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사전 준비 (1)
“예전부터 생각해왔어. 내가 만약 병약해서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아빠도 나쁜 짓을 하지 못했을 텐데, 하고.”
에밀리는 처음 등장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앨런이 죄악에게 영혼을 팔고 하급 마족으로 전락해버린 것에 책임감을 느끼는 까닭이었다.
“그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서 나중에 다시 불러달라 한 거야?”
전요한은 확인하듯 물었다.
처음부터 눈앞의 어린 계집애를 이용할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본인의 의사는 존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막무가내로 몰아세우며 선택을 강요하면, 죄악의 세력과 다를 바가 없다.
“으응. 오빠가 언젠가는 약속을 지켜줄 거라 믿었어. 왜냐하면 예전의 우리 아빠와 눈빛이 비슷했으니까.”
영혼 세계로 승천했던 에밀리가 부름에 응답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바로 자신의 친부인 앨런이 더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
나아가서는 타락해버린 그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나에게 맡겨. 적어도 저 녀석이 악행을 계속하는 것만큼은 막아줄게.”
고개를 끄덕인 전요한이 앞으로 나섰다.
이제는 완전히 각성한 앨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린 나이에 불쌍하게 죽어버린 딸까지 꼬드기다니. 어느 쪽이 악마인 건지 분간이 안 가는군요.”
앨런은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애지중지하던 딸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자신을 쓰러트릴 도구쯤으로만 취급한다 여긴 탓이었다.
어떻게 보면 역효과가 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만해요, 아빠. 무고한 사람들을 얼마나 더 많이 불행하게 만들려고 그러세요?”
에밀리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간청했다.
생전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은 그녀를 보며 앨런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전부 너를 위해서였단다. 만약 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어.”
침착함을 유지하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를 써본다.
하지만 승천한 딸의 외침은 마음속의 고민을 더욱 커지게 할 뿐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지금까지의 죄를 회개하고 그 대가를 치른다면, 아빠도 분명 구원받을 수 있을 거예요!”
“…구원이라.”
앨런은 자조하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 터무니없는 것을 바란 적은 한 번도 없다.
질투의 죄악에게 영혼을 판 이후엔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자 했다.
안타깝게 병사한 딸을 살리고자 하는 부성애를 제외하고는.
그런데 이제 그 부성애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함께 있었을 때보다도 행복해 보이는 딸이 눈앞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라고.
헛된 망상을 포기하고 지난 과거를 되돌아봐야 할 때라고.
“확실히, 나는 그 무엇도 구원하지 못했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딸의 마음조차 알지 못했다.
자신이 집착했던 것은 잃어버렸던 혈육에 대한 갈망.
더는 허락되지 않은 것을 소유하려는 질투심이 순수한 마음을 가리고 악행으로 이끌었다.
여태까지 저질러왔던 과오를 전부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러분은 전부 내가 눈을 감을 때의 길동무로 삼겠습니다.”
고개를 든 앨런이 핏빛처럼 붉은 두 눈을 번뜩였다.
그가 망설임을 그만두자, 옆에 있던 메르첼이 전요한에게 속삭였다.
“대체 무슨 심산이죠?”
“하급 마족으로서 명예로운 최후를 맞이하려는 겁니다.”
전요한은 앨런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대미궁에서 조우했던 모든 마족들이 그러했다.
최후의 순간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눈앞의 적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단순한 명예심이 아니라, 마족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이었다.
“마족의 죽음은 인간과는 다릅니다. 그들이 지녔던 마기는 본래의 혼돈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태어나는 마족의 일부가 되죠.”
구심점을 잃고 흩어져버릴 마기에 자신의 기억을 남기는 것.
그 각인 작업이 제대로 완수된다면 마족의 의지는 후대에 이르기까지 계승된다.
그렇기에 앨런은 이대로 자신의 딸 앞에 무릎 꿇을 수 없었다.
인간이었던 시절은 마족으로서 지내왔던 세월에 비하면 찰나일 뿐.
귀족의 서열에 기댄 긍지마저 포기한다면 앨런에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터였다.
“덤비시지요. 안 그러면 한 명씩 제대로 숨통을 끊어 드리겠습니다.”
마수화한 앨런이 한 발짝 앞으로 걸어왔다.
그와 동시에 일행 전원은 숨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마치 중력이 수백 배는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은 기분.
평소보다 움직임도 조금 느려졌고, 정신력이 약한 이들은 현기증 때문에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으헉!”
가장 먼저 쓰러진 건 최하의 종합 능력치를 보유한 박수호였다.
그와 한참동안 대치 중이던 강현석은 이때다 싶어 달아나려 했다.
“지, 지금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가 안주할 곳은 없었다.
얼마 전부터 주시하던 율리안이 순식간에 배후까지 따라잡은 것이다.
