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36화 (36/180)

제36화. 도시괴담 (6)

콰드득.

성녀의 십자가는 내구도가 바닥났는지 더는 버티지 못했다.

내리쳐진 타격점으로부터 균열이 생겨나며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전요한은 순간 허탈함을 느꼈다.

‘하, 이거 500만 원짜린데.’

다음 달의 품위유지비가 들어오기 전까진 통장 잔고에 신경 써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앨런 테일러.

녀석은 율리안 교관의 갑작스런 등장에 다급히 계획을 수정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간과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나 보군요.”

일단 안전거리부터 확보한 앨런이 율리안을 응시했다.

그가 일으켰던 푸른 불꽃은 명백한 에테르.

남다른 재능을 지닌 마법사만이 다룰 수 있는 제5원소였다.

“처음부터 줄곧 네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악마.”

고개를 치켜든 율리안이 차가운 표정으로 노려봤다.

예전에 소중한 제자를 악마에게 잃었던 기억이 그의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나 보자고, 하급 마족.”

전요한은 다시 한번 앨런을 향해 도약했다.

최후의 방어 수단인 암흑 결계마저 박살 나서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런데 강기태가 비틀거리며 전요한의 앞을 막아섰다.

“으, 으으….”

물론, 자의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앨런의 수작질에 의해서였다.

“비켜, 멍청아!”

순간적으로 방해받은 전요한이 화를 내며 윽박질렀다.

그럼에도 강기태는 꾸물거리기만 할 뿐, 마음이 원하는 대로 비켜서지 못했다.

“조심…해….”

무거워진 입술을 비틀며 간신히 말을 내뱉기만 한다.

얼마 후, 고개 숙인 강기태의 모습이 마수처럼 흉포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크윽….”

마인화가 진행되면 형체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왜곡되기도 한다.

“당신의 친구를 무시하고 지나치긴 힘들 겁니다. 이것 또한 스반힐트 님의 권능이니까요.”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한 앨런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언급한 권능은 지배.

일곱 죄악은 이런 식으로 굴복시킨 자들을 마인화하여 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었다.

“귀찮게 됐군.”

전요한은 잠시 멈춰 선 채로 투덜거렸다.

앨런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선 강기태부터 상대해야 한다.

‘대신 맡아줄 녀석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함께 데려온 박수호는 죄악의 사도가 된 강현석과 대결하는 중이었다.

환각에 걸린 상태라 애먼 쪽으로 자주 주먹질을 한다는 게 문제이긴 한데.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서창민이 지원 사격을 해주면 시간 끌기 정도는 될 듯했다.

애초에 강현석은 만년 열등생이라 전력이 낮은 편인 탓이다.

‘아무튼, 핵심적인 역할은 잠시 빼앗기게 되었군.’

강기태에게 가로막힌 동안, 율리안 교관은 자신을 앞질러 앨런과 대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질투의 죄악에게 은총을 받는 마족을 제압하지 못할 터.

최대한 빨리 승부수를 띄우고 싶었던 입장으로서는 그다지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봐, 네가 몸집 좀 커졌다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기분 나빠진 전요한은 마인화하는 강기태를 올려다봤다.

이미 의식마저 빼앗겨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겠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크르르….”

반인반수의 형상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강기태가 붉은 눈을 빛냈다.

본래 신체강화 계열의 이능력자라서 그런지, 변화한 육체가 제법 적응하기 쉬운 모양이다.

“잠깐이나마 함께 지냈던 친구로서, 정신 좀 차리게 해줄게.”

전요한은 아르티나를 역소환한 후 양쪽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는 강기태에게 도약하여 먼저 발차기를 내리꽂았다.

퍼어억!

전력을 다한 강공격에, 산양의 뿔이 자라난 머리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던 표정이 볼썽사납게 뭉개진다.

“크르!”

열받은 강기태가 우락부락한 오른손으로 다짜고짜 전요한을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서투른 움직임에 당할 초심자가 아니었다.

“지능이 낮아져서 그런가, 이제는 박수호만도 못한 상대가 되어버렸네?”

한 방 한 방의 위력이 강해졌긴 하지만, 적중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공중제비를 하며 지면에 착지한 전요한은 다시 한번 발차기를 먹였다.

