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도시괴담 (5)
보름달이 뜬 한밤중이었다.
강현석은 어디론가로 급히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식.”
그가 단단히 화난 이유는 한 신입생 때문이었다.
서창민.
학사장을 뒷배로 두고 있어서 평소에도 기고만장해하던 녀석이었다.
“감히 나한테 도전을 해?”
만년 열등생이었다곤 하지만, 엄연히 학년의 차이가 있다.
1년 후에 졸업하는 선배를 입학한 지도 몇 개월 안 된 신입생이 모욕한다는 게 말이 되나?
‘나 때는 그딴 짓 하면 바로 학생회실에 소환되었는데.’
채린이 학생회장이 된 후로 기강이 문란해진 느낌이었다.
하여간, 계집애가 중요한 일을 맡아서 하니 상급생을 우습게 보는 애송이들이 생겨난다.
“아무튼, 넌 뒈졌어. 서창민.”
얼마 전에 어떤 마족으로부터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다.
그 대가로 적지 않은 생명력을 바치긴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평소에 갈망하던 것을 손에 넣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탓이다.
스슥-
어둑한 교정에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뭔가를 느낀 강현석은 자신의 마기를 곤두세웠다.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은데.’
결투 장소에 도착하려면 아직 조금 먼 상태였다.
혹여나 서창민이 기습 공격을 해올지도 몰랐기에, 만반의 준비를 해두기로 했다.
‘전용 무기가 활이었지, 아마.’
밤중의 어둠 속에서 원거리 무기로 요격해오면 성가시다.
기본적으로 유효 사거리가 제법 있다 보니 상대의 위치를 찾기 힘든 탓이다.
휘이이익!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다채로운 마법 화살이 허공을 찢으며 빈틈을 노리고 날아온다.
“크윽!”
움찔한 강현석은 본능적으로 회피했다.
만년 열등생이라 원래대로라면 반응 속도가 느렸을 테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리 쉽게 당할 줄 알고!’
상위 마족과 계약하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였다.
마기를 부여받음과 동시에 종합 능력치가 대폭 상승한다.
덕분에 강현석도 지금은 어지간한 정부요원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나와라. 건방지게 수작질이나 하지 말고.”
강현석은 눈을 부라렸다.
만약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교정을 샅샅이 뒤지며 직접 찾아낼 생각이었다.
잠시 기다리자 어두운 저편으로부터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전혀 거리낌이 없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상대의 존재를 확인한 강현석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너, 너는?”
이런데서 만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
그는 바로 전요한이었다.
“저번에 교실 안에서 중지 올리며 도발했지? 내가 복도 걸어가고 있을 때 말이야.”
전요한은 씨익 웃어 보였다.
지난 빚은 나중에라도 확실히 갚는 성격이라, 사소한 도발이었지만 기억하고 있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나타난 거냐? 정말 어지간히도 쪼잔한 녀석이군.”
“실은 다른 이유가 더 있어. 네놈의 배후에 있는 건방진 악마라고나 할까.”
강현석이 죄악의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쯤은 얼마 전에 눈치챌 수 있었다.
교내의 사소한 일들까지 전부 알고 있는 정하은 덕분이다.
그녀가 전해주는 정보를 토대로 뒷조사해 보면, 비밀리에 음모를 꾸미려 해도 꼬리가 잡힌다.
“어, 어떻게 알아낸 거지?”
“죄악의 사도에 대해서는 나름 전문가거든. 토벌 경력이 무려 25년이야.”
어떤 계기로 악마의 유혹에 빠지고, 부당한 힘을 얻고 난 다음에는 뭘 하려는지도 꿰뚫어볼 수 있다.
학내의 인물들 중에서는 오직 전요한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젠장할. 어쩌다가 이렇게 발각되어버렸지.”
강현석이 뒷걸음질 치며 땀을 삐질 흘렸다.
먼저 도발을 해온 서창민과 한번 맞붙으러 나온 것뿐인데, 숨겨왔던 계획이 탄로 난 느낌이다.
며칠 후에 예정된 사건이 터지면 혼란한 틈을 타서 내부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지만.
함께할 동료들을 모으기도 전에 최종적인 목표 대상과 대치하게 되었다.
“어떻게든 네놈을 곤경에 빠뜨려야 더욱 높은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는데.”
이대로는 붙잡힐 수 없었다.
