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사전 준비 (4)
교내의 사격훈련실.
평소에는 아무도 없었을 시간대였지만, 한 생도가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이것도 재밌네.”
표적을 맞추는 데 열중이던 인물은 전요한이었다.
‘실전에서는 별로 써볼 기회가 없겠지만.’
대미궁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무기를 사용해본 적은 있었다.
이름이 마법공학 권총이었던가.
아무튼, 여긴 어디까지나 정신을 집중할 거리가 필요해서 온 거였다.
‘슬슬 던전 공략을 위한 조별 모임이 시작되겠군.’
누가 자신과 함께할지는 정서희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학생회장인 채린.
그녀와 함께 다니는 정하은, 송주한이 핵심 인원이다.
상급생 중에선 교내 성적이 우수한 이들만 선별한 셈.
하지만 그들도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될 것임은 명백했다.
“애초에 감당할 수 없어.”
전요한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미궁에 갇혀 지낸 25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확실하다.
어쩌면 관리국 국장, 유명학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테지.
그럼에도 그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같은 공략 계획을 강행했다.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피해는 최소화해야 한다.’
어젯밤처럼 다수의 인원을 매번 불러 모으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아직 성장치가 낮은 탓에 주위의 도움이 필요하여 불가피하게 세운 계획이었을 뿐.
언젠가는 피해자가 발생할 테고, 그로 인해 후회하는 걸 원치 않는다.
대미궁의 마지막 전투에서 소중한 동료들을 이미 많이 잃어버린 전요한이었다.
‘되도록이면 정예 인원만 추려서 데려가야겠지.’
예정된 편성조에서 나머지를 열외 시킬 방법은 생각해 두었다.
채강윤이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던전 게이트의 인근 일대는 이미 잠식당한 상태.
본격적인 공략 전에 죄악의 권속들과 전초전을 치러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일행에게는 만만치 않은 과제일 테니, 채린에게 맡겨두고 적당한 타이밍에 먼저 던전으로의 내부 진입을 시도할 계획이었다.
“후우.”
이것저것 생각하던 전요한은 총구를 내렸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니 단 한 발의 오차도 없이 전부 표적에 명중했다.
“과연, 아카데미 역사상 전무후무한 초단기 진급생답네.”
뒤편으로부터 누군가의 박수갈채가 들려왔다.
전요한은 특유의 껄렁한 목소리만으로 그 정체를 알아챘다.
“무슨 용무로 나타났냐, 서창민? 먼저 부르기 전엔 웬만하면 접근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너무 매몰차게 대하지 마. 나도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거니까.”
서창민의 표정엔 정말로 장난기가 하나도 없었다.
평소의 행실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전요한은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말해봐.”
“피의 속박을 풀어줬으면 해.”
서창민은 망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괜히 에둘러 설명하려다가 진심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예상대로 쌀쌀한 반응이었다.
게슴츠레해진 눈빛으로부터 살기마저 느껴졌지만 서창민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렇게 너를 적대해야 할 이유가 없더라고.”
“무슨 의미지?”
“사실 나는 주제에 맞지 않게 부와 권력을 지닌 놈들이 싫어. 잘난 척은 엄청 하는 주제에 위기상황에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니까.”
속마음을 털어놓던 서창민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다.
재벌가의 자제가 이런 말을 해봤자 아무도 공감해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달랐다.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었던 녀석이라면 분명 자신을 이해해줄 것이다.
“넌 그들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마주하던 전요한의 눈빛이 한결 누그러졌다.
서창민이 기대했던 대로, 그는 상대가 진심이란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오만했던 건 사실이야. 나야말로 진정으로 귀족에 걸맞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귀족이라.”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어. 내가 싫어했던 위선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지.”
“어떤 점에서?”
의외의 고백에 전요한은 점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서창민은 좀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결국엔 나 또한 그들이 물려받은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아등바등하게 될 테니까.”
