시했다.

[정서희]

견습 마법사.

일천한 지식으로 당신에게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아직 미숙한 그녀의 조언은 올바른 선택을 내리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하세요.

‘여전히 변화가 없네.’

아무래도 정서희와는 관계 진전을 이룩할 만한 계기가 부족했나 보다.

나름 친해진 사이긴 한데, 미숙한 조언자로 남아 있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갑자기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요?”

“문득 서희 씨가 계란말이를 너무 좋아한단 생각이 들어서요.”

“잠깐만요, 아까 남아 있던 반찬 하나를 뺏어먹었다고 화내는 거예요? 복학생을 조사하는 일로 어젯밤 내내 야근시켰으면서.”

삐친 정서희가 볼을 부풀렸다.

두 사람이 얼마 전에 아침 식사로 먹은 메뉴는 김치찌개.

나람의 보상을 바랐던 그녀로서는 불만이 충분히 있을 법했다.

“그건 그렇고, 서희 씨는 정말로 이번 공략에 낄 생각이 없으세요?”

“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상부의 지침이 그러니까 따라야죠. 앞으로의 승진을 포기할 생각이 아니라면요.”

“아쉽네요. 저번처럼 안절부절못하면서 제 곁에 매달리는 모습을 봐야 하는 건데.”

전요한은 함께 악마형 던전에 갇혀있었을 당시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그러자 새침하던 정서희의 표정이 점차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렇게까지 민폐를 끼치는 수준은 아니거든요? 저, 이래 뵈도 관리국 6과예요?”

“신참내기들이 소속되는 7과의 바로 위쪽 부서일 뿐이라고 들었습니다만.”

“6과에서도 상위 전력이라고요! 그 정도면 경력에 따라 충분히 5과로 부서 이동할 수 있어요!”

정서희는 자신이 나름 인정받는 요원이라며 박박 우겨댔다.

분명, 관리국 내에서는 딱히 모자란 면이 없단 평판일 터.

하지만 전요한에겐 그저 술식도 제대로 못 구사하는 견습 마법사에 불과했다.

“아아, 시르케가 있었으면 서희 씨의 모자람을 제대로 지적해줄 수 있었을 텐데.”

“시르케? 누구예요 그게.”

“대미궁에서 최심층부까지 함께 했던 동료입니다.”

그러나 결국, 시르케도 하얀 마녀의 저주를 버텨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동료들 중에선 가장 마지막까지 버텨냈던 그녀였으므로, 아쉬움이 많았다.

만약 자신이 더욱 강했더라면.

기존보다 일찍 공략할 방법을 찾아냈더라면.

그런 생각이 언제나 전요한의 머릿속을 괴롭혀왔다.

“아……. 뛰어난 대마법사였는데 그때 안타깝게 죽었다고 했죠. 미안해요.”

“신경 쓰지 마세요. 괜히 이야기를 꺼낸 건 저니까요.”

손사래를 치며 전요한이 애써 태연한 척했다.

정서희는 그 웃음으로부터 무언가 그늘진 모습을 보았다.

아마도 처음 보는 복잡한 심경.

악몽과도 같았던 과거의 기억이 그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이럴 땐 연상처럼 느껴지네.’

대미궁에서 25년이란 세월을 공략에만 쏟아 부은 상대였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현재의 겉모습보다 여러모로 성숙할 터.

하지만 던전 공략 이외엔 서투른 점이 많으므로, 바깥세계에서의 정체성은 아직 미성년에 머물러 있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기나긴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깬 후 성숙해진 소년이라고나 할까.

정서희는 그런 위화감이 느껴지는 전요한에게서 연민을 느꼈다.

“슬슬 출발할 시간이에요. 동료들이 기다리지 않게 미리 출발하시는 게 어떨까요?”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바뀔 수 없는 과거 대신 미래를 바라보도록 등을 떠밀어주는 일뿐이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살찌니까 저 없을 때 야식 적당히 시켜 먹어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전요한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윽고 현관문이 닫히자 정서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동안 살 좀 쪘던 거 어떻게 알았지.”

임시 부사감으로 불려 와서 사무직이나 맡다보니, 아랫배가 살짝 나왔다.

역시 자신은 몸으로 직접 뛰는 현장직이 어울리는 걸까.

전요한이 없는 동안 다이어트나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정서희였다.

* * *

건물들이 늘어선 시가지.

행인과 차량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고요한 한복판이었다.

“마치 유령도시 같네.”

“갑자기 몬스터라도 튀어나오는 거 아니야?”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류가 멸망하면 이런 기분일까나.”

함께 걷던 아카데미 생도들이 저마다 떠들어댔다.

그러자 선두에서 인솔하던 유리안 교관이 엄한 표정으로 뒤돌아봤다.

“놀러 나오는 게 아니다. 언제 위협요소가 나타날지 모르니 정신 바짝 차리도록.”

던전 게이트의 인근 일대는 비상경계가 선포된 상태였다.

미리 현장을 조사한 관리국이 심상치 않은 사건들을 입수한 탓이었다.

