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사전 준비 (2)
앨런 테일러가 사멸한 다음 날.
평온을 되찾은 교정에는 아침부터 괴담이 떠돌았다.
“어젯밤에 마수처럼 험악하게 생긴 악마가 나타났었대.”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악령도 있었다는데?”
“H반의 상급생 강현석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 나쁜 짓을 저지를 뻔했다나.”
“그러면 저번에 난리를 피운 한동혁하고 천강우도 그 악마가 꼬드겼던 거야?”
“무서워서 밤중에 돌아다니겠어? 이러다가 목이 없는 기사까지 출몰하는 건지 몰라.”
괴담의 내용은 사실과 다소 다른 점이 많았다.
죄악의 세력에 대한 정보는 관리국에서 최대한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한 탓이었다.
그래서 사건의 진상은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고, 무수한 의문만이 떠돌아다녔다.
“그래도 다행히 별일 없이 해결되었네요. 앨런 테일러의 최후가 조금 안타깝긴 했지만요.”
옆에서 교정을 걷던 정서희가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지난밤의 일을 되짚어 보다가 한 가지 걸리는 점을 언급했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겠어요? 메르첼 교관에게서 빌린 펜던트, 완전히 소실되었잖아요.”
전투가 끝나자 펜던트는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그 안에 깃든 성녀의 가호를 한계치까지 끌어낸 탓이었다.
“일전에 면죄부를 받아서 괜찮습니다. 그녀도 대의를 위해 희생한 셈 친다고 했어요.”
만약 펜던트를 무리하게 사용하지 않았다면, 앨런 테일러의 암흑 마법이 아카데미를 파괴했을 것이다.
그리고 따지자면 전혀 수확이 없지만도 않았다.
전리품으로 획득했던 흑진주를 꺼내서 만지작거리자, 정서희가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골동품 상점에서 비싸게 샀던 붉은 보석만큼의 가치가 있다면서요?”
“네, 나름의 위계가 있는 마족은 사멸할 때 이런 환요석을 남기죠.”
예로부터 전해지는 격언 중에, 용족은 죽어서 비늘을 남기고 마족은 죽어서 환요석을 남긴다고 했다.
어느 쪽이든 현세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터.
그 가치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자는 전요한뿐이었다.
“개인적으로 그 환요석에 관심이 가네요. 마법사로서의 능력을 발현하는 데 도움이 될 거 같아요.”
“뭐, 그만한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죠.”
“저에게만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관리국에는 보고 안 할게요.”
“그렇게 궁금해요? 사실 이건 상위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없으면 단순한 돌덩어리에 불과해요.”
일반적인 성유물처럼, 손대거나 마력을 부여한다고 해서 이능이 발현되는 유형은 아니다.
하급 악마가 사멸하면서 남긴 잔재.
복잡한 마법술식이 뒷받침된다면 마족의 권능을 잠시 빌리는 매개체로 활용할 수 있었다.
‘여차하면 고등급 장비 제작 재료로 써먹는 것도 가능하지.’
물론, 어느 쪽이든 관련 전문가가 있어야 했다.
아쉽게도 그만한 실력을 갖춘 마법사나 대장장이는 주위에 없는 상황이다.
전요한은 한숨을 내쉬며 흑진주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실시하는 실전평가 말인데요. 요한 씨와 함께 던전 공략을 하게 될 조원이 정해진 것 같아요.”
학사 본관으로 들어서면서 정서희가 속삭였다.
관리국이 존재사실을 은폐 중이라는 악마형의 던전 게이트.
그 내부로 진입하게 될 상급생들이 선별되었다는 말에 전요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명단이 어떻게 되죠?”
“주요인물은 학생회장인 채린. 그녀의 친구들인 정하은, 송주한이에요. 아아, A반의 장태석도 있네요.”
“장태석?”
“네, 아무래도 학내 평가와 평균 성적이 주된 선별 기준이 되었어요.”
장태석은 개인 사정으로 1년간 휴학했다가 이번에 되돌아온 우등생이었다.
