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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42화 (42/180)

제42화. 분쟁 지역 (1)

“후우, 피곤하네.”

개인실로 되돌아온 전요한은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실전 평가를 떠나기 전에 이런저런 대비를 해두느라 바빴던 하루였다.

‘이번엔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

관리국이 직접 나서서 신경 쓸 정도면 평범한 던전이 아니었다.

저번에 마주쳤던 채강윤도 별난 점이 많다며 귀띔을 해줬지.

게이트 주위에서 발생하고 있다 는 괴사건들은 특히 냄새가 구렸다.

‘죄악의 권속들이 또 밖으로 나온 모양이군.’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상급 권속은 게이트에서 단독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차원 간의 간섭 탓인지 머릿수 제한 따위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놈들을 내버려두면 곤란한 문제가 발생한다.

“최종 목적이 나라고 했었지.”

네크로맨서도, 앨런도 전부 자신을 우선적으로 노렸었다.

지구의 여신에게서 남다른 은총을 받았다나.

서열전이니 뭐니 떠들어대던데, 대미궁에서 우연히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권능자들이 서열전을 치르려면 분쟁 지역이 필요하다고 했었어.’

뭔가 갈등이 발생해야만 어느 쪽의 위계가 더 높은지를 두고 다툴 필요가 생긴다.

즉, 분쟁 지역은 서열전을 벌이기 위한 필요조건.

서열전에서 승리하고 나면 이전까지의 분쟁 지역은 모두 자신의 것이 된다.

그러니 스반힐트의 입장에선 최대한 분쟁 지역을 늘리고 싶을 터.

장차 위협이 될 만한 상대도 미리 제압해두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군.’

모처럼 되돌아온 지구가 죄악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

이번만큼은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드득.

체내에서 기묘한 변화가 느껴진 건 그때였다.

골격이 다시 맞춰지는 소리가 들리자 전요한은 순간 당황했다.

“어어?”

하지만 곧 그 변화의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인다.

‘슬슬 시간이 되긴 했네.’

알에서 깨어난 이후로 이렇다 할 징후가 아직 없었다.

환생 시스템의 특전 중 하나인 개안.

관점에 따라 환골탈태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진정으로 환생에 걸맞은 육체를 얻게 된다.

‘끝날 때까지 대략 한나절 정도 걸렸었지.’

처음 환생을 했을 당시에도 경험했던 일이라 별로 새삼스럽진 않았다.

안정을 취하는 게 좋다 판단한 전요한은 평소보다 일찍 잠을 청하기로 했다.

“마침 졸리기도 했어.”

적당히 옷만 벗어던지고 그대로 침대에 고단한 몸을 내맡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곯아떨어진 전요한.

그가 꿈나라로 향해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째깍째깍.

한밤중에도 갑자기 정신이 드는 일은 없었다.

아침이 밝고 기상 시간이 조금 넘은 시점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똑똑.

이윽고 8시 40분이 되자 방문하기로 했던 정서희가 노크를 했다.

‘왜 반응이 없지?’

평소에 늦잠을 전혀 자지 않던 전요한이라 의문이 생겼다.

혹시 밤중에 곤란한 사건이라도 벌어진 것일까?

여러 차례 불러도 대답이 없자, 정서희는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설마 다치거나 한 건 아니지?’

하급 악마가 교정을 나돌아 다닌 일도 있었기에 걱정이 앞섰다.

결국, 정서희는 부사감에게 주어진 권한을 사용하기로 했다.

덜컥.

전용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완전히 뻗어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의 나체.

허벅지 사이로 튀어나온 무언가를 발견한 정서희는 황급히 눈을 가렸다.

“어맛!”

정체는 모르겠지만, 어서 나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전요한과 비슷하단 느낌은 들지만, 평소의 얼굴과 확연히 다른 탓이었다.

뒤돌아선 정서희가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으음….”

쥐 죽은 듯이 있던 전요한이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자 정서희는 하얗게 표정이 굳었다.

“죄, 죄송해요. 요한 씨의 친구인 것 같은데 안에 있는 줄 모르고….”

