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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41화 (41/180)

제41화. 사전 준비 (5)

“당분간은 못 만날 것 같아. 내가 없더라도 수련은 게을리하지 마.”

전요한은 기초체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전에서 강대한 적과 맞부딪치면 가장 먼저 피부로 와 닿는 것이 육체적 한계다.

신체강화 계열의 이능력자라면 그 한계를 버텨내는 것에 더욱 신경 써야 했다.

“알겠어. 네가 던전 공략을 하는 동안 무언가 한 단계라도 성장해볼게.”

박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카데미에서 연수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은 이제 2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

전요한이 되돌아온 후엔 아마도 교정 밖에서 재회할 듯싶었다.

“잠시 헤어지는 김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격투 대련이라도 할래? 저번보다 좀 더 봐줄게.”

“아, 아니야. 됐어. 나 때문에 괜히 힘 빼지 마.”

당황한 박수호가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녀석이 정말 싫어하는 것 같아 보였기에, 전요한은 이번만 봐주기로 했다.

“괜히 이상한 데 돌아다니다 저번처럼 얻어맞지 마라. 신경 쓰기 귀찮아지니깐.”

“그때는 단순히 운이 나빴던 것뿐이야. 아무튼, 본격적으로 체력 단련하러 가볼게.”

박수호는 작별 인사를 한 후 실외 훈련장으로 달려갔다.

녀석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전요한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아직까진 관계가 진전되지 않은 모양이네.’

서창민의 운명 카드는 별이 하나 붙으면서 긍정적인 내용이 추가됐었다.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인 만큼, 이러한 점괘는 유심히 확인해두는 게 좋다.

[박수호]

방패를 든 하급 기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겠다는 순수한 열망만으로 당신의 곁을 지킵니다.

실력은 아직 형편없지만, 어디엔가 쓸모가 있을지 모릅니다.

‘관계가 진전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디에 써먹을지 확실히 정해줘야 하는 건가.’

하지만 아직은 단독 임무를 맡길 단계가 아니었다.

아카데미에서 알게 된 다른 생도들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기엔 여러모로 계기가 부족한 상태.

전혀 진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의미 부여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언가 기대하기엔 시기상조라고 판단한 전요한은 등을 돌렸다.

“뭐, 이제부터 시작인 셈 치자.”

누구든 기대치까지 성장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2차례의 환생을 거듭한 자신마저도 목표했던 성장치까지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다.

[전요한]

기본 성급 : ☆☆☆

보유 특성 : 환생자 (3회차)

종합 능력치 : 75 (+120)

특화 소질 : 성장가속, 마력재생, 절대면역, 미래시

보너스 스탯까지 합쳐도 200단위에 약간 미달하는 수치다.

일전에 상대했던 네크로맨서가 대략 260단위였음을 감안하면, 위기감이 느껴지는 게 당연했다.

‘지금까진 재치와 기백으로 어떻게든 승리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운도 제법 따라준 편이었다.

이능이 깃든 성유물을 골동품 가게에서 헐값에 구입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우연이 계속되리라 막연히 기대하면 곤란하다.

앞으로 상대해야 하는 녀석들은 모든 게 잘될 거란 안일함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전요한이 말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뭔가 말 못 할 근심거리라도 있는 건가요, 상급생 군?”

우연히 마주친 실비아가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그녀에게서도 미래시를 통해 운명카드가 보였으므로, 자연스레 시선이 집중되었다.

[실비아]

검을 든 귀부인.

상당히 적극적인 무력 행사로 당신에게 애정 공세를 가해옵니다.

일정 기간을 버텨낼 경우, 성장 면에서 흔치 않은 기회가 생깁니다.

예상대로 달리 변화는 없다.

전요한은 생글생글 웃는 실비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만간 실전 평가인데, 어떻게 던전 공략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실은 그곳에 상급생 군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교관 회의에서 결정된 일인 만큼 저도 따를 수밖에 없겠죠.”

실비아는 평소답지 않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여전히 웃는 낯이긴 하지만, 연보라색의 눈동자에서 애잔함이 묻어나온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수제자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였을까.