“여기에서 최근 며칠 동안 실종된 일반인의 숫자가 두 자리에 달한대요. 잘은 몰라도 좋지 않은 이유가 있겠죠?”

후미에서 뒤따르던 메르첼 교관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녀는 죄악의 권속들이 이곳에 도사리고 있단 걸 직감으로 깨닫고 있었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옅은 마기의 잔향.

어둑하고 불쾌해서 한번 느끼고 나면 상당히 오랫동안 감각에 남아 있었다.

“정신만 잘 차리고 있으면 별문제 없을 거예요. 그렇죠, 복학생 선배?”

중열 즈음에 위치한 전요한이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물론이야.”

장태석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요에 가까운 대답.

만약 시키지 않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의 목숨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갑작스럽게 전투가 벌어져도 자기 목숨은 자기가 챙겨라. 이건 관리국에서 내려온 임무이기 이전에, 지금까지의 수업을 정리하는 실전평가라는 걸 잊지 말도록.”

유리안은 평소보다 조금 말이 많았다.

소중한 제자들이 혹여 다치거나 죽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탓이었다.

그렇게 티가 날 정도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전요한이 보기엔 상당히 노심초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유나라고 했었지.’

유대감이 깊었던 존재를 잃은 후의 공허함은 잘 알고 있었다.

대미궁에서의 마지막 전투 직후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일어선 자신의 주위엔 온통 쓰러진 동료들의 모습 뿐.

소원을 들어준다는 마녀의 성배를 이후에 찾아냈으나, 그들을 살리는 건 무리라는 답변만 돌아왔었다.

무력해진 자신이 다음으로 빈 소원은 지구로 되돌아가는 것.

걷잡을 수 없는 피곤함을 느끼고는 다음 환생을 결심했다.

‘그저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눈을 뜨면 거짓말처럼 동료들이 되돌아와서 인사를 건네줄 것만 같았다.

우습게도 온갖 절망을 맛본 주제에 그런 기적을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알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에 대한 조롱뿐.

뒤늦게 후회하기보다는 애초에 어떻게 해서든 소중한 이들을 잃지 말았어야 했다.

그걸 절실히 깨달았던 전요한은 누구든 지키리라 마음먹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자신이 느끼는 상대라면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말이다.

“괜찮아? 표정이 안 좋은데.”

앞열에서 걷던 채린이 걱정스레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전요한과 마찬가지로 중열을 지키고 있었다.

“별 거 아냐.”

전요한은 머릿속의 잡념들을 떨쳐냈다.

이제 곧 닥칠 상황에 감각이 서서히 곤두서고 있었다.

“잠시 정지. 가까운 곳에 위협적인 움직임이 있다.”

선두에서 모두를 인솔하던 유리안이 멈춰선 건 그때였다.

그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정하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위협적인 움직임?”

“잘은 모르겠지만, 먼저 처리해야 할 녀석들이 나타난 것 같네.”

정하은의 곁에 있던 송주한이 곤란하다는 듯 안경을 고쳐 썼다.

이와 동시에 한 무리가 나타나 주위를 서서히 에워싸기 시작했다.

“마치 광신도 같네요.”

주위를 둘러본 메르첼이 감상을 말했다.

검은 후드와 망토로 모습을 감춘 채 서 있는 죄악의 사도들.

그들의 존재에 대해선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던 차다.

“왜 선공해오지 않는 거죠?”

“혹시 시간을 벌려는 건가?”

“어쩌면 도발하다가 함정으로 유인하려는 걸지도.”

위기감을 느낀 생도들 사이에서 추측이 오갔다.

여차하면 공격할 생각으로, 유리안은 한쪽 손에 푸른 불꽃을 생성해냈다.

“비켜라. 안 그러면 너희들도 악마에게 협조하는 불온한 세력으로 간주하겠다.”

유리안 혼자서도 평범한 죄악의 사도쯤은 한 번에 여럿을 해치울 수 있었다.

특별히 권능을 부여받는 녀석이 아닌 한, 나머지는 기껏해야 기존의 능력치가 상승하는 정도에 그친다.

“잠깐만요. 제가 놈들하고 대화를 해보겠습니다.”

무력시위를 해보이려는 유리안을 전요한이 막았다.

기존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은 채, 그는 허공에다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네 녀석의 수작 따윈 전부 알고 있다, 라틴젤! 마족의 자존심이 있다면 숨어있지만 말고 어서 기어나와!”

라틴젤의 존재에 대해선 일찍이 장태석으로부터 들은 바가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이름이 나오자 죄악의 사도들이 주춤거리며 서로를 쳐다봤다.

그로부터 얼마 후, 허공에 기다란 틈이 벌어지며 산호색 머리칼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벌써 눈치를 챈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부름에 응해드리는 것이 예의겠지요.”

질투의 죄악, 스반힐트가 총애하는 전술참모.

마계영지의 교활한 공작, 라틴젤은 깔보듯 전요한을 내려다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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