정략결혼도 그 필사적인 수단의 일부였다.
원하지 않는 상대와 평생을 함께 지내야 한다는 건, 누구도 달갑게 여길 일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손발에 매인 무형의 족쇄.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부숴내기 위해서 서창민은 새로운 결심을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지금까지와는 분명 달라질 거야.”
“어떻게 변할 건데? 상속권이라도 포기할 거야?”
“그건 아니고, 가진 자의 품위에 맞게 행동하겠어. 언제나 약속을 지키고 나보다 약한 자들을 보호하려고.”
“흐음….”
전요한은 잠시 고민했다.
지난 일의 복수를 하기 위해 개과천선한 척하는 부류가 많이 있었던 탓이다.
물론, 서창민이 진심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가 변심할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했다.
‘마침 피의 구속을 걸어둘 녀석이 있긴 한데.’
자칫하면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으니 신중히 하는 편이 좋다.
적합한 인자가 부족한 탓에, 피의 구속을 여러 명이나 동시에 걸 수는 없으니까.
이제 겨우 교내의 사건들이 마무리되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나는 건 곤란했다.
전요한의 고민이 깊어져 가고 있을 때였다.
[서창민]
고귀한 잡배(★).
집안 배경이나 부유한 경제력 등으로 당신을 적극 지지해줄 수 있습니다.
한번 굴복시킨 덕분에 정신을 차린 모양이지만, 자주 관리를 해줘야 이상한 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호오.”
운명 카드의 내용이 바뀌었다.
앞면에 그려진 점괘가 고귀한 잡배인 건 동일한데, 별이 하나 생겨났다.
무언가 관계라도 진전되었다는 의미인 걸까?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현상이라 호기심이 생겨났다.
‘만약 별이 충분히 올라간다면, 운명 카드 자체가 승격될 수도 있겠는데?’
인간관계는 상황에 따라 역동적이니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이에 의하면, 미래의 가능성은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선택지에 따라 수시로 변동한다.
전요한은 미래시가 얼마나 특별한 능력인지 새삼 깨달았다.
“좋아, 풀어줄게. 대신 몇 가지 지켜줘야 할 사항들이 있어.”
“말만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어기지 않을게.”
약간의 신뢰를 인정받은 서창민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전요한이 대뜸 어깨동무를 하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첫 번째, 나중에 내가 돈이 좀 궁해지면 언제든지 빌려주라.”
“어, 얼마나?”
“무리하게 요구하진 않을게. 너의 능력 한도 내에서만 빌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 알았어.”
조금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서창민은 수락했다.
어차피 자금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최근 소동을 일으키는 악마들과 싸우기 위해서일 터.
그런 일이라면 귀족 계급에 해당하는 일원으로서 결코 외면하지 못했다.
“다음은 뭔데?”
“학사장이 무슨 수작을 부리거나 하면 곧바로 알려줘.”
“그건 어렵지 않아. 우리 가문은 아카데미의 재정 운영을 담당하는 이사회에 얽혀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조만간 나와 함께 깽판 좀 쳐줘야겠다.”
“깽판?”
서창민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그게, 너처럼 정략결혼을 강요받는 애가 있는데 내버려 두기 좀 그래서 말이지.”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오지랖을 떨 생각까진 없었다.
그런데 서창민의 운명 카드가 변화하는 걸 보고 나니, 문득 궁금증이 생겨났다.
녀석보다도 특별한 유형은 성급이 올라갔을 때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까?
‘여러모로 채린에게는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어.’
예전에 대미궁에서 만났던 예언자급의 점성술사도 내겐 기연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적당히 기회를 봐서 채린의 고민거리 하나를 줄여줄 생각이다.
일전에 채린에게서 빼앗아 읽어봤던, 굴욕적인 편지 내용을 떠올리며 전요한은 씨익 웃었다.
* * *
자연적인 정취가 묻어 나오는 관리국 내부의 휴양 공간.