다른 생도들이 보았다면 놀랐을지도 모를 광경이었다.

“혹시 교관 회의에서 결정된 세부 내용을 좀 알려주실 수 있나요?”

“관리국의 지시를 따르는 대신, 생도들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받기로 했어요.”

악마형 던전에는 예외적으로 훈련교관이 2명이나 투입될 계획이었다.

사제 계열의 메르첼과 마법 계열의 유리안.

아쉽게도 실비아는 인원 제한 탓에 함께하지 못한다고 했다.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대신, 상급생 군에게 전력을 다한 검술 대련을 해주려고 해요.”

“전력이요?”

“네, 제자들을 너무 다치게 하면 곤란해서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던 기술이 있어요.”

실비아는 진심이었다.

예상치 못한 제의에 전요한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숨겨둔 실력이 있었던 건가.’

지금까지 일대일 대련은 여러 번 경험해왔다.

마검사 유형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다른 특이점은 못 느꼈는데.

문득 호기심이 생겨서 제의를 수락했다.

“좋아요. 대련장으로 갈까요?”

“네, 여기서 거리도 가까운 편이니까요.”

실비아가 흥얼거리며 먼저 앞장섰다.

전요한은 그녀를 따라 대격전이 벌어지게 될 장소로 향했다.

* * *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하는 늦은 오후였다.

아무도 없는 대련장에서 두 남녀는 서로 마주 본 채 서 있었다.

“상급생 군에게는 조금 이른 수준의 개인 수업이 될 거예요. 하지만 새롭게 깨닫는 건 분명 있을 거라 보장하죠.”

진심으로 덤빌 거라 예고한 실비아가 장검을 들어 올렸다.

이후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더니 다짜고짜 전요한에게 돌격해왔다.

티잉!

확실히 평소보다도 더 무자비해진 검격이었다.

힘을 빼지 않고 상대해주니 손이 조금씩 저려온다.

‘제법 싸울 맛 나는 결투가 되겠는걸?’

마음속에 기대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일전에 채강윤의 일격을 받아냈을 때와 비슷한 쾌감.

역시 강자와 맞붙어야 손맛이 제대로 느껴진다.

과연 얼마나 자신을 더 놀라게 해줄 수 있을지 궁금한 전요한이었다.

“실비아 교관님도 진심인 상태에서는 꽤나 하시네요.”

“그런 도발, 나쁘지 않아요. 상대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쪽이 유리해지니까요.”

몇 차례의 검격을 주고받던 실비아가 가볍게 윙크했다.

그녀는 잠시 뒤로 물러나더니 경고의 메시지를 건넸다.

“하지만 때로는 조롱 섞인 도발이 상대를 화나게 할 수도 있어요. 이후의 공세를 막아내려면 상급생 군도 전력을 다해야겠죠?”

딱히 열 받은 것 같진 않았다.

다만, 아까 보여 주겠다던 비장의 한 수가 날아올 것임은 분명하다.

전요한은 가만히 선 채, 경계를 풀지 않으며 실비아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폈다.

‘으음?’

섬뜩할 정도의 붉은빛이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아마도 미래시가 발동한 것 같은데, 이는 명백히 위험하단 걸 의미한다.

‘대체 무슨….’

곧 다가오게 될 위협 요소의 정체를 살피려던 때였다.

마치 환영처럼, 실비아의 등 뒤로부터 이형의 연보라색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

그 순간 전요한은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실비아가 말한 비장의 한 수라는 게, 대미궁에서는 「각성」이라고 불리는 상태라는 걸.

“하아아앗!”

에테르 날개를 펼친 실비아가 이전과는 다른 기세로 돌격해왔다.

그녀의 영혼처럼 연보라색으로 불타오르는 검신에서 위압감이 느껴진다.

“크윽!”

곤란해진 전요한은 여유를 거두고 전력으로 막아냈다.

「각성」의 위력은 현재 성장 수준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아찔한 위기감에 본능적으로 잠재력을 이끌어냈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카랑!

불협화음과 함께 아르티나로부터 찬란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마치 오로라처럼 다채로운 빛깔의 에테르.

눈부신 후광을 목격한 실비아가 황홀하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다.