“틀려먹은 제자로군. 전투 도중에 누가 함부로 등을 보이라고 했지?”
곧이어 푸른 불꽃이 강현석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커헉!”
강현석은 비명을 내지르며 간단히 제압당했다.
한편, 다시 일어서려 하던 강기태도 실비아의 검격에 나가떨어졌다.
“흉측하게 변해버리긴 했지만, 숨통은 끊지 않을게요.”
두 교관의 활약으로 꼭두각시 역할을 하던 생도들은 전투에서 동시 퇴장했다.
남은 건 모두를 극한까지 몰아세우는 앨런 테일러뿐.
상황을 걷잡기 어려워지기 전에 제압해야 했지만, 서창민은 쉽사리 활시위를 당길 수 없었다.
‘어, 어지러워서 손가락에 힘이 안 들어가….’
하급 마족이 본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이만한 압박감이라니.
종합 능력치가 형편없이 낮은 일반인들은 전부 혼절해 버렸을 터였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큰일 나겠어요. 어서 포지션부터 재정비하죠.”
상대적으로 멀쩡한 편에 속하는 메르첼이 선공을 제의했다.
배후에 있던 정서희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화력을 지원할게요.”
화염 계열의 마법사로서 그녀는 전열에 있는 동료를 도울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화염 장벽을 세워서 적의 퇴로를 막는 것도 가능하다.
‘최선을 다할 거야.’
앞쪽에 서 있는 전요한이 잘 부탁한다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물론, 지나치게 무리를 할 생각까진 없었다.
얼마 전에 찾아왔던 선배가 절대 죽지 말라고 했다.
식비로 써먹어야 하는 사례금도 아직 많이 남아 있고 말이다.
‘목숨 걸고 국장님의 손녀를 구해내서 받아낸 건데, 당연히 전부 사용해야지!’
김치찌개든, 등갈비찜이든 닥치는 대로 배달시켜 먹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다음 배달 음식의 메뉴를 정한 정서희는 앨런을 향해 거센 불꽃 송이를 날렸다.
화르르륵!
그것은 모두가 전투에 본격적으로 임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최대한 묶어 두겠어요!”
한쪽에서는 메르첼이 신성 마법으로 구속하려 했고,
“허점투성이군!”
반대편에서는 율리안이 상위의 공격 마법으로 빈틈을 노렸다.
배후에서의 화력 지원에 힘입어, 전열에 있던 이들도 동시에 일격을 시도했다.
“이제야 좀 제대로 싸우는 느낌이 나네요.”
선두에서 돌진하던 전요한이 흘끗 옆을 돌아봤다.
수많은 시련을 넘겨낸 고인물답게 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만끽하는 표정.
뒤따르는 실비아가 웃음으로 화답했다.
“전투 도중에는 다른 데 시선을 팔면 안 돼요, 상급생 군.”
실전에서는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교관이었다.
채강윤조차 맞는 말이라는 듯 침묵하자 전요한은 재미없단 표정을 지었다.
“아아, 빨리 끝내야지. 좀처럼 흥이 나질 않네.”
대미궁에서는 위험한 순간에도 동료들끼리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았었다.
그에 비하면, 여기는 분위기가 딱딱하다고나 할까.
마지막 전투에서 전부 목숨을 잃었던 동료들이 문득 그리워졌다.
“빨리 끝낸다고요? 형편없을 정도로 약해진 당신에게 그런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체내의 마력을 끌어모으며 만전을 대비하던 앨런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먼저 날아오는 공격 마법들을 가볍게 무력화시킨 후, 이면 공간을 완전히 구축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격리되는 주위 공간에 전열의 인원은 그만 갇혀버렸다.
“그럼 이제부터 제대로 실력행사를 해보죠.”
앨런의 손아귀에 검은 구체가 생성되었다.
암흑 마법.
그중에서도 위력이 제법 상당한 편에 속하는 것이었다.
“각오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양쪽의 두 분 전부요.”
전열을 이끌던 전요한은 미리 경고를 주었다.
그러고는 아르티나의 검끝을 앨런이 집어 던지는 검은 구체 쪽으로 향했다.
콰광–
양쪽의 형세가 맞부딪치자, 주위 공간이 진동하며 4등급 수준의 마력 파동이 일어났다.
그 진원지에서 정면으로 맞닥뜨린 실비아와 채강윤은 버티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꺄악!”
“크윽!”
유일하게 서 있을 수 있었던 존재는 전요한뿐이었다.
비록 종합 능력치는 양쪽의 전력에 비해 낮았지만, 메르첼로부터 받아낸 펜던트가 효력을 발동한 덕분이었다.
“그, 그건 성녀의 가호!”
기적을 발휘하는 상위 권능에 앨런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느낀 그는 더욱 거대한 구체를 생성해냈다.