헌데 그 개인 사정이란 것이 뭔지는 학사장 이외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한번 알아볼 필요성은 있겠군요. 함께 던전 공략을 해야 하는 입장이니 수상한 녀석일 가능성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관리국에 정보 공유를 요청했어요. 조만간 열람 관련 자료가 도착할 것 같네요.”
정서희는 자신에게 맡겨달란 듯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두 사람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어제의 활약은 인상 깊게 보았다, 진급생.”
우연히 마주친 율리안 교관이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일전에 그와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지만, 전요한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별말씀을.”
“네 덕에 영혼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착한 아이였던 유나라면 분명 평온한 곳에 가서 안식을 얻었겠지.”
중얼거리듯 말한 후 율리안은 곧바로 옆을 지나쳤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전요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유나?”
“예전 기수의 우등생 중에 한유나라고 하는 수제자가 있었대요. 사교적인 성격이라 학생회장까지 했다는데, 던전 공략을 진행하다가 그만 목숨을 잃었다네요.”
해당 던전의 유형은 악마형이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그 위험성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발생했던 비극.
하지만 전요한은 이를 관리국의 만행이라 생각했다.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유형의 던전 공략을 왜 자꾸 미숙한 생도들에게 맡기는 거지?’
정예요원들을 몇 명 붙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관리국은 최고의 인재를 양성하고 싶은 것일까?
자칫하면 득보다 실이 많아서 무언가 꿍꿍이가 있진 않나 의심이 갔다.
“혹시 무리한 시도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신유형의 던전에 매번 아카데미의 우등생들을 투입시키는 것이요.”
전요한의 어두워진 표정을 바라보던 정서희가 본심을 물었다.
숨길 필요가 없다 판단한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실패한 사례가 있는데도 또다시 강행하는 의중을 모르겠습니다.”
“그때와는 조금 사정이 다른 것 같아요. 당시엔 위험 요소를 간과한 채 투입시켰다가 변을 당한 거고…”
“이번에는 그만한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얻어야 할 게 있단 건가요?”
계단의 난간에 기대어 있던 전요한이 정곡을 찔렀다.
정서희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요. 선배는 국장님이 요한 씨의 빠른 성장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외에도 중요한 목적이 있는 것 같아요.”
“다른 목적이라. 어쩌면 상위 존재와의 접촉일 수도 있겠군요.”
대미궁에 오랫동안 갇혀 지냈던 전요한으로선 감이 오는 게 있었다.
관리국 국장, 유명학이라면 마계의 일곱 죄악을 비롯한 상위 차원의 권능자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가능하다면 새로운 범주의 이능까지 얻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할 테지.
유명학의 전용무기인 성검 알타니스도 무언가 얻게 된 배경이 있을 것 같았다.
“어떠한 계기로 관리국 국장은 상위존재와의 접촉에 먼저 성공한 게 아닐까요? 죄악의 세력과는 정반대의 이해관계를 지닌, 신족이나 천사일 수도 있겠네요.”
“천사라니,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해요? 믿기 어렵네요.”
정서희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여태까지 초월적인 존재를 목격한 사례가 없었다.
얼마 전에 소동을 일으킨 네크로맨서도, 하급 악마도 미궁 형태의 던전에서 튀어나온 부산물에 불과할 뿐.
하나의 세계라고 부를 만한 상위 차원이 존재하고, 군림하는 지배자까지 있단 사실은 기존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내용이다.
‘생각해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인데, 이미 머릿속에 형성된 고정관념이 발목을 잡는군.’
전요한은 상위 존재에 대한 건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어려서부터 판타지 소설을 섭렵한 강기태와 달리, 대부분의 이능력자들은 던전을 중심으로 하는 위협요소만 인지하고 있다.
“뭐, 저도 직접 만나 본 적은 드무니까요. 질서를 관장하는 여신, 아리안델이라든가 하는 존재는 대미궁에 있던 엘프들로부터 듣기만 했습니다.”
“아무튼, 저는 학사장을 만나러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또 이야기해요.”
고개를 끄덕인 정서희가 반대편의 계단 쪽으로 갈라졌다.
그녀는 어젯밤의 소동과 관련하여 학사장에게 볼일이 있다고 했다.
