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분쟁 지역 (2)
“어머, 아프겠다.”
“그런데 쟤는 누구지?”
“처음 보는 애인데.”
“설마 전학온 건가?”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요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태석을 내려다봤다.
“까불지 마라. 참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저번에 개인적으로 시비를 걸어왔을 때는 모욕만 주고 넘어갔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정신 줄 놓고 멋대로 행동하려 한다.
고삐 풀린 말을 얌전히 만들려면 참교육이 필요했다.
“크윽, 네놈은 누구냐?”
바닥을 기며 신음하던 장태석이 올려다봤다.
우등생인 자신을 일격에 날려버릴 정도의 실력자라니.
학내에 그만한 생도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누구냐고? 못 알아보다니 섭섭한데? 나 전요한이다. 어젯밤에 새로 태어났지.”
“뭐? 저, 전요한?”
“왜, 도저히 안 믿겨지냐? 하긴 이만큼이나 달라졌으니 수긍하지 못하는 건 무리도 아니겠지.”
적당히 멋진 포즈를 취해 보인 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자 구경 중이던 여생도들이 얼굴을 붉히며 다시 수군댔다.
외모가 훤칠해진 덕분인지 여론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역시 얼굴이 개연성이란 옛말이 틀리지 않았군.
무슨 행동을 해도 다들 알아서 납득해주는 분위기다.
“네가 전요한이든 아니든, 이 일은 확실히 기억해주마.”
한차례 투덜거린 장태석이 힘겹게 일어섰다.
그리고는 생도복을 털면서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간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치인데.’
저 녀석의 성격상 이대로 꼬리 만 강아지처럼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다.
던전 공략과 관련하여 남몰래 꾸며둔 음모라도 있는 건가?
전요한이 의구심을 품고 있을 때였다.
[장태석]
비수를 쥔 어릿광대(★).
어떠한 계기로 원한을 품고 당신에게 위해를 가하려 합니다.
숨겨둔 뒷배가 있으므로 그의 농간질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으음?’
새로운 유형의 운명 카드다.
벌써부터 1성인 걸 보면, 어지간히도 악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적당한 기회에 제압해두지 않으면 곤란할 터.
지금은 보는 눈이 많으니 조별 회의가 끝난 이후를 노리기로 했다.
“그러면 회의를 시작할게. 우리가 맡은 던전은 새로운 유형이라고 하니까 만전을 기울여야 할 것 같아.”
헛기침을 하던 채린이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장태석을 제외한 모두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 *
“후우.”
교실 밖으로 나온 전요한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식으로 던전 공략 전에 장시간 사전 준비를 하는 건 처음이다.
‘그래도 미리 대비해둬서 나쁠 건 없겠지.’
게이트 주위의 인근 지역은 이미 죄악의 세력에 의해 잠식된 상태라고 했다.
던전 내부로 진입하기 전에 그들과 맞부딪치리란 건 당연한 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배후를 교란당하면 큰 혼란에 빠질 수도 있었다.
“혹시 내일을 걱정하는 거야?”
뒤따라 나온 채린이 말을 걸어왔다.
회의가 끝난 지 꽤 되어서 주위엔 둘뿐이었다.
“걱정한다기보단, 신경 쓰이는 게 있어.”
“뭔데 그게?”
“악마의 하수인. 어쩌면 한둘이 아닐지도 몰라.”
얼마 전에 일어났던 학내의 소동과는 달랐다.
이번엔 확실한 근거지가 있고, 네크로맨서보다도 강한 녀석이 숨어 있는 느낌이다.
전요한은 문득 성유물 도난 사건을 떠올렸다.
“혹시 그게 녀석들의 수중에 들어간 건 아닐까?”
“만약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는 건데?”
“잘못될 경우, 인근 일대가 마계의 영지로 넘어가버릴 수도 있어.”
“마계의 영지…?”
채린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던 탓이다.
“쉽게 말해서, 죄악의 세력이 하나의 구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거야.”
“그러면 마계의 영지가 되어버려?”
“응, 만약 아무도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나중에 다시 빼앗아 온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땐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마계의 영지로 편입된 지역엔 질투의 죄악, 스반힐트가 강림해 있을 테니까.
