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사전 준비 (3)
금방이라도 싸움이 날 것만 같이 험악한 분위기였다.
누구도 말리지 못할 것처럼 보였지만, 한 존재의 등장으로 금방 무마되었다.
“학내에서 다투면 어떤 벌칙을 받는지 잘 알고 계시겠죠~?”
특유의 교태로운 목소리.
상냥하게 웃는 낯의 뒤편에서 살벌할 정도의 연보라색 기운이 느껴진다.
“크윽…!”
실비아 교관의 등장을 확인한 장태석이 곧바로 주먹을 내렸다.
표정이 심각하게 굳고 동공이 떨리는 모습으로부터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엿볼 수 있었다.
“쟤가 먼저 시비를 걸었어요. 저는 별말 안 하고 가만히 있었을 뿐입니다.”
이때다 싶어서 전요한은 곧바로 무고함을 주장했다.
그러자 실비아는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갑작스레 두 학년이나 진급하게 되면 다양한 트러블이 생겨나지요. 동급생 간의 관계 형성에도 시간이 걸리고요.”
애초부터 전요한을 나무랄 생각 따윈 없었던 듯했다.
조금 억울해진 마음에 장태석은 이의를 제기하려 했다.
“저 녀석에게도 잘못은 있습니다! 태도가 오만불손했고 꼬우면 덤벼보란 식으로….”
“복학생 군, 1년이나 앞선 기수의 선배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하세요.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모함을 하는 건 평판에 좋지 않으니까요~?”
실비아 교관이 그만하라는 듯이 눈치를 주었다.
그녀에게서 다시 한번 살벌한 연보라색 기운이 느껴지자, 장태석은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
“죄, 죄송합니다! 수업 준비를 해야 해서 이만 가볼게요!”
왕년에 한 가닥 하던 우등생조차 감히 기어오르지 못하는 상대였다.
잔학교성.
신입생 시절부터 혹독한 대련을 강요받아 왔을 테니, 그녀를 이만큼이나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교관님. 하마터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뻔했어요.”
장태석이 다급히 자리를 피하자 전요한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역시, 실비아에게 계속 잘 보이는 편이 여러모로 좋다.
“곤란한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해요, 상급생 군. 담당 교관으로서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주위에서 보는 눈이 많았음에도, 실비아는 전요한의 편임을 과시했다.
그만큼 사제지간으로서의 애정이 깊다는 의미.
그녀가 이 정도로 호감을 갖고 챙겨주는 상대는 교내에선 매우 드물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의 이목을 잘도 끄네?”
실비아가 몰려든 인파를 헤치고 사라지자, 함께 구경 중이던 채린이 다가왔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 화가 난 표정이었다.
“무슨 문제 있어?”
“어젯밤의 일. 왜 나에게는 이야기해주지 않은 거야?”
학생회장으로서 전혀 모르고 있었단 게 창피한 모양이었다.
매사에 성실한 채린은 책임감도 강하고, 뒤처지는 것도 싫어했다.
“네 오빠의 부탁 때문이었어. 되도록 위험에 노출시키지 말아 달라던데?”
“…잠깐 이야기 좀 해.”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채린이 소매를 붙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앞장서서 모여든 인파를 빠져나갔다.
“곧 수업인데, 괜찮겠어?”
“어차피 곧 공강이 될 예정이야. 교관들은 전부 교무실에 모여서 회의를 할 계획이니까.”
어젯밤의 일을 비롯해서, 관리국이 일임한 던전 공략 문제로 입씨름을 할 예정이라 한다.
채린을 뒤따르며 전요한은 대략적인 광경을 상상해봤다.
“율리안 교관은 생도들이 악마형의 던전을 공략하는 것에 반대하겠지?”
“실비아 교관도야. 평소에 엄격하긴 하지만, 제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같으니까.”
대부분의 교관들이 관리국의 지침에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일생을 후기지수의 양성에 바치는 입장이다 보니, 이 같은 분위기는 당연했다.
