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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34화 (34/180)

제34화. 도시괴담 (4)

“나 불렀어?”

전요한은 영문을 모른 채 가까이 다가왔다.

왠지 채강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너 말이야, 린이랑 무슨 관계냐?”

채강윤은 평소보다 더 진지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야, 오빠. 왜 갑자기 그러는데?”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그래. 잠시 비켜 있어.”

하나뿐인 여동생의 남자관계인 만큼 허투루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재벌가의 엄격한 교육 환경에서 자란 탓에, 채강윤의 가치관은 보수적인 면이 남아 있었다.

“쟤랑 무슨 사이냐고? 만약 남자 친구라고 하면 어쩔 건데?”

전요한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친동생의 보호자로 나선 채강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던 것이다.

“뭐, 남자 친구?”

순간 채강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옆에 있던 채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설마?”

학내 연애를 한다고 나무라는 건 아니었다.

상대가 전요한이어서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뿐.

의문점이 많이 남아 있는 상대에겐 쉽사리 신뢰를 주기 어려운 채강윤이었다.

“저, 전요한! 갑자기 무슨 수작질이야! 너랑 내가 언제부터….”

당황해서 빨갛게 달아오른 채린이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 채,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후우….”

복잡해진 상황에 채강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진짜 연인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린, 남자 문제는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하도록 해. 안 그러면 나중에 복잡해지니까.”

“으, 응….”

“아까 내가 했던 말 잊지 마. 선택은 네가 스스로 내려야만 하는 거야.”

정략결혼에 대한 친오빠로서의 조언은 여기까지였다.

채강윤은 다음 용무를 위해 전요한에게로 돌아섰다.

“아무래도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야 할 것 같다.”

여차하면 질문 공세를 퍼부을 것 같았던 조금 전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부탁? 뭔데?”

전요한의 표정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녀석이 부탁을 해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린을 곁에서 잘 지켜줘라. 조만간 실전 평가가 있을 테니까.”

“아아, 조별로 던전을 공략한다는 거? 벌써 편성이 끝났나 보네?”

“물론이다. 너라면 그게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 알고 있겠지?”

관리국이 파악한 바에 의하면, 악마형의 던전 게이트가 새롭게 생겨났다.

죄악의 권속이 둥지를 트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유명학 국장은 극비리에 내부적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었다.

죄악의 존재가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막대한 혼란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임시 부사감인 정서희로부터 정보를 들었을 터였기에, 채강윤은 자세한 이야기를 생략했다.

“분명, 학내의 성유물 도난 사건과도 관련 있을 것 같네. 그 던전에 빨리 들어가고 싶다.”

반복되는 학내 생활에 조금 싫증을 느끼던 전요한은 의욕을 불태웠다.

안 그래도 귀찮게 하는 죄악의 세력을 적당한 기회에 정리하려던 참이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어.”

양쪽 사이에 끼어 있는 채린이 혼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학생회장의 신분임에도 최근 결정된 중대 사안에 대해 아직 듣지 못한 상태였다.

“자세한 건 네가 이야기해 줘라, 전요한. 나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다.”

손을 흔들어 보인 채강윤이 휙 하고 등을 돌렸다.

자신의 여동생에게 자세한 것까지 들려주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혹여 깊이 연루되어 다칠까 봐 염려한 탓이었다.

“잠깐만,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호기심이 동한 전요한은 걸어가던 채강윤을 잠시 멈춰 세웠다.

외부적으로 드러나선 곤란한 비밀임무만 수행하고 다니는 녀석이라 그 동향이 궁금했다.

“너도 알고 있는 사건이다. 학내에서 도난당한 성유물의 행방을 찾는 것이지.”

의외로 채강윤은 순순히 자신의 임무를 알려줬다.

다른 상대였다면 무시하고 지나쳤을 테지만, 여동생의 안위를 맡긴 자에겐 이 정도의 대화는 허락하기로 했다.

“아아, 그거라면 부탁해. 나는 사정이 귀찮아질 것 같아서 조사에 빠졌거든.”

“네가 없어도 충분히 찾아낼 수 있으니 걱정마라. 관리국의 정보력은 그리 얕잡아 볼 수준이 아니야.”