그런 불상사를 피하려면 녀석들이 가시면류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 성유물에 대체 어떤 이능이 깃들어 있어?”
“악마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순교」야. 위계 있는 악마가 자신을 제물로 바쳐서 일곱 죄악 중 하나를 강림시키는 거지.”
“일곱 죄악이라고?”
“각자의 성향에 따라 마계의 땅을 지배하는 군주들이야. 지금 우리는 그중 하나에게 노려지고 있어.”
전요한은 그간 비밀로 했던 사실까지 털어놓았다.
나중에 설명하기엔 시간이 촉박할지도 모른다 생각해서였다.
“그, 그러면 전에 난리를 피웠던 자들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에 불과했단 거야?”
예상대로 채린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악마의 하수인이었던 천강우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한 그녀로선 당연한 일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너는 굳이 공략에 낄 필요 없으니까.”
“무슨 말이야? 작전 회의까지 끝났는데 조장인 나보고 빠지라고?”
실전 평가의 성적도 이번 던전 공략에 달려 있었다.
채린이 말도 안 된다며 힐난하자 전요한은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뭐, 뭐 하는 거야?”
“더는 응석 부리지 않는다고 했었지? 하지만 내가 볼 땐 넌 여전히 어린애야.”
“무, 무슨…”
“어차피 던전 내부로 들어갈 정예 인원은 정해놓았어. 만약 거기에 끼고 싶다면, 각오는 단단히 해두는 게 좋아.”
전요한은 선택을 내리라며 잠시 시간을 주었다.
서로 얼굴이 가까이 맞닿아 있자, 채린이 결국 얼굴을 붉혔다.
“조, 조금 떨어져. 이러면 남들에게 오해받잖아.”
갑자기 잘생겨진 탓인지, 전요한에게 어렴풋이 품고 있던 마음이 점차 형체를 갖춰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거기서 뭐 해?”
상급생의 수다쟁이, 정하은이 복도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충격을 받았는지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너희들 설마?”
순정 만화를 몰래 보며 키워왔던 온갖 망상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정하은마저 제멋대로 오해한 채 얼굴을 붉히자, 전요한은 피곤함을 느꼈다.
“후우. 넌 잠시 기다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까.”
상황이 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전요한이 다시 얼굴을 마주하자 채린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미안. 응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던전 공략은 포기할 수 없어. 그러니 다른 애들은 내버려 두고라도 난 함께 데리고 가줘.”
그녀로선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전요한은 그 선택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채강윤이 난리 피울 것 같아서 제외하려고 했는데, 별수 없네.”
실은 던전 공략에 채린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상급생 중에서는 드물게 3성급의 잠재력을 지닌 마법사.
만약 학내에서 동료를 정해야 한다면 그녀가 빠질 이유는 없었다.
“단, 공략 지휘는 내가 할 거야. 이런 쪽으론 최고 경력자니까.”
“알겠어. 너에게 맡길게.”
채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의 콧대 높은 모습과는 사뭇 달라서 정하은이 또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네가 그렇게 순순히 구는 건 처음보네. 언제부터 남자에게 리드당하는 타입이 된 거야?”
“시끄러워. 아무것도 모르면 그냥 입을 열지 마.”
짓궂은 말에 채린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는 떠나기 전에 바로 곁의 전요한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이것저것 알려줘서 고마웠어. 그럼 내일 만나.”
한편으론 부정하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점차 이끌리고 마는 채린이었다.
그녀가 되돌아선 채 사라지자, 정하은이 한껏 능글맞은 표정으로 달라붙었다.
“진도가 제법 잘 나가는 것 같은데? 이러다 졸업 전에 약혼반지까지 끼겠어.”
정말이지 입이 방정맞은 계집애였다.
어이가 없어진 전요한은 한쪽 주먹을 들어올렸다.
이윽고 코옹! 하는 소리와 함께 정하은의 머리에 꿀밤이 떨어졌다.
“아야야…. 잘 되라고 그런 건데 왜 때려?”