“하지만 결국엔 받아들일 거지? 달리 선택지가 없잖아.”
“아마도. 최대한 안전을 확보하는 쪽으로 절충안을 내걸 생각인 것 같아.”
학생회장인 채린은 다른 생도들보다 한발 앞서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그녀는 다른 생도들이 없는 곳에서 잠시 멈춰 섰다.
장미 넝쿨이 자라는 정원.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면 언제나 찾아왔던 장소였다.
* * *
“그건 그렇고, 우리 한 가지만 확실히 했으면 해.”
운을 띄우며 분위기를 잡으려는 것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중요해 보였다.
“뭔데?”
“앞으로는 곤란해질 일들과 관련해서 무엇보다 내 의사를 가장 우선시해줘.”
채린은 자신의 의지를 전하려는 것처럼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주위에서 말리더라도 책임감이 느껴지면 위험을 무릅쓰겠단 거야?”
“짐짝처럼 여겨지는 건 이제 싫어. 나도 무언가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동안 노력해온 거라고.”
체력적으로 연약했던 채린이 가장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능력이었다.
전 세계의 인구 중에서 단 0.01%만이 부여받는 소질.
그 잠재력에 눈을 떴을 때, 채린은 이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 의사를 존중해줘.”
“만약 네가 발목을 잡는다면? 그때도 나더러 달리는 속도를 맞춰달라고 요청할 거야?”
정원의 울타리에 기대어 있던 전요한이 눈을 뜨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
그로서는 채린의 진심에 진심으로서 응하는 것이었다.
“발목을 잡는다고…?”
예상치 못한 가능성에 채린이 순간 머뭇거렸다.
입학 이후로 줄곧 우등생이었던 자신이 뒤처진단 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저번에 천강우에게도 당할 뻔했잖아? 전투 공간이 협소했단 점을 감안해도 지나친 완패였어.”
“그, 그건 녀석이 비겁하게…!”
“너뿐만이 아니야. 네 오빠도 지난 전투에서 여러 번이나 죽을 뻔했어.”
“오빠가…?”
채린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친오빠는 관리국의 최고전력이라 불려왔던 탓이다.
사냥개, 채강윤.
국내 서열 1위의 이능력자일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재해들을 앞장서서 해결한 일등공신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을 생사의 기로에 섰었다고?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도중에 개입해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네 오빠는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했을 거다.”
충격받을까 봐 일부러 생략했던 것들을 이야기해 줬다.
외곽지역의 슬럼가에서 네크로맨서가 채강윤을 일격에 빈사 상태로 만들었던 일.
어젯밤에 폭주한 앨런 테일러가 교정을 포함한 아카데미 전체를 날려버리려 했던 일.
일반 생도들은 모르고 있던 사실에 채린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노련한 관리국 요원들마저도 감당하지 못할 사건이야. 만약 이 사실이 외부적으로 알려지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나겠지.”
관리국에서 필사적으로 죄악의 존재를 은폐하려는 이유였다.
전요한이 설명을 마치자, 채린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 나는 어떻게 해야….”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정략결혼을 강요받는 그녀에게 있어, 이능력자로서의 가능성은 유일하게 개척해나갈 수 있는 미래.
그마저도 역량 부족이라 여겨지면 절망감이 공허한 마음을 잠식하기 마련이었다.
“좌절감이 들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있는 거잖아?”
손을 내민 전요한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신있다는 듯한 그 모습에 채린은 멍하니 올려다봤다.
“너 혼자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무언가 특출난 재능이 있단 건 알겠지만….”
자신의 오빠마저 참패하는 전투에서 같은 동급생이 활약할 거라 기대하기 어렵다.
암울한 표정을 짓는 채린.
그녀에겐 새로운 희망이 필요해 보였다.
“실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가 있어. 그게 뭔지는 아직 말해줄 수 없지만.”