수풀과 녹림이 우거진 흙길을 백발의 노인이 걷고 있었다.
그가 평소 애지중지 아끼는, 하나뿐인 손녀와 함께.
“할아버지가 일하는 직장에 이런 장소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손을 맞잡고 있던 손녀가 고개를 올려다봤다.
유다희.
평범한 여고생인 그녀는 관리국의 비밀에 대해 알지 못했다.
“허허, 바깥세상은 언제나 위험하단다. 저번처럼 좀비 사태가 발생하거나 하면 외출이 금지되니 그걸 대비한 것이지.”
유명학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라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러고는 나무 사이로 모습을 비춘 다람쥐를 가리켜 보였다.
“요즘엔 직접 보기가 힘들지? 환경오염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서 안타깝구나.”
어쩌다 가끔 지나가는 작은 짐승 외에 다른 생물체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본래 고위급 인사 외엔 출입 금지 구역인 탓이었다.
“할아버지는 왜 악마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지 않는 거예요?”
잠시 말이 없던 유다희가 이전부터 품고 있던 의문을 표출했다.
이로 인해 유명학의 표정에 살짝 그늘이 드리워졌지만, 이내 다시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예전에 어떤 현자가 이런 말을 남겼단다. 심연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라.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니.”
괴물에 너무 오래 맞서 싸운 이는 그 자신도 괴물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유명학은 자신의 손녀를 가능한 죄악으로부터 멀리 두고 싶어 했다.
이능력을 개화하지 못한 그녀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어두운 진실이었으므로.
‘처음엔 거부 반응이 심하지만, 적응하는 순간부터 서서히 내면을 잠식하고 말지.’
대미궁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전요한에게도 그런 면이 조금 엿보였다.
용케 올곧은 심성을 유지해 왔지만, 갈수록 무미건조해지고 인간성이 결여되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상식을 넘어선 존재들을 상대로 버텨내지 못할 테니까.
“무슨 생각 해요, 할아버지?”
“예전에 읽었던 고서의 이야기를 되짚어보고 있었단다.”
“그게 어떤 내용인데요?”
“마왕을 쓰러뜨리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떠난 용사가 주인공이었지.”
오랜 여정 끝에 최종적인 목표를 이뤄낸 용사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피와 시체로 얼룩진 전장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허탈해진 용사가 공백 상태인 마왕성의 권좌가 있는 계단으로 오르고 있을 때였다.
호화로운 장식으로 거치된 유리 거울에 어떤 형상이 비쳤고, 용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마주한 존재는 얼마 전에 쓰러뜨린 마왕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마왕이 탄생하게 되었단다.”
“그게 오랜 여정의 결말이에요? 너무 충격적이에요.”
“이후의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전해지지 않는단다. 네 생각에는 어떻게 되었을 것 같니?”
유명학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손녀를 내려다봤다.
그 눈빛이 그윽했기에, 유다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신중하게 답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새로운 마왕은 다음 용사가 자신처럼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손을 써뒀을 것 같아요.”
“재미있구나. 어떤 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동화 따위로 만들어서 널리 퍼트린 다음, 다음 용사에게 그 진실을 알려주지 않을까요?”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더 늦어버리기 전에.
유다희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내놓자 유명학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그럴 법하구나.”
악마형의 던전에서 한번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던 탓일까.
자신의 손녀는 무언가 자신이 알던 것보다 조금 성장해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쳐버린 용사가 마왕이 되는 악순환을 막는 방법에 대해서요.”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르질 않는구나. 70년이 넘도록 살아온 나마저도.”
자신이 졌다면서 유명학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어떠한 희망으로도 씻기지 않는 의문을 여전히 남겨놓고 있었다.
‘전요한, 그가 과연 모든 걸 내쳐야 하는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의 자질을 지닌 「용사」인지는 계속 지켜볼 일이었다.
유명학은 자신의 손녀를 독려한 후, 다시 산책길에 나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