“됐고, 어서 보고나 해.”
정하은은 최근에 잘 이용하고 있는 학내의 정보통이었다.
그녀에겐 장태석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보라고 시켰었다.
“송주한을 데리고 미행해봤는데, 씩씩거리면서 모의 훈련장으로 들어갔어.”
혼자서라도 화풀이를 할 만한 거리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등을 돌렸다.
“그럼 녀석하고 대화 좀 하러 갈게.”
“잠깐, 아까 소수 정예로 꾸려서 던전 공략 한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았던 정하은이 멈춰 세웠다.
그녀에겐 굳이 전부 설명할 필요 없었으므로 대충 이유를 댔다.
“이번 작전에서 인원이 둘로 나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야.”
“왜 나뉘는 건데?”
“그건 내일 가보면 알게 될 거야. 지금은 납득하기 어려울걸?”
나름 채강윤에게서 얻은 기밀 정보였다.
공략조에 끼지도 못할 인원에겐 굳이 밝힐 필요 없는 상황.
어리둥절해하는 정하은을 내버려둔 채 전요한은 걸음을 재촉했다.
* * *
‘빌어먹을. 언제부터 이렇게 만만한 존재가 되어버린 거지?’
모의 훈련장에서 홀로 활약하던 장태석은 이를 갈았다.
수많은 몬스터들을 해치워도, 한 생도의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요한.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2단계나 진급했다는 녀석이었다.
무슨 수작을 벌인 건지 용모까지 훤칠하게 바뀌어서,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장난이 아니다.
‘그런 놈 따위, 나중에 강해지면 아무것도 아냐.’
얼마 전에 라틴젤이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이번 공략에 참여하는 생도들을 위험에 빠뜨리면 쓸 만한 권능을 주겠다.
어떻게 보면 같은 편을 팔아넘기는 꼴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은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흘러가기 마련이지 않은가?
자신이 강해질 수만 있다면, 그 수단 따윈 아무래도 좋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장태석이었다.
“채린, 그 계집도 기회가 된다면 콧대를 눌러주겠어.”
꼴에 학생회장이라고 기고만장하며 훈계하는 모습이 매우 아니꼬웠다.
그런 여자애를 철저히 굴복시키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게 장태석의 개인 취향이다.
“얼굴도 반반한 게 가지고 놀면 딱 좋겠어. 크큭.”
장태석은 머릿속으로 온갖 망상을 펼쳐봤다.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우등생을 유지했던 목적.
그건 강자가 되면 뭐든 하고 싶은 대로 저지를 수 있단 생각에서였다.
자극적인 망상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끼익.
폐허가 된 유적지의 허공에 하얀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내부로 들어왔다.
고도의 가상 현실 기술로 구축된 배경에 균열이 생겨나자, 장태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어떤 놈이 연습 도중에 갑자기 끼어들어?”
한 스테이지가 끝나기 전까진 기다려주는 게 예의였다.
무례를 범한 셈이었으나 상대는 사과의 말도 없이 무뚝뚝하게 걸어왔다.
“너, 너는?!”
정체를 확인한 장태석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전요한.
지금쯤 던전 공략을 위한 준비로 바쁠 거라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여기에 나타났다.
“네가 악마와 협력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시간이 아까웠던 전요한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빙결의 마법검, 아르티나를 소환하며 전의를 드러냈다.
“아직 죄악의 사도가 되진 않은 모양이지만, 싹을 잘라둬서 나쁠 건 없겠지.”
눈앞에 떠올라 있는 운명 카드가 방치해뒀을 경우의 위험성을 확실히 경고하고 있었다.
전요한이 대뜸 돌격해오자 장태석은 필사적으로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곧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창이 힘없이 부러지고 말았다.
사용하는 무기의 등급 차이가 현격한 탓이었다.
“전부 불지 않으면 오늘 네 목숨은 없다.”
순식간에 승패를 가른 전요한이 눈을 번뜩였다.
목전에서 서슬 퍼런 감각이 느껴지자 장태석은 욕지기를 내뱉었다.
“하,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조금 전에 머릿속으로 펼쳤던 망상들은 결국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