“아름다워요. 그게 바로 상급생 군의 영혼이 지닌 색채군요.”

에테르는 정신체를 구성하는 상위원소란 의미에서 영력이라 불리기도 했다.

개인이 지닌 고유한 성향과 자질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형상화되는 기운.

상당한 경지에 오른 전사만이 그것을 이런 방식으로 발현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한 가지 깨우치게 되었네요, 아직은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장검을 맞댄 채 서 있던 전요한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대단해요. 저도 힘들게 체득한 건데 임기응변식으로 따라할 줄은.”

실비아는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고는 이번 대련은 끝났다며 흔쾌히 장검을 거두었다.

“정말로 위급한 상황에만 발현하도록 하세요. 한번 위력을 발휘한 이후엔 여러모로 부담이 크니까요.”

무리하게 「각성」을 한 탓인지 실비아는 잠시 비틀거렸다.

앨런 테일러와의 전투에서 함부로 보여주지 못한 것도 부작용에 가까운 후유증 때문일 터다.

전요한은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후 실비아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유감이지만 좀 힘드네요. 조금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상급생 군?”

기력을 소진한 실비아가 힘겹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 되면서까지 도움을 주려 했던 그녀에게 전요한은 고마움을 느꼈다.

‘정말 헌신적인 교관이네.’

자칫 잘못하면 큰 부상을 입을 뻔하긴 했다.

하지만 실비아의 교육 방식이 원래 그래 왔던 걸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었다.

‘새롭게 얻은 것도 있고.’

언제부터인가, 눈앞의 운명 카드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실비아]

검을 든 귀부인(★).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받아낸 당신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의 행동 원칙에 반하는 일이 아닌 한,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요구를 들어주려 할 것입니다.

유의미한 수준까지 관계가 진전된 결과, 운명 카드의 성급이 한 단계 올라간 것이다.

이로 인해 긍정적인 내용이 추가되었는데, 아카데미에선 도움이 제법 될 것 같았다.

‘이젠 개인적인 부탁도 조금 할 수 있겠는걸?’

그동안의 실비아 교관은 호감을 보이긴 했으나, 엄격해서 그런지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정으로 인정해주는 덕분에 사제 관계 이상이 된 기분이다.

흐뭇해진 전요한은 실비아를 부축하며 걸었다.

* * *

“전요한, 그 빌어먹을 놈.”

일과 시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장태석은 이를 악물었다.

안 그래도 건방진데 실비아 교관까지 일방적으로 편들어주다니.

기세등등하던 전요한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기회가 오면 반드시 혼쭐내 주겠어.’

개인 사정으로 1년간 휴학하는 동안 새로운 인맥을 만들었다.

지금쯤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장태석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떤 낌새도 없자 그는 다시 한번 투덜거리려 했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짜증나는 녀석….”

등 뒤에서 서늘한 무언가가 느껴진 건 바로 그때였다.

“미안하군요. 귀찮은 일을 조금 처리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낸 산호색 머리칼의 사내가 귀족처럼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안이 벙벙해진 장태석은 그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누, 누구시죠?”

“당신의 옛 친구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더는 활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대리인이니 앞으로 잘해보죠.”

라틴젤은 살갑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보였다.

장태석은 얼떨결에 고개를 숙인 후 이전의 「거래」를 재확인했다.

“며칠 후의 일을 도와드리면 정말로 제게도 권능을 내려주시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계획에 기여한 만큼 인정해주는 것이 저희의 원칙이거든요.”

라틴젤이 말하고 있는 계획은 얼마 전에 생겨난 던전 게이트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 너머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베르길리우스 후작령.

대미궁만큼은 아니지만, 후작답게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후작령을 거점으로 삼아 인근 일대를 잠식해 나간다면, 전요한도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릴 테지.

그렇게 생각하며 라틴젤은 장태석을 독려했다.

“모든 건 「운반책」인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던전 공략이 시작되는 날의 활약상을 기대하겠습니다.”

장태석은 게이트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하급 권속들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운반책」 덕분에 마계 영지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는 상태다.

무언가를 꾸미는 라틴젤의 흉악한 미소가 귀에 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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