말을 마친 채강윤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채린은 멍하니 보고만 있다가 전요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기, 차근차근 설명 좀 해주지 않을래? 왠지 나만 소외되고 있는 기분이야.”

학생회장으로서 그녀는 방금 전의 대화에 대해 알 권리가 있었다.

전요한은 분수대 옆에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우선 자리부터 잡자. 조금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까.”

앞서 포섭했던 정하은, 박수호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이제는 충분히 신뢰할 만한 인물이었다.

먼저 벤치에 걸터앉은 전요한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아직은 세간에 알려지면 곤란한 일들이 있어.”

어디까지나 비밀을 엄수한다는 조건하에서였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며 채린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 * *

본관 최상층의 학장실.

희끗한 머리의 학사장은 한 생도와 면담을 하고 있었다.

“요즘 학내 생활엔 별문제 없는가? 저번처럼 전요한이 시비를 걸어오지는 않고?”

“따,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배려해주신 덕분에 정말로 만족하며 잘 다니고 있습니다.”

마주 본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서창민은 조금 당황한 모습이었다.

만약 함부로 일러바치기라도 하는 날엔,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탓이었다.

전요한이 걸어놓은 피의 속박에서 풀려나지 않는 한, 서창민이 자유롭게 입을 열 수 있는 기회란 없었다.

“정말 다행이로군.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자네의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네.”

그윽한 색채의 차를 마시던 학사장이 인상 좋게 웃어 보였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화의 본론으로 넘어갔다.

“알다시피 이곳은 메르키오르 재단의 자금으로 운영되고 있네. 자네도 알고 있지?”

메르키오르 재단은 관리국의 고위직들이 유명한 정계 인사와 합심하여 세운 단체였다.

그러다 보니, 비영리적인 운영을 하고 있음에도 내부적인 비리와 바람직하지 못한 유착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략결혼.

가진 자들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재단의 주요 인물들은 가문 간의 결합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바로 눈앞의 학사장처럼.

그다지 달갑진 않았지만, 서창민은 애써 안면에 미소를 띠었다.

“물론입니다. 저희 가문이 메르키오르 재단의 주축을 맡고 있으니, 아카데미 재정 운영은 올해도 별문제 없을 겁니다.”

자신의 아버지 이외에도 줄곧 재정적 지원을 분담하던 이들이 있었다.

학생회장인 채린의 가문 또한 이사회의 한자리를 맡고 있다.

아름다운 외모에 성적까지 출중한 팔방미인.

입학한 이후로 항상 마음에 뒀던 여자지만, 다른 녀석에게 선수를 빼앗긴 서창민이었다.

‘체엣. 학사장의 딸은 별로 인기가 없다던데.’

자신을 이리로 부른 이유 따윈 처음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교활한 노인네가 달리 무슨 용무가 있겠는가?

그리고 애초에 결정권은 가주인 아버지에게 있지, 자신에겐 어떤 영향력도 없었다.

시간 낭비나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는 서창민.

그런 속내도 모른 채 학사장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조만간 이사회 임원 간의 사교모임을 계획 중인데, 부디 아버님과 함께 참여해주게.”

만약 내부 거래가 성사되면, 정략결혼으로부터 얻는 것이 많았던 탓이다.

그렇기에, 학사장도 상대 가문의 구미를 최대한 자극해야 했다.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한 위기를 겪고 있네.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려면 선구안을 지닌 교양인들이 서로 단결해야 하는 법이지.”

말을 마친 학사장이 제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뒀던 리모컨을 눌러 한쪽 벽면에 영상 화면을 띄웠다.

“이, 이건 뭐죠?”

“우리의 비전. 아직까진 극비에 해당하는 내용인데, 특별히 자네에게만 보여주는 거라네.”

학사장이 공개한 건 현재 진행 중인 대규모의 비공개 프로젝트였다.

하나의 지역구를 온전히 내부 영역으로 포함하는 학원 도시.

그 스케일은 현재의 아카데미에 결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능력자들을 위한 특별 주거 구역을 만든다고요?”

“어때, 멋지지 않은가? 학원 도시가 완공되면 전 세계를 위협하는 재해조차 막아낼 수 있을 걸세.”