만약 그대로 내던진다면, 이면 공간은 물론이고, 교정을 포함한 아카데미 전부가 일시에 소멸해 버릴지도 모르는 위력.
앨런이 극단적인 선택까지 서슴지 않으려 할 때였다.
“이제 됐어요. 충분히 싸웠으니 그만두세요, 아빠.”
어디선가 나타난 에밀리가 가까이 다가와서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상냥함에 앨런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왜 그렇게 걱정하는 거니? 너와는 상관없는 자들의 목숨을.”
“상관있어요. 이 세상은 아빠 말대로 가혹해서 혼자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자신의 일은 아무래도 괜찮다며 에밀리가 웃어 보였다.
아니, 이미 더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구원받았다.
그 이유는, 수백 년간의 기나긴 악몽이 마침내 끝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콱‑!
빙결의 마법검, 아르티나가 서슬 퍼런 검기를 내뿜으며 심장을 관통했다.
에밀리가 잠시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찔러 넣은 일격.
3성급의 성유물이 입힌 치명상에 앨런은 피를 왈칵 쏟아냈다.
“크윽!”
일반적인 피해라면 어렵지 않게 재생할 수 있었으나 이번엔 전혀 달랐다.
성녀의 가호가 깃든 일격은 그의 마기를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있다.
“네가 부탁한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미안해. 부녀간의 중요한 대화를 방해해서.”
전요한이 고개를 숙인 채 사죄했다.
에밀리는 본인이 원한 일이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되었어야 했어. 아빠가 절망 속에서 고통받지 않으려면.”
마침내, 모든 비극은 끝이 났다.
시선을 돌린 에밀리가 다시 한번 앨런의 뺨을 어루만졌다.
“울지 말아요, 아빠. 고통받지 말고 모든 부담을 내려놓으세요.”
에밀리의 시선에 비친 앨런은 인간이었을 때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드디어 끝났나. 집념에 가까웠던 나의 망령된 욕망이.”
주마등처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최후의 감정이 만족감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딸이 바로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것도 같지만 상관없다.
‘나의 딸은 진정으로 구원받았다.’
그 필수적인 전제조건은 바로 죄악에 사로잡힌 자신의 해방.
이렇게 해서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어째서 일찍 깨닫지 못한 것일까.’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앨런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내 숨이 끊어진 그의 안면엔 희미한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다시 만나서 고마웠어. 그럼 이만 돌아갈게.”
앨런의 모습이 잿더미로 화하며 흩날리기 시작하자, 에밀리가 다시 뒤로 돌아섰다.
전요한은 평소와 달리 무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너의 아빠가 정말로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대미궁에 갇혔을 때부터 오랫동안 고민해오던 질문이었다.
죄악에게 영혼까지 바친 존재가 모든 대가를 치르고 다음 생을 허락받을 수 있는지.
“글쎄. 그동안 나쁜 짓을 엄청 저질렀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천 년은 넘게 걸리겠지.”
“앨런이 도중에 포기한다면?”
“아마 영영 구원받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아빠가 지금까지보단 덜 고통스러울 거라 생각해.”
말을 마친 에밀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많은 별들이 그녀를 부르듯 각자의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태어난다면, 오빠의 여동생이 되고 싶어.”
“왜 하필 나야?”
“그러면, 매일 바보 같은 장난이나 치면서 놀 수 있으니까.”
곧 있으면 이별인데, 분위기도 못 잡고 둔감하다며 에밀리가 혀를 살짝 내밀었다.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랐던 전요한은 우선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걱정하지 마. 너는 이미 내 여동생이야.”
“정말?”
“그래, 꼭 혈연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전요한에게 있어 에밀리는 고마운 존재였다.
절묘한 타이밍에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카데미는 암흑 마법의 파괴력에 휩쓸려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빠를 구원하려는 목적이었긴 해도, 그녀의 상냥한 마음씨는 무미건조했던 전요한의 가슴마저 먹먹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헤헤. 에밀리는 행복한 소녀야. 되돌아가기 전에 그동안의 소원을 전부 이뤘으니까.”
전요한과 손을 맞잡고 있는 에밀리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1~2분.
성녀의 능력을 한계치까지 이끌어낸 펜던트의 형체가 균열을 일으키며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다들 만나서 즐거웠어. 그럼 다음 생에 또 봐.”
에밀리는 승천하기 직전에 모두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윽고 그녀가 있던 허공에는 흐트러진 푸른빛만이 남겨졌다.
“부디 평온하게 쉬길 바라. 아무런 근심·걱정도 없는 영혼 세계에서.”
에밀리를 위해 묵념하던 전요한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영혼 세계를 언급하고 나니, 대미궁에서 목숨을 잃었던 동료들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무슨 생각 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서희가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딱히 없었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뒤로한 채, 전요한은 등을 돌렸다.
아직 지상엔 그가 헤쳐가야 할 일들이 산처럼 남아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