절친한 생도끼리는 비밀리에 개인실을 공유하기도 한다.

아니면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대충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는 정서희.

그녀를 향해 전요한이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못 알아보시겠어요? 며칠 전에도 같이 생선구이 백반 시켜먹었으면서.”

“……!”

놀란 정서희가 믿지 못하겠단 표정으로 뒤돌아봤다.

분명, 다른 사람인데 왜 전요한인 척하는 거지?

그와는 달리 인물도 훤칠하고 신체 비율과 체격도 보기 좋았다.

외모가 뛰어난 연예인들도 감히 비교당하는 걸 원치 않을 만큼.

“어디 보자, 이번엔 더 괜찮아졌을까?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

침묵하는 정서희를 내버려둔 채, 전요한은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아랫도리만 적당히 수건으로 가린 모습이라 볼품없을 법했으나.

“호오.”

멋지게 다져진 근육과 매끈한 피부가 오히려 나체를 예술 작품처럼 보이게 해줬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조각상.

여심을 홀리는 반듯한 외모에 전요한은 씨익 웃어보였다.

“잘생겼는데요?”

“어떻게 하룻밤 만에 그리 변할 수 있는 거죠?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네요.”

정서희가 여전히 잘 모르겠단 듯이 추궁해왔다.

그녀는 여기저기 남아 있는 생체 흔적을 통해 눈앞의 상대에 대한 신원 분석을 마친 상태였다.

“실은 알에서 깨어나는 꿈을 꿨는데, 그 탓인 것 같아요.”

“장난해요?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데 똑바로 알려줘요.”

“흐음.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전요한은 뭐라고 둘러댈까 잠시 고민했다.

생각해보니 어제 실비아와 대련을 하면서 짧게나마 「각성」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 경험을 하고나면 머리칼, 피부, 눈동자의 색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등의 신체적 변화가 생겨나곤 한다.

‘전혀 영향이 없었다곤 하기 어렵겠지.’

어찌 됐건, 환생 능력에 대한 내용은 비밀로 해야 했다.

“…벌써 「각성」을 했다고요?”

“네, 알고 계시는 걸 보니 지난 사례가 있나 보네요?”

“직접 확인은 못 해봤지만, 3성급의 이능력자들이 높은 경지에 오르면 드물게 용모가 바뀐다는 정보는 들었어요.”

“실비아 교관처럼 이계의 존재와 비슷하게 변하기도 하고요?”

“네? 그건 모르고 있었던 사실인데…. 아무튼, 극히 일부의 경우일 뿐이에요. 세간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관리국도 쉬쉬하는 상황이죠.”

예상대로 「각성」은 지구에선 일반적이지 않은 현상이었다.

전요한은 만족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단계 성장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아직 가야 할 길이 한참 멀었지만.”

“대체 얼마나 강해지려고요? 지금도 혀를 내두를 지경인데.”

정서희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간 죄악과 싸워오는 모습을 지켜봐왔던 탓이다.

표면상의 종합 능력치가 낮긴 해도, 전요한의 실제 전력이 높은 편인 건 사실이었다.

“글쎄요. 딱히 성장치의 상한선을 정해둔 적은 없어서. 가능하다면 전 세계 서열 1위부터 노려보고 싶네요.”

“…국내 서열 1위는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에요?”

“채강윤의 전력은 일전에 확인했으니까요. 금방 제칠 수 있을 것 같더군요.”

녀석의 종합 능력치가 200이라고 했던가.

사실상 그 정도는 이미 따라잡은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각성」 상태로 싸울 수 있는 실비아 교관보다 못하다.

체감상 그녀의 종합 능력치는 196 정도 되는데, 비장의 수단이 하나 있는 셈이니까.

전요한이 품평을 하듯 말하자 정서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몇 번 맞붙은 것만으로 그렇게 정확한 전력 측정이 가능해요?”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실제 전력은 속일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음… 실비아 교관 정도?”

“그렇다면 관리국 국장님도 충분히 가능하겠네요. 실비아 교관하고는 비등한 관계니까요.”