도망가야겠다고 판단한 강현석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가 적당한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어딜 내빼려고? 너는 이미 포위당한 상태다.”
한 발짝 늦게 나타난 박수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녀석이 걸어온 위치가 도망치려는 방향에 있었으므로, 강현석은 순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말로 노리고 기다렸던 것인가.”
붙잡히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등줄에 식은땀이 흘렀다.
강현석이 곤란에 처하자, 배후에 있던 악마가 개입을 해왔다.
그는 가늘게 찢어진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나 입을 열었다.
“이런, 결국 불안한 예감이 적중하고 말았군요.”
* * *
얼마 전부터 관리국 요원들이 오가는 등 심상치 않은 징후가 관찰되었다.
방해받지 않고 활동하기 위해 악마는 괴한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어설픈 녀석이라고 치부할 법했지만 전요한은 그 정체를 알고 있었다.
“네가 누군지는 알고 있으니 카멜레온 같은 짓거린 그만둬라, 앨런 테일러.”
우연히 마주쳤던 여생도의 증언에 의하면, 녀석의 외형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여생도에게만 진짜 모습을 보여준 이유는 아마도 그녀를 현혹시키려는 목적에서였겠지.
하지만 그 알량한 시도는 본인의 정체가 들통나는 계기가 되었다.
“후후. 이거, 점점 귀찮아지는 느낌이군요. 불필요한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 위장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앨런 테일러가 음흉하게 웃으며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창백한 피부의 금발 벽안.
고풍스러운 중세귀족의 의복을 갖춰 입은 사내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네놈은 너무 건방져.”
“당신도 무모한 성격이기는 마찬가지군요. 스반힐트 님의 원대한 계획에 정면으로 대적하려 하다니.”
“뭐가 원대한 계획인데? 평화로웠던 지구를 침공해서 식민지로 만들려는 게 그리 고상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이곳은 최하위 차원에 위치한 불모지. 그분의 서열전을 위한 자양분이 되는 게 당연합니다.”
앨런 테일러가 밝히길, 자신의 목적은 전요한이 방해되지 않게 최대한 여기에 발목을 묶어두는 것이었다.
아카데미에 잠입한 사실이 곧바로 들키지 않은 이유는 마계의 성유물을 사용한 덕분이다.
심연의 칠흑 망토.
상위 존재의 권능이 깃들어 있어서 누구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골치 아픈 사건이 닥쳐 오면 미래시가 발동하는 전요한을 제외하고는.
“어쩐지 학내에서 유독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게 수상하더라고. 무언가 어둑해서 기분 나쁜 기운도 여기저기로부터 느껴졌고 말이야.”
“역시 당신은 낌새를 채고 있었군요. 저도 그에 대비하여 나름의 대비책 정도는 마련해둔 상태입니다.”
앨런 테일러가 순순히 자신의 목적을 알려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건 바로 증거 인멸.
최종 목적 이외의 모든 방해 요인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전부 죽어 줘야겠습니다. 전요한, 당신을 제외하고요.”
제법 자신감 있어 보이는 모습이라서 전요한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무언가 놓친 거라도 있나?’
강현석을 궁지에 몰아넣으면 녀석이 등장하리란 건 예상했다.
그런데 저번보다 더 마기가 강해진 것이, 전력도 한층 올라간 낌새고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도 여유가 있다.
‘혹시 마계 영지에서의 귀족 작위가 올라간 건가?’
만약 그렇다면, 단순히 물의를 일으키는 것 이상의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었다.
지금까진 남작의 지위밖에 안 되는 악마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승격된 것일 수도 있었다.
위계가 백작까진 안 되길 바랐지만, 이어지는 상황이 그 기대를 단번에 저버렸다.
스르르르–
순간 주위 풍경이 왜곡되며 기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상위 악마들이 즐겨 써먹는 장난질인 이면 공간.
그 안에 한번 갇히고 나면 상대를 제압하기 전까진 탈출할 수 없다.
“귀찮은 일을 벌이는군. 그냥 처맞는 편이 덜 수고로울 텐데.”
“저번처럼 수모를 겪고 싶지는 않아서요. 그래서 스반힐트 님에게 한시적으로 특별한 권능을 부여받았죠.”
질투의 죄악에겐 상대하기 골치 아픈 권능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환각.