이번엔 취약한 부위인 옆구리.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갈비뼈에 금이 갔다.

쿠웅!

맥없이 당한 강기태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아무리 마인화를 했다고 해도 상대는 대미궁까지 공략하고 나온 고인물.

나름대로는 전력을 다했지만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이런, 꼭두각시가 너무 쓸모없었군요. 적어도 이면 공간이 구축될 때까지의 시간은 끌어주길 기대했는데.”

날아오는 푸른 불꽃을 이리저리 피하던 앨런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율리안 교관이 몰아붙이는 탓에 이면 공간은 아직도 완전히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네놈의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음 공격 마법을 준비하던 율리안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강기태를 일시적으로 제압한 전요한도 이에 공조하려 했다.

“시간을 끈 만큼 더 고통스럽게 때려눕혀 주지!”

모든 상황이 앨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결국, 앨런은 본래의 계획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이대로는 아무런 결실이 없을 것 같군요. 그렇다면 다음 기회에….”

마계에서도 흔치 않은 성유물인 심연의 칠흑 망토가 있었다.

이를 사용하여 이면 공간으로 숨으면 저들도 당장 어쩌지 못한다.

유일하게 그 편법을 알고 있는 전요한조차도 공간 자체를 베어내는 건 아직 무리인 단계.

앨런의 도주엔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다.

“당치도 않습니다. 이렇게 소동을 일으켜놓고 도중에 전장에서 이탈하려 하다니.”

학내의 교화 담당 교관, 메르첼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진.

* * *

“서, 성녀인가?”

거북한 신성력을 느낀 앨런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아카데미 내부에 사제 계열의 이능력자가 있단 건 파악하고 있었지만,

한밤중의 소동에 이 정도로 신속히 지원을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메르첼뿐만이 아니었다.

검술 교관인 실비아와 관리국의 요원들도 뒤이어 나타났다.

“그동안 잘도 죄 없는 생도들을 괴롭혔군요? 아카데미의 교관으로서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실비아가 먼저 돌격해오며 연보라색 머리칼을 휘날렸다.

정서희와 채강윤은 잠시 눈빛을 교환하다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

“…….”

같은 관리국 요원 출신이지만, 성향이 안 맞아서 그런지 두 사람은 서로 어색하기만 할 뿐이었다.

애초에 소속된 부서도 달랐다.

채강윤은 최정예 인재만이 들어갈 수 있는 1과.

정서희는 신입보다는 조금 나은 전력에 속하는 6과.

그래서 정서희가 아무래도 더 눈치를 보며 채강윤의 기세에 맞춰주려는 움직임이었다.

“놀랐냐? 사실은 내가 전부 불렀어. 만에 하나라도 네놈이 도망친다는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

주춤하는 앨런을 향해 전요한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빙결의 마법검, 아르티나를 소환했다.

“다음 기회 따윈 없다고 생각하고 전력을 드러내라, 하급 마족.”

아직 상대는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조차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궁지에 몰리면 필사적으로 나오려 할 터.

메르첼의 신성 마법에 의해, 앨런은 도망친단 선택지를 빼앗긴 상태였다.

어느 틈에 형성되었는지, 황금색 결계가 전장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었다.

“후후. 정말로 재미있군요. 어지간한 변수까지 전부 고려했는데, 완전히 벼랑 끝까지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한심한 신세를 자조하고 싶어졌는지, 앨런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후 그가 웃는 낯짝을 드러냈을 땐, 눈빛이 섬뜩한 적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한번 시작해보죠. 모든 것을 걸고 진심으로 당신들과 맞서겠습니다.”

최후의 결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선전포고였다.

앨런의 모습이 마수처럼 흉악하게 변해가자, 율리안은 그를 멈추려 했다.

“어림없다!”

순식간에 공간 도약을 하여 복부에 푸른 불꽃을 먹이려 했으나,

휘아아아!

마치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마기에 의해 멀리까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위계가 있는 마족이 제 모습을 드러낼 때는 함부로 달려드는 게 아닌데.’

참패를 예상했던 전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괜히 자신이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게 아니다.