정서희가 별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유명학의 이름이 언급되자, 전요한은 조금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 할아버지가 제법 센가 보네요? 하긴 괜찮은 성검도 들고 있긴 했죠.”

“운이 좋으면 나중에 한 수 배울 기회가 있을 거예요.”

유명학은 원칙적으론 관리국 요원들에게도 대련 상대가 되어주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 들어와서 좀처럼 말을 듣지 않던 채강윤은 예외적인 경우였지만.

“정말 불쌍할 정도로 얻어맞았죠. 그 후로는 사냥개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임무에 충실해졌어요.”

“할아버지가 예상외로 엄격한 모양이네요. 정말로 한번 붙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

관리국의 고위직들이 무언가 숨기는 게 많단 건 눈치채고 있었다.

지금은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서 내버려두고 있지만, 언젠가는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다.

전요한이 말없이 눈을 빛내고 있자, 정서희가 주섬주섬 모은 생도복을 건넸다.

“그건 그렇고, 수업 안 들을 거예요? 오늘은 실전 평가를 위한 조별 모임이 있잖아요.”

“아차, 잊고 있었네요. 그럼 대충 옷만 걸쳐 입고….”

늦었다며 서두르려던 전요한은 위화감에 손짓을 멈췄다.

평소에 딱 사이즈가 맞는 셔츠인데 이상하게 작았다.

“생각해보니 체격이 커졌네.”

기존의 생도복을 더는 입지 못하는 상태였다.

예상치 못한 곤란함에 전요한이 무릎을 꿇었다.

“아침부터 운수가 사납네.”

아무래도 1교시 수업은 지각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

* * *

“대체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창밖을 내다보던 채린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실전 평가에 대비하기 위해 편성조원들이 전부 모여 있는 상황.

그런데 한 명이 도착하지 않아서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온갖 잘난 척은 다하더니, 정작 중요한 시기엔 내빼는군.”

삐딱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던 장태석이 부재중인 생도를 비꼬았다.

전요한.

모두가 행방을 궁금해 하는 생도는 다름 아닌 그였다.

“조금 기다려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바쁜 마음은 알겠지만, 각자의 개인 사정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하는 거니까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송주한이 너무 나무라지 말 것을 요청했다.

만년 우등생인 그의 입장에선 이런 일로 내부적인 단합이 깨지거나 하면 곤란했던 탓이다.

“흥, 교내에서 수석 좀 해봤다고 네가 우위일 거라 생각하지 마라. 실전 평가에서는 나보다 한참은 뒤처질 테니까.”

“뭐,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벌써부터 우열을 논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만.”

“시기상조이긴 무슨. 너 같은 안경잡이는 우두머리 몬스터가 나타나면 아무것도 못하고 질질 싸기만 할 거야.”

주위의 만류에도 장태석은 비난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보다 못한 채린이 눈을 치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학생이면 복학생답게 행동해주세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고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흐리는 건 좋지 않습니다.”

교내에선 혹한의 얼음공주라고 불리는 그녀였다.

주위가 일시에 조용해지자 장태석은 말없이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어이가 없다며, 얼굴을 가린 채 헛웃음을 터트린다.

“푸핫! 일 년 만에 돌아왔더니 웬 계집애가 군기를 잡고 있네!”

어두운 성장 환경 탓에 남존여비 사상을 갖고 있는 장태석이었다.

그는 뒤이어 일어서더니 채린의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듣자 하니, 동년배의 생도에게 학생회실에서 겁탈당할 뻔했다지?”

“……!”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어? 그런 치욕을 당하고도 당당하게 학생회장으로 활동할 수 있었을까?”

“크읏….”

약점을 공격당한 채린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장태석은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계속해서 모욕감을 주려 했다.

같은 3인방인 정하은과 송주한이 안 되겠다 싶어서 나서려 할 때였다.

덜컥.

교실의 문이 열리며 전요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채린을 괴롭히는 장태석을 보더니, 묻지도 않고 인정사정없이 발차기를 날렸다.

“으악!”

눈 깜짝할 새에 장태석의 안면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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