중세시대에나 생각할 법한 초거대 성채 도시였다.

교육, 학문, 상업, 금융, 공공 업무 등 사회 전반의 주요 기능을 갖추고 있는 소국가.

그것은 감히 인류의 최후 보루라고 불러도 될 만한 요충 지역이다.

수년간 꿈꿔왔던 야심찬 계획에 서창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 겁니까? 이런 형태의 지상 낙원이 완성되려면.”

“허허,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네. 이사회 임원 모두가 예전처럼 합심하기만 한다면 말이야.”

현재의 진행 속도로 가늠하자면 길어야 2~3년.

자신이 졸업할 때쯤엔 이미 완공되어 있을 거란 말에 서창민은 어안이 벙벙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프로젝트와 연관되어 있는 겁니까?”

“관리국 국장을 포함한 전부일세. 그들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가?”

던전 게이트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곤 했다.

이로 인해 번창하던 상업 구역이 슬럼가로 변해버리는 경우도 많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져가는 지금, 정경계의 고위직들이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만일 사태가 수습되지 않으면 전부 여기로 도망치려는 속셈이로군.’

서창민은 무책임하게 본인의 목숨 줄부터 챙기는 이들이 가증스러웠다.

물론, 자신이라고 해서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할 생각 따윈 없다.

하지만 현시대의 귀족층을 자부하는 입장으로서, 그 본분을 다하겠단 의무감은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진정한 귀족은 위기의 상황에 먼저 나서서 적과 싸운다.

그러한 책무를 다한다고 여겼기에 스스로 오만해질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약한 자들을 업신여길 수 있었다.

‘나도 전요한, 그 녀석처럼 강해질 수만 있다면….’

문득 자신의 무능함을 깨달은 서창민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참기 어려운 모욕감을 준 전요한이 싫다.

하지만 그의 강인한 정신과 우월한 능력은 동경한다.

그런 식으로 맞부딪치지만 않았다면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서 사과한들 진심이 전해질 것 같진 않았다.

“잘 봤습니다. 과연, 학사장님은 대단한 분이시군요.”

내부 갈등을 겪던 서창민은 예의 있게 고개를 숙였다.

보안상의 이유로, 학원 도시에 대한 내용은 간단히 훑어보는 정도가 다였다.

“좋은 소식이 생기면 다음에 또 부르겠네.”

“감사합니다, 학사장님.”

가식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면담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학장실의 문을 닫고 나온 서창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순간 무언가에 잔뜩 얽매인 것처럼 가슴이 조여 왔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무형의 족쇄.

명문가의 자제라고 해서 마음대로 날뛸 수만 있는 건 아니다.

대대로 물려 내려져 온 특권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이 이제야 피부에 직접 와닿았다.

‘반드시 강해지고 말겠어. 그런 족쇄 따위도 부숴버릴 수 있을 정도의 승자가 될 거야.’

그러면 이따위 고민은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서창민이 걸음을 옮기며 의욕을 불태우고 있을 때였다.

“학사장과 대면하고 돌아오는 길이냐?”

복도의 벽면에 기대어 있던 한 생도가 그를 멈춰 세웠다.

전요한.

누구보다도 두려운 존재와 마주하자 서창민은 침음을 삼켰다.

“따, 딸꾹!”

당황한 나머지, 평소답지 않게 이상한 소리까지 냈다.

“놀랐냐? 일단 진정하고 내 이야기를 좀 들어봐.”

“뭐, 뭔데? 딸꾹!”

저번보다 소리가 크게 나오자 서창민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름이 아니고, 너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

“따, 딸꾹! 어서 말해!”

“어떤 놈을 붙잡으려는데 네가 미끼 역할을 좀 해줘야겠다.”

던전 공략을 떠나기 전에, 학내에서 수상한 짓을 꾸미는 악마부터 처리해야 했다.

앨런 테일러.

질투의 죄악, 스반힐트의 권속인데 그리 간단하게는 기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미, 미끼라고? 딸꾹!”

“걱정 마. 죽게 내버려 두진 않을 테니까.”

대미궁에서 25년간 죄악의 사도들과 싸워온 경력자였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둔 전요한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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