채린을 신뢰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알게 된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 일들이다.
하지만 만약 상황이 변하면 반드시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해줄 것이다.
‘왜냐하면, 너의 운명 카드는 좀 특별하니까.’
전요한은 채린에게서 보이는 미래시를 다시 한번 눈으로 훑어보았다.
[채린]
잠자는 숲속의 마녀.
곤경에 빠진 상태여서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녀를 구원하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나중에 마음을 얻고 나면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줍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미리 투자해둬서 나쁠 건 없어.’
지금까지의 미래시는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전요한은 채린이 당장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해도 완전히 내치진 않을 생각이었다.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야, 넌? 관리국조차 어떻게 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상대로.”
채린은 여전히 자신이 내민 손을 바라만 보는 상태였다.
“그야, 내게는 일상이었으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것이.”
대미궁의 수많은 층계를 돌파해 나가면서 생겨난 기백이다.
이런 시련 따위는 예전의 동료들이 없이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
전요한이 지난 무용담을 들려주자 채린은 서서히 손을 뻗었다.
“너를 믿을게. 이젠 응석부리지 않을 테니 앞으로도 부탁해.”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게 많지만,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갔다.
아니, 단순히 믿고 싶었다.
눈앞의 사내가 자신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 사람」이란 것을.
‘부디 나를 구해줘. 혼자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게 된 이 상황 속에서.’
누구와도 거리를 두고 지냈지만, 한편으로는 의지하고 싶었다.
그러다 위기의 순간, 우연히 한번 구원받았을 때 마음속으로 느꼈다.
아직 세상엔 이렇게 기댈 만한 존재가 남아있다는 걸.
“응석을 부려도 좋아. 하지만 너무 바짝 뒤따라오려 하지는 마. 나는 앞으로 누구보다도 강해질 테니까.”
말을 마친 전요한이 씨익 하고 웃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손이 서로 맞닿으며, 정원의 분위기에 묘한 반향을 일으켰다.
* * *
“결국 그 딸 바보 녀석도 실패하고 말았구나.”
권좌에 앉아 수정구를 바라보던 스반힐트는 탄식했다.
자신이 내세운 권속들이 하나씩 쓰러져가고 있다.
지구의 여신이 모든 판돈을 내건, 단 하나의 체스말에 의해.
“앨런 테일러는 본래 결함이 있는 자였습니다. 인간이었던 시절의 집착도 완전히 버리지 못했었고요.”
스반힐트의 앞에 무릎 꿇고 있던 사내가 말했다.
겉보기에 마치 고고학자처럼 보이는데, 어투에서도 지적인 분위기가 묻어나왔다.
“아무튼, 네가 그의 역할을 대신해 줘야겠다. 얼마 전에 보낸 베르길리우스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피해가 커진 만큼 확실히 해야겠지.”
이보다도 더 손실이 생겨나면, 나중에 치르게 될 서열전이 문제를 겪게 된다.
서열전은 분쟁이 일어난 후에 양쪽의 충분한 준비 기간이 주어지는 만큼, 시간이 걸렸다.
“맡겨만 주십시오. 놈들의 배후를 확실히 교란하겠습니다.”
“전요한을 상대할 때는 항상 주의해라, 라틴젤. 지구의 여신이 놈에게 어떤 은총을 내렸는지 모르겠으니까.”
스반힐트는 여태까지 겪어보지 못한 형태의 권능에 대해 거듭 경고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주인님. 그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함정에 빠지도록 손을 써보지요.”
비릿한 웃음과 함께 라틴젤은 자취를 감췄다.
비어버린 알현실에서 스반힐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숨어 있는지 보자, 시스티나.”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최초의 신족이었다.
서열 경쟁을 좋아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최하위 서열에 머물렀던 창세기의 여신.
반드시 그녀를 굴복시키겠다고 생각하며 스반힐트는 붉은 눈을 치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