저주나 다름없는 교란 행위라서 이에 걸린 자들은 동료조차 서로 죽이게 된다.
이미 환각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는지, 박수호가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어어, 뭐지? 분명 천강우의 모습이 보였는데.”
아직 이면 공간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만 더 지나고 나면, 정말 곤란한 일이 벌어질 터.
그전에 수작질을 막아야 했다.
- 녀석을 향해 정조준해서 쏴. 최대한의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일격으로.
- 아,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사념으로 지시를 받은 서창민이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박수호와 달리, 그는 다소 떨어진 위치에서 만일에 대비한 움직임을 준비 중이었다.
휘아아악!
잠시 후, 매서운 마법 화살이 앨런 테일러의 미간을 노리며 날아갔다.
“쓸데없는 짓을.”
앨런 테일러는 조소하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을 찢던 마법 화살이 중간 지점에서 무력하게 소멸해 버렸다.
하지만.
“전혀 무의미한 건 아니었어.”
그 찰나의 틈에 전요한은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빙결의 마법검, 아르티나가 예리한 검 끝을 내세운 채 일시적인 빈틈을 노린다.
“하하. 역시 허를 찌르는 덴 남다른 소질이 있으시군요?”
암흑 장막을 펼쳐 막아낸 앨런이 즐겁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이 정도는 해주지 않으면 직접 복수하러 온 보람이 없다.
전요한의 깽판으로 던전 형태의 영지도 소멸해 버렸고, 그곳에 머무르던 어린 딸의 영혼도 어디론가 사라진 상황.
사실상 모든 걸 잃어버린 처지라서 처참한 고통을 되갚아주고 싶었다.
“과연, 어떨까요. 이래 놓고 역으로 약점을 기습 공격당한다면.”
전요한의 약점은 미리 파악해둔 바가 있었다.
가깝게 지내는 학내의 동료들.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치지 않도록 뒤를 봐주고 은근히 신경 써주는 면이 많았다.
그래서 자주 무방비로 노출되는 한 명을 얼마 전에 사로잡은 상태다.
“자아, 보시죠. 제가 준비해놓은 장난감을.”
양손을 들어 올린 앨런의 옆으로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면 공간에 붙잡혀 있었던 그의 정체는 강기태였다.
“으으….”
강기태는 마기에 완전히 당해버려서 제대로 말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앨런이 원하는 대로 느릿하게 움직일 뿐.
꼭두각시 같은 모습을 본 전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자세한 내용까진 말해주지 않았지만, 당분간 몸을 사리라며 경고를 주었다.
미래시가 발동한 이후, 강기태에게서 어둑한 색채의 기운이 보였던 탓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미래의 가능성은 어떻게든 실현되고 말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한 방 먹기는 했군.’
앨런의 계획대로라면 제법 성가신 인질극이 펼쳐질 터였다.
그동안 이면 공간이 완전히 구축될 테고, 환각에 빠진 동료들은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겠지.
어떻게 대응하더라도 불리한 상황의 연속일 터.
물론, 그 계획이 현실화되기 전에 다른 누군가가 막아낸다면 무의미한 걱정이긴 했다.
화르르륵!
어디선가 나타난 푸른 불꽃이 암흑 결계를 강타했다.
이로 인해 작은 균열이 생겨나자 앨런은 처음으로 표정을 굳혔다.
“이번에도 당신인가요?”
앨런이 바라보는 지점엔 율리안 교관이 서 있었다.
천리안으로 상황을 관망하다가 개입의 필요성을 느끼고는 공간 도약을 해온 것이다.
예상했던 율리안의 등장에 전요한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럴 줄은 몰랐지? 내가 빈틈투성이일 거라 생각했겠지만, 그건 큰 오산이야.”
학내의 불순 종자를 토벌하는 중대한 계획에 맹점이란 없었다.
배후의 율리안으로부터 든든하게 지원을 받으며, 전요한은 품에 간직하던 성유물을 꺼냈다.
성녀의 십자가.
저번에 한 번 사용해서 내구도가 반쯤 남았는데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한번 제대로 붙어 보자. 이딴 방벽 뒤에 숨어 있지 말고!”
허공으로 들렸다가 한 차례 내리쳐지는 성녀의 십자가.
눈부신 황금빛이 발산되며 암흑 결계가 산산조각 났다.
“크윽!”
곤란함을 느낀 앨런이 눈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