방심한 채로 싸우는 앨런이었다면 모를까.

배수의 진을 치면서까지 완전히 현현하려는 녀석의 목은 쉽게 가져갈 수 없다.

‘저번에 맞섰던 네크로맨서도 여유롭게 상대했다면 이런 식으로 각성했을 거야.’

위계 있는 마족의 전력은 기존의 상식선 이상이었다.

그래서 전요한은 대미궁에 갇혀 있을 때 놈들의 통성명을 되도록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걸 전부 듣고 나면, 대뜸 전력으로 각성하여 덤벼 오는 경우가 태반인 탓이었다.

‘물론 이름이 너무 길어서 외우기 싫었던 것도 있었지만.’

아무튼, 이제는 아카데미의 교정이 너무 휩쓸리지 않는 걸 걱정해야 했다.

불러 모은 이들의 도움까지 받으면 앨런을 쓰러뜨리는 것 정도야 가능하다.

하지만 시간을 너무 지체하면 주위의 피해가 커질 테고, 불필요한 시선까지 끌 수 있었다.

‘여기에 있는 자들까진 크게 문제없겠지만, 평범한 생도들까지 모여들면 곤란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앨런은 질투의 죄악에게서 부여받은 권능으로 그들을 조종하려 들 것이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전력들이라 되도록 속전속결로 끝내고 싶었다.

“메르첼 교관님, 잠시 전략회의 좀 가능할까요?”

고민하던 전요한은 휘몰아치는 마기의 소용돌이로부터 잠시 물러났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요?”

한 손으로 눈앞을 보호한 채, 폭풍의 여파를 버티던 메르첼이 물었다.

“혹시 이런 상황에 유용하게 써먹을 만한 성유물을 가지고 있나 해서요.”

사제 계열의 이능력자라면, 신성력이 깃든 장신구 따위를 숨겨두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메르첼의 모습을 위아래로 한차례 살피던 전요한은 목적에 부합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거, 제게 주실 수 있나요? 저 악마를 제압하는 데 나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펜던트를 목에 걸치고 있었다.

평소에는 이렇게 시선을 끄는 장신구가 아니다.

그저 투명한 색채를 하고 있고, 마물 따위가 근접했을 때 비로소 반응한다.

“난이도가 높은 던전에서 힘들게 얻은 건데, 꼭 필요한 건가요?”

고가의 성유물인지라 메르첼도 넘겨주는 걸 조금 망설였다.

전요한은 그녀에게 지난 빚이 남아있음을 밝혔다.

“저번에 한번 사고를 치면 봐주신다고 했었죠? 아무래도 그 시기가 다가온 것 같네요.”

내부에 깃든 권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고 나면, 일반적으로 성유물은 파괴되며 사라진다.

일회용으로 써먹을 것임을 암시하자 메르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아아, 신이시여.”

“급해요. 어서 주세요.”

앨런의 각성 의식이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돌연 일어난 마기의 폭풍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모처럼 생성해놓은 황금색의 결계마저도 이대로는 위태로워 보였다.

“아, 알겠어요. 준다고요.”

평소 경건함을 유지해왔던 메르첼은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녀가 물욕에 망설이며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수천만 원어치의 성유물을 건네받은 전요한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골동품 가게에서 이걸 발견했더라도, 당장의 돈이 없어서 사 오지 못했을 것이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가요, 진심으로 전력을 다하는 제겐 무엇이든 더는 통하지 않을 겁니다.”

본모습으로의 각성을 거의 마친 앨런이 이를 갈며 말했다.

전요한은 대답 대신, 푸른빛의 펜던트를 허공에 들어 올렸다.

이윽고 반딧불처럼 모여든 황금빛과 함께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히히! 역시 지난번에 한 약속을 지켜줄 줄 알았어!”

앙증맞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

악령이었을 당시와는 다르게 모든 것이 정화된 상태였다.

구원받아서 승천했던 소녀는 전요한을 향해 해맑게 웃어 보였다.

“에, 에밀리?”

자신의 죽은 딸이 갑작스레 등장하자, 앨런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일평생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고, 애타게 그 행방을 찾아왔던 존재가 최후의 결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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