전요한은 손을 흔들어 보인 후, 상급생의 반들이 열 지어 있는 복도를 걸었다.
* * *
교실에 다다랐을 무렵, 그의 앞으로 익숙한 동급생이 나타났다.
“듣기로 이번에도 한 건 제대로 했다면서?”
교내의 정보망 역할을 맡고 있는 정하은이었다.
“덕분에 골칫거리를 해결할 수 있었어. 그런데 강기태는 어떻게 됐어?”
녀석은 앨런에 의해 마수화하여 교내의 인물들과 맞서 싸운 결과,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마기에 잠식되어 의식마저 잃은 상태였으므로 본인으로선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
“간호실에서의 진찰 결과로는 생명엔 지장이 없대. 하지만 마수화로 인해 기괴해진 육체를 원상회복하는 건 어렵다나 봐.”
헌터 아카데미의 부속병원에서는 제대로 된 치료가 힘들다고 했다.
한밤중에 관리국의 특수시설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처음 전해 듣는 내용이었다.
‘역시 미래시는 틀리지 않았군.’
기분 나쁠 정도로 신경 쓰였던 잿빛의 어둑한 기운이었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는데 그대로 적중하고 말았다.
“왜 그래? 강기태가 영원히 되돌아오지 못할까봐 신경 쓰여?”
잠시 말이 없는 전요한을 향해 정하은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것도 아냐. 신경 쓰지 마.”
전요한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미래시에 대한 내용은 외부적으로 알려지면 곤란하다.
아직 관리국을 완전히 신뢰하기도 어렵고, 귀찮은 부탁도 자주 받을 것 같다.
교내의 성유물 도난 사건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충분히 주위의 이목을 끌고 있다.’
복도를 지나는 생도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들리지 않게 속삭이는 모습을 봤다.
확실히, 자신은 현재 전교생들의 관심 대상.
훈련교관들도 예의주시하는 마당에, 특수능력을 보유한 것까지 알려지면 골치 아파질 터였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문자 보낼 테니까 확인 잘해.”
고개를 갸웃하던 정하은이 자신의 교실로 후다닥 달려갔다.
전요한은 매사에 허둥지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 녀석도 갑작스레 사고에 휩쓸리지 말아야 할 텐데.’
운명 카드의 내용을 다시 보니 걱정이 앞섰다.
[정하은]
교내의 사립탐정.
적당한 대가를 치르면 당신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하지만 호기심이 너무 많은 게 탈이므로, 갑작스레 변을 당하진 않는지 늘 지켜봐야 합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격언이 있었던가.
적절한 인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비해둘 필요성을 느꼈다.
학내생활에 도움을 주는 존재인 만큼 적당히 뒤를 봐주는 게 딱히 오지랖은 아니다.
‘율리안 교관에게 특별히 부탁을 해둬야겠어.’
앨런 테일러를 함께 쓰러뜨린 이후로, 그와의 관계는 상당히 나아진 느낌이었다.
자신이 골칫거리가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는 사건의 해결사에 가깝다는 걸 깨달은 탓이겠지.
생각을 마친 전요한이 몸을 돌려 교실로 향하려던 때였다.
“네가 소문의 그 전요한이냐?”
싸늘한 인상의 한 생도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장태석.
개인 사정으로 1년간 휴학했다가 되돌아왔다는 우등생이었다.
“그런데, 왜?”
“얼마나 잘났는진 모르겠지만, 계속 지켜보고 있겠다. 실수라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야.”
자신만만한 표정의 장태석은 대뜸 시비부터 걸어왔다.
우등생이라고 하길래 모범적인 줄 알았는데, 그와는 정반대의 기질도 가지고 있다.
전요한은 단정치 못하게 입은 녀석의 생도복 차림을 훑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걸?”
“뭐야?”
“까불다간 뒤지게 처맞는다. 뭐, 궁금하면 주먹이라도 한번 날려보든지 해.”
이런 식의 기 싸움에서 순순히 져줄 전요한이 아니었다.
그가 팽팽하게 눈싸움을 걸어오자 장태석은 화가 났는지 눈을 부라렸다.
“이 자식이!”
다부진 주먹이 한 차례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